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꿇어
황성의 입구에서는 두 사람이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불안한 발걸음이 멀리 있는 시종들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고 그 불안해 보이는 사람은 바로 에드윅과 트레일이었다.
“세린은 언제 도착하는 것이냐.”
“저라고 아나요? 방금 출발했다는데... 대공작의 마차는 느려도 너무 느리다고!”
출발한 것이 방금이라면 당연하게도 한참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임신을 했다는 대공마님을 위해서 마차의 속도는 자연스럽게 기어갈 테니까.
자신들이 너무 빨리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불안한 걸음걸이로 주변을 맴도는 두 남자들을 조금 지친 얼굴로 바라본 벤이었다.
황궁의 의원 벤은 임신을 했다는 대공마님의 귀환에 환영을 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건강과 태아의 건강을 파악하기 위해 함께 대기 중이었다.
자연스럽게 밥도 못 먹고 말이다.
‘나는 왜 이리 일찍부터 대기해야 하는 거지...?’
의미 없는 고민을 하며 벤의 표정이 트레일과 에드윅을 바라보며 점차 질려졌다.
지치지도 않는 팔불출의 모습이 오랜만이라 우습기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도 빠르게 적응해버렸다.
‘마님이 도착하시면 안아서 내려주시거나 안아서 옮겨주시겠지.’
그리고 그런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말이다.
황궁에 도착한 마차에 문이 열리자마자 허겁지겁 달려간 트레일은 세린을 아기마냥 부드럽게 안아 올렸다.
세린은 당황하고 제이와 리사, 이엔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트레일을 바라보았다.
“오, 오빠!”
“어디 아픈 곳은 없어? 멀미는? 배는 어때?”
“익... 멀쩡해요!! 내려줘요!”
“안 돼! 넘어지면 어쩌려고!!”
“나 애 아니에요!”
“너 애 맞거든?”
트레일의 품에서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당황한 세린의 모습이 참 오랜만이라서 벤은 나직이 웃었다.
그리고 에드윅은 애틋한 딸의 모습에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세린.”
세린의 표정이 단번에 환하게 변했다.
햇살만큼 따뜻한 미소로 웃으며 세린이 외쳤다.
“아빠!!”
그 짧은 단어와 밝은 미소가 에드윅의 가슴에 깊이 담겼다.
세린은 트레일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어찌하지 못하고 에드윅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에드윅은 그런 세린의 손을 마주잡아주며 부드럽게 그녀를 땅으로 이끌었다.
이 작고 여린 아이가 아이를 가졌다고.
벌써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고.
그것이 너무도 신기하였고 동시에 너무도 걱정되었다.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 과정은 참 어려운 문제와도 같았다.
답이 정해져있지 않은 문제지만 답이 없기에 더욱 어려웠다.
걱정으로 물든 에드윅의 눈동자를 본 세린이 난처하지만 즐거운 모습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빠도 제가 그렇게 걱정되세요?”
“....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겠구나.”
“그래서 벤까지 함께 오신 거군요.”
“흠....”
세린의 웃음기가 가득한 말에 에드윅이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세린은 키득키득 웃으며 벤에게 다가갔고 그 뒤를 제이가 서둘러 붙었다.
꼬리에 꼬리를 달듯이 세린의 뒤로 줄이 섰다.
제이, 리사, 이엔, 에드윅, 트레일이 세린만을 쫓아 걸어갔고 세린은 벤에게 제 손을 맡기며 검사를 받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제 뒤에 있는 가족들이 자신을 걱정하느라 숨이 넘어갈지도 몰랐다.
벤은 이 곳 저 곳 세린을 면밀히 살피며 그녀와 태아의 상태를 살폈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마님께서도 아기씨께서도 건강하십니다. 그러나 마님께서는 조금 더 식사량을 늘리실 필요가 있어 보이는 군요.”
“세린 너 밥 안 챙겨먹어??!!”
“오빠... 잠깐 조용히...”
“밥은 꼬박꼬박 챙겨먹으라고 했지!!”
“아니, 입덧 때문에 자꾸 속이...”
“벤!! 입덧에 좋은 음식이 뭐가 있어??!”
세린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응하는 트레일의 모습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 트레일은 원래 이렇게 득달같이 자신을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세린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황가 가족들의 이 집중적인 관심과 사랑이 오랜만이라서 난처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도 기뻤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에 거대한 빛이 흩뿌려지며 로레인이 나타났다.
화사한 분홍빛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나타난 로레인이 세린을 향해 너무도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세린!”
“레인 오빠...?!”
세린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에 놀라기도 전에 멀리서 시종이 외쳤다.
“황제 폐하, 황후 마마, 황자 전하, 헤일리 공녀님께서 오십니다.”
“네에에??!!”
아니, 테오오빠랑 클로비스언니랑 헤일리까지?
그보다 오빠랑 언니는 황제랑 황후라고!
바쁜 거 아니었어?!
세린의 눈이 당황을 담고 흔들렸다.
멀리서 클로비스가 그런 세린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와 그녀의 두 손을 마주잡았다.
“세린! 몸은 좀 어떤가요? 아픈 곳은 없나요? 오면서 마차가 강하게 흔들리지는 않았고요?”
“어, 언니! 전 괜찮아요.”
옆에서 테오가 그런 세린을 다급한 눈으로 살폈다.
“살이 빠진 것 같은데... 밥을 잘 못 먹는 거냐.”
“아니에요~~! 그냥 입덧이 생겨서 속이 자주 메슥...”
