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치명적인 독
세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제 일 이후로 이렇게 마주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였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녀를 다시 마주하는 것에 있어서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세린과 헤일리는 그녀의 인사를 부드럽게 받아들이며 마주 인사했다.
클로라는 그런 두 여인들을 향해 물었다.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네... 반갑습니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어요. 백작이 마스터라는 고정관념에 풀에 베인 것도 그녀가 베어낸 줄 알고 겁을 먹었지 뭐예요.”
“?”
“내가 오해했어요. 그녀에게는 조금 있다가 사과하려고 해요.”
세린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리사의 오해가 풀렸다는 것에 어제부터의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가슴 한 편으로는 그녀에 대한 경계를 풀 수 없었다.
미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클로라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클로라는 그런 세린과 헤일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저와 차라도 한 잔 하지 않으시겠어요? 서부에서 가져온 차가 있는데 혼자 마시려니 조금 쓸쓸해서요...”
“아....”
헤일리의 눈이 또르르 굴러가며 세린을 담았다.
그녀의 의견에 맞출 생각이었지만 무언가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서부에서 온 황녀의 제안을 거절하기에는 자신들은 바빠 보이지도 않은 상황이었고 어찌어찌 이 자리를 거절했다고 해도 손님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무례하게 보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거절이 어려운 제의라 세린도 조금 망설였으나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제가 아이를 품고 있어서요. 제 전담 의원의 허락이 떨어진 차가 아니라면 먹을 수 없는데... 어쩌죠?”
“아아.”
클로라의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가 이내 티를 내지 않고 환히 웃었다.
“그럼 의원에게 차를 보내 드셔도 되는 것인지 검사를 받고 드시는 것은 어떤가요? 조금이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래요.”
클로라의 말에 세린과 헤일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상대가 자신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미 마음을 굳게 잡은 듯 보여서 더 입을 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세린은 할 수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수락에 클로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
같은 시각, 제이는 우연히 트레일과 황성의 복도에서 마주쳤다.
“간밤에는 잘 주무셨습니까.”
“나야 뭐... 그대도 잘 잤을 것이고.”
“평소보다 잘 잤습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째 한 번 봤던 상황인데...’ 묘하게 불쾌해진 인사법에 트레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으나 이내 표정을 풀고 물었다.
“어디를 가는 길인가?”
“잠시 의원을 뵈러 왔습니다.”
“의원? 그대가 다친 것은 아닐 테고... 세린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에게 잘 맞는 식재료가 무엇인지, 먹으면 좋은 음식에 대해 물어보러 가는 것입니다.”
“흠. 그렇군.”
트레일의 수긍에 제이가 천천히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하께서는 어디를 가시는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나? 어.... 나야 그.... 뭐...”
약간 얼버무리는 듯이 눈을 돌린 트레일이 이내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하... 나도 의원에게 가는 길인데 말이지.”
“의원이요.”
“그.... 아씨...”
트레일이 이내 입술을 잘근 씹으며 망설이다가 이내 제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야, 너 아직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
“그게... 실은, 헤일 리가 아이를 가진 것 같아서.”
“!!!!”
잘 놀라지 않는 제이의 푸른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런 그의 놀란 표정에 되래 더 놀란 트레일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아니!! 예상이라고 예상!!”
“왜 그런 예상을 하시는지...”
“아니, 왜 있잖아? 그 네가 세린의 뱃속에서 마력을 봤다고 했었잖아?”
“네.”
“나도 혹시 궁금해서 했었는데... 이, 있더라고.”
“미세하게요.”
“어 맞아!”
“마력은 몇 개였나요?”
“한 개.”
환하게 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트레일의 모습이 동지를 만난 대형견을 보는 기분이었다.
제이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하 드립니다.”
“흠흠! 뭐... 고맙다.”
“그럼 혼례식은 어찌 하실 것인지요.”
“그것도 이제 알아봐야 할 것 같아.”
트레일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담겼다.
어찌 본다면 그녀와 결혼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연애를 하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하던 시간만 해도 3년을 넘겼다.
이제는 그녀와 부부라는 이름 아래에 함께 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트레일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이윽고 도착한 의료실에서 의원 벤은 트레일의 물음에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질문했다.
“마력을 확인하셨다고요.”
“응.”
“그렇다면 대부분 정답이기는 하지만... 혹시 헤일리 공녀님께서 달거리를 언제 마지막으로 하셨는지 아시나요?”
“어... 그런 거 나한테 잘 이야기를 안 해서 모르겠는데...”
“흠... 그렇다면 추후에 공녀님과 방문을 해주십시오. 뭐 마력이 미세하게 느껴졌다면 대부분 맞겠지만요.”
트레일의 표정이 밝아졌다.
벤은 그런 트레일을 귀여운 손자를 바라보듯 부드럽게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전하.”
제국의 경사가 또 하나가 늘어났다.
트레일은 싱글벙글 웃으며 제이의 어깨를 쳤고 제이는 묵묵히 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에게 좋은 음식이나 차를 알려주었으면 한다. 식재료를 이야기해준다면 더 좋고.”
