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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46화 (46/85)
  • 46화

    *

    어릴 적 태헌은 팔에 금이 가도 그다지 아픈 줄 몰랐고, 저를 괄시하는 고용인의 팔을 물어뜯었을 때도 죄책감이 없었다.

    태헌을 골리려 일부러 어려운 문제를 낸, 소싯적 천재 소리를 들었던, 그러나 이제는 과외 선생이 된 남자가 계단에서 미끄러져 굴러떨어졌을 때도 태헌은 흙빛 눈동자로 그 참상을 건조하게 관찰했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머리로 계산한 뒤 움직인다. 몇 수 앞까지 내다본다. 예외를 다섯 가지 이상 만들어 만일의 최악을 대비한다.

    이렇듯 우 회장의 가르침을 받은 태헌은 더없이 살벌한 기계가 되어갔다.

    유학을 떠난다고 했을 때, 선예의 표정이 어땠던가.

    홀가분해 보였다. 더 이상 태헌의 비인간성을 눈앞에 두고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해방감이 엿보였다.

    이젠 부모와는 기념일이 아니면 만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부모가 틈틈이 태헌의 정신과 의사에게 소견서를 받아 간단 걸 알고 있었다.

    그딴 종이 한 장에 만족할 수 있다면 그러시라고, 태헌은 방임했다.

    그런 부모가 결혼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하려 드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시기에 결혼을 거론하고 송현까지 보내 염탐하려는 건 연서를 의식한단 말이었다.

    감시를 통해 연서와 만나는 걸 알았으니 통제하겠단 소리였다.

    “내가 한연서랑 결혼하는 게 겁나는 거야, 아니면 한연서를 만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둘 다인가?”

    태헌이 조소했다. 그러자 태선이 제법 결연한 투로 말문을 열었다.

    “태헌이 네가 어렸을 때 어땠는지 아니? 마음에 안 드는 건 망가뜨려서 버렸어. 정말 네 마음에 드는 건…… 어떻게 한 줄 아니?”

    태헌이 피식 웃었다.

    “망가질 때까지 가지고 노는 애였어.”

    “그래서.”

    “그래서라니. 너 그 아가씨 마음에 들어 하는 거잖아. 네가 그 아가씨 다치게 할 게 뻔한데, 그걸 알면서 두 사람을 붙여놓으라고?”

    “대체 누굴 위하고 싶은 건지 헷갈리네.”

    “태헌아, 나는 엄마는…! 네가 그런 사적인 감정 때문에 멀쩡한 사람 망가뜨리는 거 못 봐.”

    “이 지랄하는 게 한연서를 위하는 거라고?”

    태헌이 시큰하게 웃었다. 연서는 지금쯤 고뇌의 쇼핑을 하고 있을 거다. 큰돈을 물 쓰듯 쓰며 불편해하면서도 태헌을 위한 물건을 성의껏 고르고 있겠지.

    그러곤 밤이 되면 어제처럼 쪼르르 달려와 산 것들을 보여줄 터다.

    웃으면서. 기쁘다는 듯이. 그러니 칭찬해달라는 듯이 우태헌을 바라볼 한연서.

    행복하다는데 굳이 위한답시고 이 평화를 깨뜨리겠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네가 그 아가씨를 만난다고 해. 이 험한 세원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혹여 누가 그 아가씨 다치게 하면, 넌 가만히 있을 수 있니?”

    태헌의 소유를 손댔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것처럼 태선이 떠들어댔다.

    “그러다 보면 그 아가씨도 네 본모습을 알겠지. 나중에라도 그 아가씨가 떠난다고 하면 그땐 순순히 놔줄 순 있겠니? 너 하던 대로 부숴버리고 싶지 않겠냔 말이야.”

    떠나? 한연서가 내 허락도 없이?

    “태헌아, 나랑 부모님이 걱정하는 건 그런 거야.”

    제 일인 양 열변을 토하는 태선을 향해 태헌이 쓰게 웃었다.

    “그건 좀 개 같네.”

    조악한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사방에 가시가 달린 전차가 되었다. 브레이크 없이 달려 연서를 넝마로 만들 남자의 본질을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그게 뭐 어떤가.

    그리고 헤어지며 연서를 망가뜨릴 생각은 없었다. 태헌의 갈증이 끝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떠나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었다.

    넌더리 나고, 진절머리 나는 가족이지만 태헌은 그들을 상대하는 법을 일찌감치 깨우쳤다. 무시와 적당한 호응. 그거면 된다. 연서의 일이라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태헌은 결국 마음에 찰 때까지 연서를 가지게 될 것이고, 모친의 방해 공작을 가뿐히 쳐낼 것이다.

    가족들은 태헌을 과하게 판단하고 우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보다 잘 먹고 잘살고 있는 건 안 보이는지.

    “한연서 적당히 만나다 치울 거야. 더 의미 둘 것 없단 뜻이야. 대답이 됐나?”

    “태헌아.”

    “듣자 하니 매형 누님 없이는 밥도 못 먹는다며.”

    “뭐?”

    “마누라가 떠먹여 주는 거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한다던데, 얼른 가 봐야지. 가서 대신 결재 서류에 사인도 좀 해주고.”

    “우태헌!”

    태선의 처지를 비웃은 태헌이 얘기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뒤로 태선의 흥분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엄마, 그 아가씨 만나러 가셨어.”

    멈칫한 태헌의 음성이 싸늘하게 깔렸다.

    “무슨 소리야.”

