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바구니와 산딸기
리사의 표정에 무료한 감정마저 사라졌다.
뒤에서 지켜보던 시종이 당황하며 다급히 다가섰으나 클로라는 멈추지 않았다.
“꿇으라고.”
“.....”
“무릎 꿇고 정중하게 사과한다면 이번은 넘어가주지.”
“....”
제복 옷깃에 가려진 리사의 목에 힘줄이 튀어 나올 듯 돋아났고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무섭도록 타올랐다.
저절로 한 쪽 입 꼬리가 올라간 리사는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살기를 꾹꾹 눌러 담고 말했다.
“송구하오나 저는 황제폐하의 명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입니다. 제가 늦었다는 것은 폐하께서 늦게 부르신 것이니 그 제의는 추후에 폐하께 아뢰어보시길 바랍니다.”
“뭐야...?”
“가시지요. 황성의 문 앞에서 더 지체하신다면 이 상황이 황제폐하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폐하의 업무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
클로라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기는 리사의 태도가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고 제가 원하는 상황으로 흘러가지 않아 불쾌함은 배가 되었다.
입안을 깨물어버린 클로라는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리며 리사의 등을 따라 걸어 나갔고, 시종은 나직이 한숨을 내뱉으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시종은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하고 또 안심했다.
리사가 평소처럼 말보다 몸이 먼저 나가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
리사는 부드러운 몸짓으로 손님방을 열었다.
“앞으로 황녀전하께서 4일 동안 머물게 되실 방입니다. 방에 머무르는 것에 있어서 불편한 부분, 필요한 부분은 전하를 모시게 될 시녀들에게 말씀하시면 되십니다.”
“......”
클로라는 화려한 방의 문 앞에서 팔짱을 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방에 대해 뭐 하나 트집이라도 잡고 싶었으나 방이 생각보다 더 아름답고 제 마음에 쏙 들어 불만이 생겼다.
리사는 그런 클로라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소신은 이제 물러나겠으니 편히 쉬시길.”
“뭐? 간다고?”
“....?”
내가 가는데 뭐 불만이라도 있어?
라는 표정으로 리사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클로라는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며 분노를 내리 눌렀고 이내 이를 악 물며 말했다.
“기사로 배정되었으면 내 방문을 지켜야지...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장난해?”
“.....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뭐?”
“저는 전하께서 방까지 안전하게 이동을 하실 수 있도록 온 기사일 뿐이지 황녀전하께 배치된 호위기사가 아닙니다.”
“!!!!!”
“폐하께서 저희 제국의 시녀 1명은 배정해드린다고 했습니다. 그 이외에는 아무 말씀이 없으신 것을 보면 배정된 기사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일단 제가 맡은 명을 완수했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리사는 태평하게 뒤를 돌았고 밝게 빛나는 은발을 찰랑이며 빠르게 사라졌다.
으드득!
클로라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녀의 가슴에 수치심과 모욕감이 휘몰아쳤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왔다.
그녀는 주먹을 말아 쥐며 이내 큰 소음과 함께 굳게 문을 닫았다.
쾅!!
기사도 배치를 안 시켜주고, 심지어 시녀도 한 명밖에 배정되지 않았다고?
서부에서 온 자신의 개인시녀만이 넓은 방에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을 보자 클로라의 분노가 다시 쌓였다.
‘클로비스 네가 입을 떠벌리고 다녔구나...!’
부들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시녀가 이내 약간 파리해진 얼굴로 말했다.
“전하... 송구하오나....”
“뭐야!!”
“.... ㄱ, , 그것이...”
시녀의 안색이 바로 창백하게 질렸다.
그러나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천천히 다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말씀주신 무,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
클로라의 얼굴이 단번에 환하게 변했다.
“이리 내!”
시녀의 손에 들린 작은 유리병을 낚아채듯이 가져간 클로라는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효과는?”
“시, 식도부터 위를 타고 장기를 모두 녹게 할 정도의.... 효과라고 합니다.”
“좋아. 잘했어.”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가 클로라의 입가에 지어졌다.
그녀의 노란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고 나직이 시녀를 향해 말했다.
“산책이나 가자꾸나. 마차에서만 며칠을 보냈더니 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아.”
“.... 네.”
다시 기분이 좋아진 클로라는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동남북 제국의 시녀에 눈을 찌푸렸다.
누가 보아도 저를 감시하기 위해 붙인 것이 분명한 그 시녀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한참 시녀를 바라보던 클로라는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황성의 정원으로 안내했으면 좋겠어.”
“제국의 고귀한 손님만이 방문하실 수 있는 정원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렴.”
시녀는 부드러운 모습으로 클로라를 안내했다.
서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정원이 천천히 그녀의 시선에 담겨졌다.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꽃들이 눈이 부셨고 향기로운 꽃의 향기에 클로라의 기분이 즐거워졌다.
이 아름다운 정원도 고풍스러운 황성도 모두 갖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것을 위해서는 2황자와 3황자의 눈에 띌 필요가 있었고 말이다.
부스럭!
클로라의 짧은 고민이 마무리될 무렵 그녀의 옆에서 들리는 작은 소음에 그녀의 눈동자가 스르륵 돌아갔다.
