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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47화 (47/85)
  • 47화

    *

    조수석 문이 열리고 연서가 태워졌다. 보닛을 돌아 직접 운전대를 잡은 태헌이 말없이 핸들을 감았다. 추진력을 얻은 차가 재빠르게 굴러갔다.

    “화 많이 나셨어요?”

    “입 다물라고 했을 텐데.”

    “왜 저한테 화를 내세요?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아니, 애초에 어머님 오시면 만나지 말라고 하든가. 왜 괜히…….”

    끼이익.

    차가 갓길에 정차했다. 연서가 눈을 크게 뜨고 태헌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거칠게 넘긴 태헌은 좀처럼 보기 힘든, 화난 얼굴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진 덤덤했던 것 같은데…….

    침대에서가 아니면 보이지 않던 표정의 변화였다. 드문 일이라 연서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었다.

    “그 여자가 뭐라고 했어.”

    “…네?”

    “어떤 말로 후볐냐고 묻는 거야.”

    “그냥…… 이사님 걱정하셨어요.”

    선예의 말로는 연서가 걱정되어 찾아온 거라고 했지만, 태헌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싶은 부모의 걱정이겠지.

    “대체 누굴 감싸고 싶은 거야. 그 여자하고 벌써 정이라도 나눴어?”

    “정말이에요. 제가 느끼기에 이사님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께서 아들 걱정하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연서가 말끝을 흐리며 피식대는 태헌을 살폈다. 연신 웃는 그는 화난 것보다 어이없어 보였다.

    넥타이를 살짝 끌어 내린 태헌이 뒷좌석으로 손을 뻗었다. 주름 잡힌 슈트 아래 탄탄한 가슴이 몇 번 크게 움직이고서야 그가 자세를 바로 했다.

    태헌의 손에는 파일이 들려 있었다. 두꺼운 커버가 씌워진 파일은 연서가 여태 보지 못했던 형식의 서류였다. 그가 연서에게 파일을 건넸다.

    “그 여자가 보낸 거야. 이래도 내 걱정 같아?”

    “이게 뭐예요?”

    태헌이 보라는 듯 기다렸다. 연서가 파일을 들췄다.

    두꺼운 커버가 열리자 비밀에 싸여 있던 내용이 드러났다.

    [지희윤. 26세. 서국 중공업 회장의 외손녀.]

    단아한 미인상인 여자의 사진이 몇 장 붙어 있었다. 아래론 그녀에 대한 신상과 이력 재산 수준 따위가 꼼꼼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박 교수가 준비한 맞선 후보야.”

    뒷장으로는 또 다른 여성들의 프로필이 가득했다. 모두 입이 떡 벌어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파일을 넘기던 연서가 차가워진 손끝으로 서류를 덮었다.

    태헌이 맞선을 보지 않는다면 선예와 충돌할 거란 걸 돌아가는 상황으로 인지했다.

    그가 다시 핸들을 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연서는 묵묵히 서류 끝자락을 쥐고 있다가 조심히 말문을 열었다.

    “교수님께서 뜻을 굽히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이 맞선 봐야 하는 거잖아요.”

    전에 부친과 통화할 때 태헌은 분명히 그랬다. 맞선 몇 번 봐주겠다고.

    진짜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맞선 몇 번 보는 거로 선예를 달래놓을 수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터다. 연서의 머릿속은 정리가 완료되었다.

    “너 데리고 간을 봤어. 엄연한 협박이지.”

    “…그래서 화나신 거예요?”

    “누가 내 것 건드리는 거 안 좋아해.”

    내 것이란 단어가 묘했다. 그에게 종속된 것 같긴 한데, 연서가 원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이럴 땐 비위 맞춰 주고 다신 안 부딪히는 게 효율적이긴 하지.”

    태헌은 이런 때도 냉정했다. 선예에게 좋은 감정은 없으나 그녀의 뜻을 어느 정도 받아주겠단 결정을 번복하진 않았다.