    “엄마, 그 아가씨 만나러 가셨어! 이제 어쩔 거니?”

    태헌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태선은 이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타인이 선을 넘었을 때 태헌은 광활한 어둠 같은 눈동자를 보였다. 그 끝이 어땠었지. 기억을 더듬는 태선의 손끝이 떨려오고 있었다.

    *

    연서는 손목에 종이 가방을 주렁주렁 달고 매장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지.

    저녁에 태헌의 레지던스로 직접 가기로 했다. 그의 집으로 가는 건 처음이라서 긴장 반 설렘 반이었다.

    태헌의 진짜 성에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라 버릇처럼 기대하고 있었다.

    “한연서 씨.”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연서의 고개가 돌아갔다. 잠시 후 연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되찾았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여기서 뵙네요.”

    태헌의 모친 박선예. 과거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로 현재는 교수직에 있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조심스러운 말투에서 연서는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직감했다. 백화점 VIP룸으로 향한 연서는 응접실을 흘긋거리다 선예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푹신한 벨벳 소파가 부담스러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직원이 내온 커피가 테이블 위로 놓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결국 연서가 긴장감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 먼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요.”

    “죄송합니다. 저 이사님 만나고 있습니다.”

    “알아요.”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번 승빈을 만나냐고 물었을 때 제대로 답하지 못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그 대답을 했다.

    이제 커피를 뿌리실까, 아니면 돈 봉투를?

    “태헌이한텐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에요.”

    선예는 거친 방법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연서를 질타했다. 그래서 더 아팠다. 목이 메는 걸 참고 연서가 대꾸했다.

    “네. 저도 압니다.”

    “알면 다행이지만, 한연서 씨가 걱정이 되어서요.”

    선예가 회상하듯 시선을 옆으로 두었다. 태헌은 제 배 아파 낳은 아들이지만 정이 안 갔다.

    굳이 따지자면 무서웠다. 혹 사이코패스가 아닌지 의심해 은밀하게 검사까지 시행했다.

    우 회장의 손에서 사업을 위한 병기로 키워진 태헌에게 사적으로 만나는 여자가 생긴 건 처음이었다.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태헌이 보통 아닌 건 알겠죠?”

    “이사님께서 유력한 후계자라고 들었어요. 당연히…….”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태헌이한테 뭐 이상한 점 못 느꼈어요?”

    연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만하고 재수 없으며 결벽적인 데다, 건조하고 무심한 남자였다. 거기에 연서를 통제하려고 들었다.

    그게 일반적이진 않지.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유능했으며 자기 관리에 철저했고 바쁜 일정을 불평 없이 소화해내는, 동경 받아 마땅한 기업인이었다. 못된 말버릇을 제외하면 그녀가 기댈 만한 어른 남자이기도 했다. 그에게 보호받으며 연서는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안정감을 남몰래 채우기도 했다.

    “이상하긴 해요.”

    “안다니 다행이네. 연서 씨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남자 아니에요. 그러니 더 깊어지기 전에 헤어지는 게 나을 거야.”

    “…알아요. 하지만 저는 이사님이랑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요.”

    이쪽을 빤히 보는 선예의 이목구비에서 태헌과 비슷한 수려함이 묻어났다. 태헌의 생김새는 우 회장 쪽을 닮았으나 분위기는 외탁한 것 같았다. 날 서고 세련된 느낌이 공통분모처럼 자리했다.

    그래서인지,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제가 이사님을 많이 좋아하거든요.”

    선예의 두 눈이 흔들렸다. 태헌도 제게 흔들린다면 저런 표정을 할까. 어려운 가정을 해보며 연서가 슬며시 웃었다.

    “그래서 이사님 곁에 있는 시간이 행복해요.”

    “태헌이는 아닐 거예요. 장난감처럼, 그런 의미로 연서 씨를 곁에 두려는 거예요.”

    타인의 시선으로 직접 확인받으니 더 절박해진다.

    “…이사님 선보신다고 들었습니다.”

    내리깐 연서의 속눈썹이 아프게 떨려왔다.

    “그래요. 태헌이도 앉은 자리에 맞는 일을 해야 하겠죠.”

    “저는 그런 것까지 감수할 생각이에요.”

    “좋은 선택은 아니잖아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연서는 스스로에게 다짐시키듯 단어 하나하나를 천천히 내뱉었다.

    “교수님께서 뭘 걱정하시는지 전부 이해할 순 없어요. 하지만 제 걱정을 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생각보다 건강해서 다행이랄까, 골치가 더 아파졌달까. 나도 모르겠군요.”

    선예가 힘없이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연서의 손목이 거칠게 잡혀 올라갔다.

    “뭘 다 듣고 있어.”

    “이, 이사님?”

    태헌이 마법처럼 눈앞에 서 있었다. 그가 일으키는 힘에 연서가 힘없이 딸려갔다.

    휘청이다가 태헌의 가슴에 코를 찧어 끙끙대는데, 태헌의 살벌한 음성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럽니까.”

    “놀랍구나. 네가 직접 오다니……. 이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도 단단히 든 모양이야.”

    “사람 시험하는 게 재미있습니까?”

    태헌에게선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라도 해야. 네가 맞선 자리에 나오지 않겠니.”

    “계속 이런 식이면, 더는 못 맞춰 줍니다.”

    말을 마친 태헌이 연서를 끌고 VIP룸을 나섰다. 손목을 쥔 힘이 아프지는 않았으나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이, 이사님!”

    “입 다물어.”

    “쇼핑한 거 다 두고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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