그리곤 곧바로 마주친 푸른 하늘을 닮은 눈동자에 클로라는 숨을 멈췄다.
하얀 와이셔츠 밖으로도 느껴지는 단단한 신체와 길게 뻗은 다리.
그리고 햇빛을 받은 아름다운 은색의 머리카락.
선명하고 화려한 이목구비 속의 푸른 눈동자가 클로라의 가슴을 쿵 하니 떨어트렸다.
가히 천사를 이렇게 생겼다고 하지 않을까?
사람이 이리 아름다워도 되는 것인가?
클로라의 눈이 정처 없이 떨리다가 스르륵 시선을 내렸고, 시선을 내리자 무언가 특이한 것이 눈에 보였다.
남자다운 손에 들려있는 앙증맞은 바구니와 바구니 속에 가득한 산딸기였다.
‘산딸기...? 바구니...?’
약간 균형이 맞지 않은 모습이기는 하지만 또 어울리기도 한 모습이었다.
그런 클로라의 앞에 마주 서게 된 아름다운 사내는 바구니를 든 채 클로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길을 막아 죄송합니다. 빠른 길로 돌아오다 보니...”
“아, 아니요.... 괜찮아요.”
목소리까지 근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클로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여졌다.
사내는 그런 그녀를 무료하게 바라보다가 “그럼, 저는 이만.”라고 말하며 서둘러 그녀를 지나쳐 사라졌다.
“아, 저, 저기!!”
다급히 붙잡아도 이미 사내는 사라진 후였다.
클로라는 사라진 그의 방향을 바라보며 두 눈에 황홀한 감정을 담아내었고 얕은 탄식을 내뱉었다.
“하... 누구지... 저 사람은?”
당연하게도 그 사람은 제이 스페라도였다.
*
제이는 몇 분 전까지 침소에서 세린의 다리를 주물러주고 있었었다.
간지러운 느낌과 동시에 시원한 감각에 세린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시원해요 제이.”
“다행이군요. 시원한 김에 낮잠이라도 자는 것은 어떤가요.”
“제이는 날 재우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날 재워서 뭐 하려고요?”
“흠?”
세린의 장난기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며 제이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눈에는 세린보다 더 한 장난기가 숨어 있었다.
“알게 되신다면 많이 놀라실 텐데...”
“에...?”
“알고 싶으십니까?”
제이가 천천히 상체를 기울여 세린에게 다가갔다.
코앞에서 마주친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세린의 얼굴에 당황과 수줍음이 담겼다.
“아, 아니... 그러니까...”
“궁금하시다면 말씀드려도 상관은 없습니다.”
“히익!! 아니요! 안 궁금해요!”
“큽....”
세린의 당황이 귀여워 제이는 결국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웃음을 참았다.
“제이... 또 날 놀린 거예요?”
“진실이었던 것을요. 세린이 알게 된다면 위험합니다. 여러모로...”
“.....”
세린은 약간 질린 눈으로 침묵을 하다가 이내 ‘푸핫!’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그와 장난을 치는 이 상황이 다시 되짚어보니 우스운 탓이었다.
세린은 한참 키득거리며 웃다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으아... 산딸기 먹고 싶다.”
“......”
엉뚱한 그 소리에서 느껴진 진심에 제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고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읭? 어, 제이??”
“산딸기라면 생육환경이 햇볕이 잘 들어오는 양지에서 자라는 식물이니 황성의 주변에 있는 숲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제, 제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필요합니다. 세린은 잠시 누워 있으세요.”
세린의 만류에도 제이는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시녀에게 받은 작고 귀여운 바구니를 들고 빠르게 황성 밖의 숲으로 달려들며 말이다.
세린은 난처한 이 상황에 가만히 문을 바라보았고 이내 다짐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버릇을 고치기로 말이다.
생각이상으로 제이는 빠르게 세린의 곁으로 돌아왔다.
방금 씻었는지 물기가 남은 산딸기들을 바구니에 가득 들고 온 채로 말이다.
“와아...! 숲에 산딸기가 많았나 봐요!”
“햇볕이 드는 양지만 찾다보니 금방 발견했습니다. 씻어서 가지고 온 것이니 맛이 어떤지 보세요.”
“고마워요 제이!”
세린은 그가 제 입에 쏙 넣어준 산딸기를 꼭꼭 씹어 먹으며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그가 가져다준 산딸기는 달콤했고 그가 제게 주는 사랑도 달콤했다.
제이는 행복해하는 세린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맛있습니까?”
“엄청 맛있어요!”
“다행입니다.”
“제이도 아 해봐요!”
세린의 사랑스런 권유에 제이는 입을 벌렸고 세린은 그의 입에 산딸기를 넣어주었다.
톡 씹히며 흐르는 달콤한 산딸기의 과즙이 입 안에서 퍼졌다.
“어때요?”
“맛있습니다.”
“그쵸? 제이가 가져온 딸기라 더 맛있나 봐요!”
“세린이 먹여줘서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은 것을요.”
“꺅!! 또 그런 말!!”
제이의 철판을 깐 진담 같은 농담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세린이었다.
그렇게 두 부부의 달콤한 하루가 끝나고 연회의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