    그 일이 바로 맞선이었다.

    “네가 정리해 봐. 누가 나와 어울리는지.”

    “…….”

    “셋만 추려서 첫 번째는 이번 주말로 맞선 잡아. 식사하고 차까지 마시는 게 좋을 거야.”

    “이걸 왜 제가 해요…?”

    “비서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

    그 순간 연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연서의 핸드폰은 백화점 주차장에 고이 모셔둔 차에 있었기에 그녀가 꺼낸 건 태헌이 준, 업무용 핸드폰이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는 현호의 것이었다.

    현호가 웬일이지?

    전에 급하게 이 번호로 연락한 적이 있어서, 현호도 이리로 연락한 것 같았다. 태헌의 눈치가 살짝 보였지만 혹시 전처럼 또 아파서 쓰러진 건 아닌가 싶어서 연락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 현호야.”

    연서가 전화를 받기 전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태헌이 핸드폰을 뺏어 뒷좌석에 던지는 건 그보다 더 빨랐다.

    연서가 비어버린 손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뭐 하신 거예요?”

    “얘기 중에 다른 전화 받지 말아야지?”

    “현호예요. 급한 전화일 수도 있단 말이에요.”

    연서가 핸드폰을 잡으려 몸을 돌리려 하자, 그가 손을 낚아챘다.

    “운전 중에 위험하게…….”

    태헌은 한 손으로 운전 중이었지만, 연서의 염려와 다르게 차는 안정적으로 주행했다.

    “그럼 위험하지 않게 똑바로 앉아.”

    “핸드폰 찾아야 해요.”

    “그럼 난 차를 세울 거고 저 개 같은 핸드폰을 더 멀리 던지겠지?”

    연서가 조금 붉어진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못됐어.”

    “잘 아네.”

    “아무리 이사님이라고 해도 저한테 온 전화를 함부로 끊으면 안 되죠.”

    “그 전화로는 사적인 통화 지양하라고 하지 않았어?”

    “자기는 맞선도 보면서 난 통화도 마음대로 못 해요?”

    태헌의 턱이 강직되는 게 보였다. 그가 낮은 목소리를 음산하게 내뱉었다.

    “한연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지.”

    “…….”

    “틀린 말인가?”

    태헌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맞다. 연서는 그가 바라는 대로 해야 했다. 태헌이 갚아준 빚은 연서를 을이 되게 만들었고, 부채감을 떠안겼다.

    덕분에 애인으로 지내는 잠깐의 시간에도 고용주와 고용인이 되어 허리를 착실히 굽혀야만 했다.

    서러워도 어쩌나. 없는 사람이, 도움받은 사람이 바짝 엎드려야지.

    그렇다고 저 얄미운 뺨을 올려붙이고 꺼지라고 할 순 없지 않을까. 태헌이 미운 한편, 그에게 끌리는 마음은 수시로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누가 그랬지.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고.

    이 마음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지는 기분이 들어 싫었지만, 적당히 좋아하고 치워버릴 수 있는 감정은 결코 아니었다.

    씩씩대던 연서가 머리를 차분하게 쓸어넘겼다.

    “그럼 이사님 원하는 대로 맞선 상대를 간추리면 되는 거겠네요.”

    연서가 코를 찡그리며 감정을 억눌렀다. 그러지 않으면 꼴사납게 울어버릴 것 같았다.

    “너더러 하라는 이유가 뭐겠어.”

    “저 열받으라고요.”

    “맞선 볼 상대를 너에게 고르란 건, 내 배려야.”

    “배려가 다 얼어 죽었나 봐요.”

    “말 예쁘게 하고.”

    “이사님이 하실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서 정말 괜찮은 건 아니었다.

    파일을 가득 채운 그의 짝으로 어울리는 여자들은 전부 준수한 외모에 최상위 스펙을 가졌다. 연서가 전에 태헌에게 가져다준 이력서는 쓰레기라 불릴 만큼의 차이였다.