“벤. 산모의 입덧에 좋은 음식들을 체크해서 주방에 전달하도록. 오늘 점심부터 상에 올라왔으면 좋겠군.”
“예, 폐하.”
황성에 모인 황족들의 온 관심을 받으며 세린은 당황했다.
세린은 바쁠 것이 분명한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바쁜 시기에 온 것이었으나 일을 안 하고 올 줄은 몰랐었다.
일을 내팽개치고 왔으면서 당당한 이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다가 세린은 이내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렴 어떤가.
자신도 그들의 상황이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 분명하니까.
세린은 부드럽게 제 손을 잡아주는 제이의 손을 느끼며 가족들과 나란히 걸었다.
밝은 해가 뜬 이른 오후였다.
“우욱!”
“세린!”
세린의 헛구역질 한 번에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7명이었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트레일과 로레인은 몰론 에드윅과 테오의 표정도 나빠졌다.
헤일리와 클로비스도 안타까운 모습으로 세린을 바라보았다.
제이는 이미 입술을 꾹 다물고 물을 그녀에게 건네고 있었다.
세린은 그들의 걱정스런 시선이 조금 민망하면서도 속에서 올라오는 거부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우... 나 도저히... 밥은...”
“세린, 일단 물이라도 마셔요.”
“네에....”
세린은 제이가 잡아준 물을 마시며 메슥거리는 속을 다잡았다.
진정하는 세린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던 제이는 식탁에 있는 다양한 과일을 그녀의 접시에 날랐다.
무척이나 재빠른 속도로 신속하게 그릇에 올라온 과일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세린은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과일을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제이!”
“대신 주방장이 직접 만들어주신다던 영양식은 꼭 드시기를 약속해주세요.”
“네!”
능숙하게 세린을 달래는 제이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에드윅도 다른 황족들도 홀린 듯이 그들을 관찰했다.
약간 아기토끼를 어르고 달래는 엄마늑대 같은 느낌이었다.
가족들이 신기하게 바라보는 그 때, 시종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무슨 일이냐.”
“실례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서부제국 2황녀전하께서 연회의 손님으로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
테오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고 클로비스의 얼굴도 작게 일그러졌다.
세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클로비스를 바라보았다.
서부제국이라면 그녀의 고향이었고, 2황녀라면 그녀의 여동생일 테니까.
그녀의 여동생이라는 그 황녀가 무척이나 궁금해진 세린이었다.
그러나 테오는 태평한 어조로 시종에게 말했다.
“지금은 업무로 바빠 마중을 못할 것 같군. 알아서 기사를 불러 방으로 안내하도록.”
“알겠사옵니다. 폐하.”
시종이 말끔하게 물러났다.
테오는 바로 흥미를 세린에게로 돌리며 그녀에게 레몬케이크를 건넸다.
“조금 더 먹어 주거라. 아직 많이 먹지 못 했지 않느냐.”
“음? 아, 네!”
그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영문을 몰라 하던 세린의 표정이 밝아지며 자연스럽게 2황녀의 존재를 잊었다.
클로비스는 부드럽게 웃었으나 이내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
황성의 문.
클로라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휑한 정문의 상태에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서부제국의 황녀이자 동남북 제국 황후의 여동생인 자신을 마중하지 못할망정 무시를 한다고?
불쾌함에 치가 떨렸다.
그러던 그녀에게 시종이 다가갔다.
“송구합니다. 폐하께옵서 바쁜 업무로 인하여 마중을 못하신다고 일렀습니다. 곧 전하를 안내할 기사가 올 테니 부디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 황녀인 나에게 고작 일개 기사 따위를 하나 붙이겠다고?”
“송구합니다. 폐하의 명이였사옵니다.”
“우습구나! 이 제국은 나를 능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올라갈 무렵 그녀의 앞으로 누군가 나타났다.
“??”
강한 햇빛을 등진 한 인영에 클로라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햇빛을 받은 하얀 은발을 머리 위로 높이 틀어 올린 그 인영은 푸른 눈동자를 곧게 내려 클로라를 담고 있었다.
그 인영은 바로 리사 스페라도였다.
제국의 단 한 명밖에 없는 여성 마스터의 등장에 시종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리사의 푸른 눈에 담긴 제 모습을 당황하며 바라본 클로라는 살짝 뒤로 물러나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뭐야 이 멀대같은 여자는....!’
늘씬한 몸에 딱 맞는 그녀의 은색 기사제복에는 수많은 뱃지와 훈장들이 가득했고 날카롭지만 아름다운 이목구비에 담긴 무료한 감정이 클로라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리사는 그런 클로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오른 팔을 왼 가슴에 올리며 인사했다.
“제국의 제 2기사단 단장, 리사 스페라도입니다.”
“......!”
“황녀전하의 안내와 호위 명을 받고 도착했습니다. 가시지요.”
부드러운 몸짓으로 그녀를 안내하는 리사의 아름다운 자태에 클로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클로라는 제 자신보다 고귀하게 행동하는 리사에게 심술이 났다.
그래, 단순한 심술이었다.
그녀에 대한 질투와 황족들이게 느낀 모욕감에 심술이 났다.
그래서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 제국 사람들은 모두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감히 황녀를 기다리게 해놓고 사과도 없어?”
“....?”
리사의 푸른 눈이 클로라를 덤덤하게 담았다.
클로라의 얼굴에 가득 떠오른 비웃음에 리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종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과 동시에 클로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꿇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