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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비서-45화 (45/85)
  • 45화

    *

    송현에게 인사를 건네고 태헌과 병원 로비 쪽으로 걸었다. 연서는 고민하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 내쳐지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태헌은 아무 말 없었다.

    연서가 잡은 손에 살짝 더 힘주어 잡을 뿐.

    심장이 빨리 뛰었다. 병원 입구에서 조금 걷다가 연서가 말했다.

    “이사님 먼저 가세요. 저는 여기 앞에서 택시 타면 돼요.”

    “김현경 비서가 차 가져올 거야. 그거 타고 들어가.”

    “오피스텔 가는 거 아니에요. 현호가 병원에 입원해서…….”

    태헌의 발이 우뚝 멈추어서 말이 끊겼다. 어슴푸레 짙어진 하늘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놓여 있었다. 연서는 막막한 침묵 속에서 슬그머니 잡았던 손을 놓았다.

    손을 슬쩍 빼는 연서에게 처음부터 관심 없던 양, 태헌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벗어.”

    “네?”

    “아무거나 주워 입고 다니지 말고.”

    뒤늦게 태헌의 말뜻을 이해한 연서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다시피 한 얇은 카디건을 벗었다.

    이건 현호의 옷이었다. 현호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 급히 해열제를 찾아 먹이느라 물을 쏟았다. 젖은 옷을 가릴 겸 급하게 걸치고 온 것인데 그게 태헌의 눈에 보였나 보다.

    그런데 왜 벗으라는 거야?

    연서는 아리송해하면서도 착실히 옷을 벗었다. 얇은 반소매 티셔츠 위로 태헌의 재킷이 가볍게 얹어졌다.

    연서는 커다란 태헌의 재킷을 모아쥐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사님.”

    “다른 새끼 흔적 달고 다니지 마. 그게 옷이든 뭐든, 나한테 안 보이게 해.”

    연서의 숨이 덜컥 돌부리에 걸린 것처럼 크게 삼켜졌다. 그녀의 다갈색 눈동자에 미미한 기대감이 어렸다.

    “…왜요?”

    “예의는 갖춰야지?”

    “예의는 자기가 없으면서.”

    태헌이 하도 살벌하게 바라보아서 움찔했으나 연서는 어깨를 뒤덮은 온기에 조금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아니면 그에게 어떤 희망을 품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송현 앞에서 아무런 변명도 해주지 않고 맞선 상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그의 잔인함에 상처 받았다. 그러니 조그마한 희망일지라도 그것에 기대어 행복해지고 싶었다.

    미련한 사랑이었다.

    그럼에도 태헌도 성욕 말고, 순전히 저를 바라봐주고 있진 않을까, 그런 가당치도 않은 마음을 안고서 괜히 물었다.

    “태도 확실히 해.”

    “혹시 질투…?”

    “한연서.”

    “네에.”

    “예의 갖추라고 하지 않았어?”

    “현호 그냥 친구예요. 그러니까 질투 안 하셔도 돼요.”

    “순 제멋대로네.”

    그 순간 세단이 미끄러지듯 두 사람 앞에 당도했다. 현영이 차에서 내려 인사한 뒤 뒷좌석 문을 열었다.

    태헌이 가느다란 허리를 가볍게 밀어 연서를 떠밀 듯 차에 태웠다.

    “오피스텔로 보내.”

    “네, 이사님.”

    태헌의 지시는 연서가 아닌 현영에게 닿았고, 연서는 차 문이 닫힌 뒤 멀어지는 태헌을 보기 위해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나 기다려 주지 않고 차가 출발했다.

    “김 비서님, 오피스텔 말고 다른 데 잠깐 들러도 되죠?”

    연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께서 오피스텔로 모시라고 하셔서,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순 제멋대로인 건 자기면서.”

    “네?”

    “아니에요.”

    연서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무심한 주제에 속박하려 드는 태헌의 무도함이 상처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마음에 한숨이 가늘게 샜다.

    *

    연서는 스치면 큰일 날 것처럼 조심조심 외제차를 주차 칸에 밀어 넣은 후 아찔하게 호흡했다.

    태헌에게 업무용으로 건네받은 이 차는 지나치게 몸값이 비쌌다. 북적이는 도로를 빠져나가기 이롭다는 장점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단점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고급 차는 애물단지와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실수할까 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운전하는 내내 손에 땀을 쥐어야 했다.

    백화점 주차장에서 잠시 숨을 고른 연서는 차에서 내렸다.

    “어우, 더워.”

    부쩍 더워진 날씨가 코점막을 습하게 파고들었다. 차에 두고 내린 핸드폰이 생각나 잠깐 멈칫했다가 그냥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태헌이 쥐여준 업무용 핸드폰이 있기에 괜찮을 터다.

    연서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태헌이 이 핸드폰을 줄 당시를 떠올렸다.

    「웬 핸드폰이에요?」

    「이왕이면 이걸 사용해. 이 번호로 사적인 연락은 배제하고.」

    「업무용으로 사용하란 말씀이에요?」

    「너 비서야. 효율적으로 생각해.」

    새 번호로는 태헌과 연관된 사람만 소통할 수 있단 소리였다.

    태헌은 그 뒤로 개인적이든, 할 일을 지시하든 모두 새 번호로 연락해왔다. 강 여사에게 변화가 생기면 이 핸드폰으로 전해질 거라고 했다. 그래서 연서는 새 핸드폰을 품에서 놓지 못했다.

    문제는 태헌이 요즘 일거리를 산더미처럼 안겨주어 본래 핸드폰을 사용할 틈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낮엔 업무를, 밤엔 태헌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호가 퇴원했단 소식을 듣고도 가보질 못했다.