    그리고 후보를 정리하는 동안 마음이 다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안절부절못하는 것보다 자신이 맡는 게 나을지 몰랐다. 태헌도 그걸 아는 거겠지.

    그걸 배려라곤 말할 수 없겠지만.

    “말했듯이 의례적인 맞선이야. 그냥 몇 번 비위 맞춰 주면 나도 물론이고 너도 편해져.”

    “교수님이 또 저를 찾으실까요?”

    “그렇게 안 둬.”

    “네에.”

    비딱한 대답에 태헌이 한숨 쉬었다.

    태헌에게서부터 시작된 동아줄이 그녀를 끌어 올리는 게 아닌, 바닥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란 있단 생각이 드는 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연서가 파일을 꽉 쥐었다.

    “핸드폰 던진 건 사과하세요.”

    “그건 내 잘못이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요?”

    “그건 네가 알겠지.”

    태헌은 끝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내린 연서가 뒷좌석에서 핸드폰을 꺼낼 때까지 그는 침묵했다.

    태헌은 그날 연서의 오피스텔로 돌아오지 않았다. 레지던스 방문도 수포로 돌아갔다.

    *

    온종일 같은 매장만 몇 번째 방문했는지 몰랐다. 태헌은 의외로, 아니 생각만큼이나 까탈스러웠다.

    커프스링크 하나 때문에 연서는 매장 문지방이 닳아 없어지도록 분주하게 오갔다.

    녹초가 된 후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태헌의 회사를 찾았다. 이사실과 같은 층에 있는 휴게실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자그마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제대로 개인 비서로 두시려나?”

    “에이, 그럼 우린 뭐구요.”

    오가며 얼굴을 몇 번 마주한 비서실 직원들의 목소리였다.

    “우린 당연히 이사님 비서고. 보니까 사적인 일 처리할 때만 한연서 씨 부르시던데요? 우리한텐 그렇게 선 그으시면서 좀 섭섭해.”

    연서는 또렷하게 들려오는 제 이름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런 거 아닐걸요. 보면 모르시겠어요? 이사님이 괜히 꼬투리 잡아서 괴롭히는 거잖아요.”

    “혹시 그거야? 길들이기?”

    “예예. 성격 나쁜 사람 중에 왜 버릇 들이려고 뺑이 치게 하는 거, 그거지.”

    “대체 왜? 용인에서 알게 된 거라고 안 했어요?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나?”

    “다들 모여서 뭐 하는 겁니까.”

    돌연 신 비서의 목소리가 들리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연서는 손에 쥔 종이가방을 꾹 쥐고서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태헌의 사무실을 들락거리는 그녀가 이상하게 비칠 만도 했다. 직원들이 이런 식으로 숙덕일 줄은 몰랐으나 곰곰이 생각하자 틀린 말도 아니었다.

    태헌은 작정한 것처럼 연서를 굴려댔고 그에게 빚을 진 연서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그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에게 밉보여 벌 받는 것처럼 보일 법했다.

    연서는 사무실 노크 후,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오늘 태헌의 사무실을 방문하는 건 벌써 네 번째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태헌은 손을 씻었는지 젖은 손등을 스쳐 시계를 채우고 있었다. 연서를 바라보는 눈빛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이럴 때마다 마음에 덜컥 제동이 걸렸다.

    섹스할 땐 그토록 뜨거우면서 일상의 그는 사막 같았다. 성욕으로 인한 만남일 뿐이란 증거가 발견될 때마다 속앓이하게 되는 것이다.

    “바꿔 왔습니다. 색상은 블랙으로 둥글되 테두리는 가장 작은 보석 세공으로, 사이즈는 손톱만 하게, 천박한 느낌 없게, 고급스럽지만 너무 무겁지도 않은 커프스링크로요.”

    태헌의 복잡다단한 주문을 늘어놓으며 연서가 생긋 웃었다.

    “이번에도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이사님이 디자인팀이나 회사를 만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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