“아... 차 종류라면 일단 루이보스티라는 차가 임산부에게 좋을 것입니다.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도 좋은 차라고 많은 임산부들이 찾는 차입니다.”
“그렇군...”
“그리고 음식이라면 제가 리스트를 짜 놓았으니 이것을 보시면서 참고하십시오.”
벤은 미리 준비한 리스트를 꺼내어 제이에게 건네주었다.
이 집 식구들이라면 이런 것을 원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터라 미리 준비했기를 잘 한 듯 했다.
제이는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맙군.” 라고 인사를 하며 이내 트레일과 함께 의료 실을 떠났다.
원하는 정보를 얻었으니 이제는 주방으로 이동해 이 리스트를 보여주며 저녁을 만들어 달라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럼 그대는 이제 뭘 할 건가?”
“이걸 주방에 보내고 여기에 머무르는 며칠 동안 그녀의 식사를 준비시킬 생각입니다.”
“그리고?”
“.... 그리고 그녀를 데리러 갈 것입니다만...?”
“그럼 같이 가자!”
“......”
“나도 세린 얼굴도 볼 겸, 헤일리 마중할 겸 같이 가자고.”
“네.”
제이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래, 무슨 상관이겠는가.
제이와 트레일은 부드러운 걸음걸이로 순식간에 주방에 도착했다.
그러던 그 때, 주방의 문을 열기도 전에 그의 뒤에서 걸음을 멈춘 시녀가 제이의 시선에 닿았다.
은쟁반을 굳게 잡은 시녀의 두 손이 정처 없이 떨려 있었고 힘을 준 두 손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손등에 도드라진 힘줄과 누군가에게 쫓기듯 불안한 시선처리가 그의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황후마마와 비슷한 그을린 피부라... 그 서부 제국의 황녀와 함께 왔다던 시녀겠군.’
그의 시선이 빠르게 쟁반을 훑었다.
‘찻잔의 레이스가 3개. 그 황녀가 사람을 초대했다고? 이 낯선 땅에서.’
제이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주방문을 잡던 손을 천천히 떼어내고 입을 열었다.
“거기, 너.”
“... ㄴ, 네??!!”
시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났다.
제이는 그런 시녀를 향해 냉정히 물었다.
“서부제국의 황녀전하의 전속시녀냐.”
“그... 네...”
“지금 그분에게 손님이 계시고?”
“......”
“대답.”
“... 네.”
제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손님은 누구고...”
그의 목소리가 잔인한 살기를 담았다.
“넌 그 손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
세린은 헤일리와 클로라를 따라 손님 궁으로 이동하였고 곧 그녀의 앞에 마주 앉게 되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차는 별거 아니지만 먼저 의원에게 보이고 가져오라 이르겠습니다.”
클로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찻잎이 담긴 주머니를 동남북 제국의 시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넌 이 것을 의원에게 가져다준 후 확인을 받아 오거라.”
“네.”
깔끔하게 고개를 숙이며 물러난 시녀는 이내 자리를 떠났고 클로라는 다시 헤일리와 세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동남북은 정말 아름다워요. 저희 서부에는 늘 햇살이 뜨거워서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는 사막의 모래뿐이거든요.”
“아... 그렇다면 저희 제국이 많이 새로울 것 같네요. 여기는 사계절이 반복되어 늘 그 계절에 맞는 꽃이 피거든요.”
세린이 부드럽게 말을 이으며 나직이 이야기하자 클로라도 환하게 웃었다.
헤일리는 조금 경계하는 모습으로 세린의 옆에 가까이 앉았다.
잠시 후, 문 안으로 시녀가 들어왔다.
서부에서 온 듯한 시녀는 고개를 부드럽게 숙이며 말했다.
“황후마마의 부름으로 아까 전 시중을 들어주던 시녀가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의원 벤님께 차를 허락받고 이리 타왔습니다.”
“그래, 어서 차를 내오너라.”
클로라의 눈에 작게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헤일리는 제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세린을 바라보았다.
세린도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클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을 의심하기 싫어도 저절로 의심이 가는 상황이었다.
헤일리는 클로라를 향해 말했다.
“높은 분께서 먼저 드셔야 저희도 차를 듭니다. 어서 드시지요.”
“아, 이런... 실례를.”
클로라는 부드럽게 찻잔을 쥐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헤일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금 안도한 모습을 했고 천천히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세린은 작은 토끼 같은 헤일리의 모습이 귀여워 나직이 웃다가 이내 부드럽게 잔을 잡았다.
그리고 동시의 일이었다.
탁!
쨍그랑!!
“??!!”
헤일리가 다급히 세린의 손에 들린 잔을 날려버렸고 세린의 시선에 당황이 담겼다.
“헤일리??”
그런 세린이 헤일리를 다급히 바라보자마자 헤일리는 한 손으로 제 입을 감쌌다.
“우욱!!!!”
그녀의 고운 손 사이로 붉디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세린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클로라의 눈이 밝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