    지영과 연락한 건 또 언제인지. 늦은 밤 그녀의 메시지에 답장하면, 다음 날 확인하고 다시 업무로 내몰리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강 여사의 면회를 한 날 저녁.

    반강제적으로 오피스텔로 향한 연서는 태헌에게 전화해 따졌다. 그리고 태헌은 그를 벌하듯 고시원 방을 정리해버렸다.

    연서는 얼떨떨한 상황에서도 태헌의 지나친 관여가 그리 싫지 않단 걸 깨달았다.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무관심보단 나았다. 비뚤어진 관심을 달가워하는 스스로 깨닫곤 자조할 새도 없이 기뻤다. 속도 없이.

    연서는 며칠째 백화점을 찾았다. 태헌에겐 퍼스널쇼퍼가 따로 있지만 평상복 구입을 연서에게 맡긴 터다.

    용인에서 지내는 동안 비서 일을 하기로 했는데, 용인 집이 비자 태헌은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써먹기 시작했다. 한동안 비어 있던 태헌의 레지던스에 채워 넣을 물건 모두를 연서에게 맡겼다.

    하나 연서에게 쇼핑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비싼 금액을 턱턱 지불하고 VIP 대우를 받는 일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왕관을 훔쳐 쓴 기분이었다. 문득 태헌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빚 갚고 싶다면서. 능력껏 쓸모를 다해 봐.」

    매장을 들어선 연서가 옅게 웃었다.

    “넥타이핀 사려고 하는데요, 세련된 디자인으로 보여주시겠어요?”

    *

    긴 회의를 마친 태헌이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몇 층 위의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잠시간의 틈을 타 연서에게 전화를 해볼까 생각하던 차였다. 사무실 앞 손님용 소파에 앉아 있던 여자가 태헌을 보고 일어났다.

    태헌의 누나 우태선. 그녀는 재작년에 세원과 비슷한 수준의 대기업 총수 손주와 결혼했다. 최근엔 대형 로펌의 변호사로 활동하며 돈이 되는 건만 수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긴 웬일이야.”

    태헌이 건조하게 물었다.

    “오랜만에 누나 보는 건데, 그게 인사라고 하는 거니?”

    “들어와.”

    태헌의 사무실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테이블 위에 놓이고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깬 건 이 자리가 짜증스러운 태헌이었다.

    “뜸 들이지 말고 할 말 해. 시간 없어.”

    “정 없는 건 어쩜 얘나 지금이나 똑같니.”

    “할 말.”

    “알았어, 할게. 너 선본다며?”

    “내 맞선에 개나 소나 관심이 많아.”

    저렴한 언사라는 듯 태선이 가지런히 정리한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가 고민하던 말을 내뱉었다.

    “그 아이랑 계속 만날 거니?”

    무관심으로 일관하려던 태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리를 꼬고 앉은 그의 턱이 살짝 기울었다.

    “엄마가 그냥 두겠어? 결혼 따로 첩 따로, 이거 우리 집에선 통용 안 돼, 태헌아.”

    “누가 결혼을 해.”

    “그럼 선만 보겠다는 거야? 우리 엄마 그 정도로 물러날 사람 아니야. 나를 보면 알잖아?”

    태선에겐 결혼 오래 사귄 애인이 있었다. 같은 로펌 선배로, 5년 넘게 열애했으나 태헌의 모친 박선예가 설계한 결혼이란 산을 뛰어넘진 못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태선은 사랑 대신 가족과 대의, 자신이 나고 자란 배경을 지켰다. 그리고 태헌도 같은 수순을 밟게 될 거란 건 굳이 말하기엔 입 아팠다.

    “설마 그 아가씨랑 결혼한다고 할 건 아니지?”

    태헌이 아무 말 없자 태선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제가 생각해도 동생이 그럴 이는 아니었다. 태헌에게 결혼이란 사업적 도구일 뿐일 테니까.

    “하면.”

    “뭐, 뭐?”

    “한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미쳤다고 하겠지! 네가 약혼녀들까지 물리면서 그 아가씨 만난다고 하면, 엄마 아빠 네 머릿속부터 검사하려 들걸?”

    태헌이 조소했다. 누굴 아직도 엄마 품 찾는 어린앤 줄 알고. 이럴 때만 부모라고 가족이라고 참견하려 드는 그들이 피곤했다.

    어렸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저 무서운 꿈을 꾼 뒤 부모님 방 앞을 서성였을 뿐인데, 모친 선예는 태헌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날 낮에 선예가 매달리던 예술 재단 사업의 허점을 짚어냈단 이유로, 태헌은 부모님 방을 염탐하는 꺼림칙한 괴물 취급을 받았다.

    선예는 제가 낳은 아이를 두려워했다. 말을 배우고 궁금한 게 많아질수록, 아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게 늘어날수록 모친은 일그러진 애정을 보였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선예는, 세원 그룹 우이혁의 씨를 임신했단 이유로 꿈을 접어야 했다.

    그녀는 히스테리가 심했다. 부친은 무심했고 누나 태선은 본디 성향이 유순해 모친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애답지 않은 태헌만이 모난 돌 취급을 받았다.

    엄마. 아빠. 맘마. 까까. 사랑해요. 이런 순차적인 발달은 문장을 먼저 익힌 태헌에게 적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태헌은 성장 과정 내내 모친의 불신과 경계의 눈빛을 받고 자랐다. 자연스레 감정 대신 이성적인 사고를 우선시하게 되었다.

    그래야 선예의 모진 말과 이혁의 무심함에서 질식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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