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안녕 못해
클로라는 손님궁에서 제 드레스를 꽉 잡으며 창백한 낯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금 클로비스의 말밖에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클로라. 불쌍하기도 하지.’
불쌍하다고?
넌 여전히 버려진 아이란다.
버려졌다고?
이 내가?
서부제국의 황제가 직접 받아들인 2황녀인 내가?
지금 네가 친 사고는 이번만 내가 해결해주마. 여기서 일을 키우지 말고 조심히 있다가 가면 혹시 알겠니? 내가 아버지께 네 시집에 대해 잘 말해줄지.
비웃음이 가득한 듯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클로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더 붉은 피가 흘렀으나 클로라는 그를 인식하지 못했다.
서부에 높은 신분, 그리고 막강한 군사를 가진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제 나이와 20살은 넘게 차이가 났다.
그런 이들에게 팔리듯이 결혼을 하게 된다고?
클로라는 그 생각까지 미치자마자 후에 다가올 미래가 무서워졌다.
이대로는 안 돼...
클로라는 천천히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더욱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는 것 같아서 잠깐 산책이라도 갈 생각이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잠시 창문을 바라보는 클로라의 눈에 두 명의 인영이 보였다.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한 여인과 그 여인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이 제국의 3황자였다.
서로를 바라보며 아름답게 미소 짓는 두 연인들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에 강하게 박혔다.
저절로 욱신거리는 가슴께의 통증과 차오르는 분노가 클로라를 덮쳤다.
그래, 자신이 이 제국에 온 목표는 무엇이었던가.
이 제국의 황자들과 안면을 틔우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일이 풀린다면 제 아버지도 서부의 귀족에게 저를 넘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려면...
클로라의 눈이 어둠속에서 밝게 빛났다.
방해꾼들은 없어져야지.
클로라의 눈에 비친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은 맑게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미래를 모르는 밝은 미소였다.
*
아침은 금방 밝아졌다.
세린은 침대에서 제이의 팔을 베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제이는 그녀가 임신을 한 후부터 잠이 많아져 이런 늦은 오전까지도 눈을 뜨지 못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동시에 아쉬웠다.
그래도 잠든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제이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리곤 더욱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에 제 손을 올렸다.
여기서 조금씩 커져간다고 했나.
세 명이라 그런 것인지 벌써 조금 나온 것 같은 배에 제이의 눈에 걱정이 스쳤다.
이 작은 곳에서 세 명을 품고 남은 8개월을 넘게 버텨야하는 그녀가 너무도 걱정이 되었다.
제이는 부드럽게 세린의 배를 쓰다듬어주며 생각했다.
그녀를 힘들게 하지 않고 무사히 태어났으면 좋겠군.
그리곤 걱정이 가득했던 푸른 눈 속에 따스한 애정이 담겼다.
엄마도, 너희도 건강하게 만나야 한다.
그래, 건강하게 자라서 건강하게 태어나야 한다.
일단 자신을 닮지 않은 순수한 아이로.
그런 생각을 하자 세린의 연두색 눈동자가 천천히 떠졌다.
“음.... 제이...?”
“일어났습니까.”
“우.... 네..”
세린이 눈을 비비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제이는 부드럽게 세린의 팔과 어깨, 다리를 주물러주며 그녀의 몸을 풀어주었고 세린은 커다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그런 제이를 바라보았다.
“나 또 많이 잤어요?”
“많이 안 잤습니다. 더 자도 괜찮아요.”
“아니요... 잠은 다 잔 것 같아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세린이 제이의 가슴에 기대었다.
제이는 그런 세린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나직이 말했다.
“배는 고프지 않나요.”
“배요?”
세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제 배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배고파요!”
그 맑은 미소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제이는 함께 마주 웃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이 행복이 이대로만 반복되길 소망하며 제이는 세린을 안아 올리며 자리를 이동했다.
“제이! 나 걸을 수 있어요!”
“자고 일어나자마자 침대 밖으로 내려오시면 항상 비틀거리시는 거 압니다.”
“음....”
세린이 제이의 말에 바로 수긍하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래,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벤이 그랬어.’
세린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제이가 물었다.
“오늘은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음..!! 조금 있다가 헤일리와 차를 마시기로 했어요!”
“이런... 오늘의 세린에게는 저와 함께 하는 시간은 계획에 없으신가봅니다.”
“엑!! 아, 아니 제이!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알죠??”
“서운합니다.”
“네에??!!”
제이가 침통하다는 듯 아름다운 얼굴을 슬프게 일그러트리자 세린이 당황하며 눈을 굴렸다.
그를 서운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지라 당황은 배가 되었다.
세린이 고민이 깊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제이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부드럽게 제 입술에 닿는 달콤한 입술에 제이의 눈이 곱게 휘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혼 전에도 그녀를 너무 사랑했었으나 결혼을 한 뒤부터는 더욱 더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더욱 함께 있고 싶었다.
세린이 천천히 제이의 입술에서 제 입술을 떼어내며 달콤하게 웃었다.
“난 언제나 제이랑 함께 있으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봐줘요.”
“흠...”
“있다가 헤일리를 만나고 나서 같이 정원으로 산책가요! 어때요?”
“좋습니다.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저도 열심히 일을 해야겠군요.”
제이와 세린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담겼다.
서로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빛들에서 달콤한 맛이 나는 듯 했고 이내 다시 한 번 입술이 마주 닿았다.
늘 그렇듯이 행복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클로비스는 어제의 사건을 정리하기 위해 리사를 집무실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이리 들어오게.”
부드럽게 경례하며 제게 인사하는 리사를 자리에 앉히며 클로비스가 나직이 말했다.
“동생의 질 나쁜 장난에 경이 기분이 나빴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네. 미안하다고 대신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리 불렀어.”
“그리 화가 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화가 안 났기는 무슨.
너 인마 걔 죽이려고 했어.
클로비스는 그 마음을 숨기며 나직이 웃었다.
그리곤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어제 그 아이를 꾸중하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불안해서 말이지. 워낙 철이 없으니 그대가 조금만 더 유의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만약 무슨 일이 있거든 내게 말해주고.”
“네.”
성실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역시 기사다웠다.
클로비스는 깔끔하게 인사를 하는 리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스페라도의 남매들은 정말 닮지 않았으면서도 저런 말투는 닮았다는 그런 우스운 생각이었다.
어제 세린이 이르게 잠든 시각, 제이가 클로비스를 찾아 왔었다.
찾아오자마자 그녀에게 부드럽게 인사하며 나직이 말했었다.
“늦은 시간 송구합니다. 집무실의 불이 켜져 있어 무례를 알면서도 이리 찾아왔습니다.”
“이야기는 들어보도록 하지...”
“리사는 다른 민간인에게 함부로 검을 꺼낼 아이가 아닙니다.”
“....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네”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작은 걱정이 스쳤다.
“오해가 있던 듯한데... 리사의 오해를 풀 시간을 주신다면 제가 상처의 근원지를 찾겠습니다.”
“됐네.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것이니 그대도 걱정 말고 돌아가도록.”
“.... 묻어두시겠다는 것입니까.”
“흠? 그럴 생각이라고 내가 대답한다면?”
“송구합니다만...”
“?”
제이의 근사한 얼굴에 미미한 불쾌함이 담겼다.
“그럼 리사의 면전에 박힌 제국의 기사로서 가히 모욕적이었던 오해들은 어찌 묻어두실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에 씨가 있군.”
“하나뿐인 동생인지라 걱정이 많습니다. 그 아이에게 그런 수치가 생긴다면...”
말을 더 잇지 않은 제이의 표정을 바라보며 클로비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리사가 겪었을 그 상황에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하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기사인 동생이 일반 사람을 베어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상황이 오죽 화가 났을까.
클로비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무슨 마음인지 잘 알겠어. 그러니 그 부분에서는 괜찮다고 표현하고 싶군.”
“...?”
“나도 내 동생의 질 나쁜 장난을 그리 유순하게 넘길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
조금 만족스러운 듯 보이는 침묵 속에서 제이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부드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제 가족을 아끼는 면에서는 그이와 비슷한걸.’
클로비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회상을 끝냈고 이내 뒤를 돌아 나가려는 리사를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들고 있던 서류를 넘겼다.
똑똑
“누구냐.”
“황후마마, 지금 궁을 지키던 기사가....”
“흠?”
클로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같은 시각, 세린은 황궁의 정원에서 헤일리와 마주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헤일리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세린의 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드레스를 입으셔서 그런지... 아직 아기씨가 계신다는 것을 모르겠어요.”
“저도 모르겠는걸요. 제이는 아이가 세 쌍둥이라서 그런지 벌써 배가 나온 것 같다고 했던 거 있죠? 저는 잘 모르겠는데...”
“세 쌍둥이요??!!”
“어라? 내가 헤일리에게 말 안 했던가요?”
“전하!!”
헤일리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르며 다급히 세린의 팔을 잡았다.
부축을 하듯이 안정적으로 잡아오는 손길에 세린이 당황하며 그녀를 불렀다.
“헤, 헤일리?”
“전하! 뱃속에 아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조심해야 해요! 정말 사실적인 말씀으로는 걷는 것마저도 의원의 허락이 떨어져야 한다고 들었어요!”
“아하하! 헤일리, 걱정 말아요. 벤에게 미리 이야기를 듣고 왔어요. 가벼운 산책은 괜찮다고 했는걸요?”
“.... 정말요?”
“진짜요!”
헤일리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가 이내 부드럽게 세린의 팔에 팔짱을 끼며 입술을 삐죽였다.
“어디 안 좋으시면 말씀하셔야 해요?”
“아하하! 알겠어요.”
헤일리의 걱정이 귀여워 세린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던 그 때, 다정한 두 여인들의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
햇빛을 받은 주황색의 머리카락과 해를 닮은 노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져있었다.
클로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