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97화 (97/218)

97화. 행복한 기다림

그날 밤, 세린은 침대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방금 전 저녁시간에 테오에게서 제이와 리사의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남부제국의 반란군을 알아내어 정리하고 제국이 자리 잡을 때까지 관리를 해야 한다고 했었으나 진짜 문제는 남부에서 제국을 정리하는 기간이었다.

‘몇 개월도 아니라 몇 년이 걸린다고....?’

그럼 그동안 제이도 리사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세린은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코끝이 시려왔다.

제이도 갑작스럽게 소식을 접하고 급히 준비하는 일이었다며 자신을 달래는 로레인의 말에도 세린은 속이 상했다.

제이가 가는 것도 슬펐으나 리사까지 간다는 말에 더욱 슬퍼졌다.

세린이 눈물을 또륵 흘리며 슬픔에 잠식되어갈 무렵 하나의 소음이 그녀의 귀를 자극했다.

똑똑

“!!!!!”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급히 고개를 돌린 세린은 커다란 달 밑 테라스에서 자신을 다정히 바라보는 제이를 발견했다.

“제이...!!”

서둘러 창문을 열어주려 일어났으나 열려있던 것인지 제이는 자연스럽게 창문을 열고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의 수려한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세린은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폭 안기는 작은 몸을 꽉 안아주며 제이는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전하....”

“......”

마치 5년 전... 아니 이제는 6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처럼 모두와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사랑하는 이가 없을 몇 년이 얼마나 고달프고 쓸쓸할지, 신뢰하는 친구이자 의지하는 기사인 그녀가 없을 몇 년이 얼마나 외로울지 세린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제이는 소리 없이 슬퍼하는 세린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며 괴롭게 일그러진 눈을 감았다.

“정말 가는 건가요...?”

“.... 네.”

“얼마나 걸려요? 정말 몇 년을 가 있어야 하나요..?”

“죄송합니다... 못해도 3년은 족히 걸릴 듯합니다.”

제이의 수긍에 세린이 입술을 꾹 깨물고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었다.

세린은 제이의 따스한 온기에 진정하지도 못하고 더 슬퍼져서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참았다.

제이는 다급히 세린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 고개를 올렸다.

세린은 푸른 눈동자 속에서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다.

“전하, 절 보세요.”

“......”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

“제가 돌아오면 그때는 헤어지고 싶어도 더는 헤어질 수도 저와 떨어질 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자신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는 큰 손을 붙잡으며 세린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이는 너무도 슬퍼하는 세린의 모습이 예뻐 보이면서도 가슴이 아프기도 해서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약속... 잊지 마시고요.”

세린은 잔잔하게 물결치는 가슴 속의 슬픔을 애써 무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어떻게 그 약속을 잊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 없이 그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랄뿐이었다.

‘부디 다치지 말기를....’

서둘러서 자신을 찾아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세린이 까치발을 들고 제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제이는 아름다운 눈매를 감으며 세린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녀의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몇 년을 보지 못할 그녀를 잊지 않기 위해서, 그녀의 온기도 그녀의 숨도 모두 생생하게 그의 가슴에 깊이 담아갔다.

짙어지는 키스에 세린은 숨이 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이는 그저 세린의 입술을 탐하고 맛보고 음미하며 그녀를 기억해나갔다.

마침내 깊은 입맞춤이 끝나자 세린이 “푸하!” 하며 참았던 숨을 내뱉었고 그런 그녀의 잔뜩 붉어진 볼을 아쉽게 바라본 제이는 세린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때에는 도중에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

세린의 볼이 확 붉어졌고 부끄러움에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제이는 그런 세린을 제 품에 가두며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두고 떠나려니 도저히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세린은 그런 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았다.

“전하...?”

“마지막이니까.... 한 번만 더 해주면 안 되나요...?”

“!!!”

“네...?”

세린의 순진무구한 연두색 눈동자가 제이의 인내심을 자극했다.

제이는 입술을 꾹 깨물고 묵묵히 그런 세린을 보며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세린의 한마디에 그는 무너졌다.

“멈추지 않아도 괜찮아요...”

“전하.”

“사랑해요...”

눈물이 차올랐었던 큰 눈망울이 애처롭게 흔들리자 제이는 백기를 들었다.

제이는 거칠게 세린의 입술을 삼켰다.

세린은 숨이 막히도록 깊은 입맞춤에 따라가느라 어느 새 자신이 침대에 눕혀졌는지 알 수 없었다.

제이는 입술을 떼고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마지막이고 진짜야. 지금 말하지 않으면 이제 못 멈춰.”

세린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제이의 시선이 너무도 뜨거워서 제 얼굴이 타들어갈 것 같았다.

그러나 세린은 올곧은 눈동자로 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상관없어요...”

제이는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후....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제이...”

세린의 눈이 애처롭게 흔들렸고 제이는 그 눈빛에 숨을 멈췄다.

“......”

“다치지 말고... 밥도 잘 먹고 얼른 돌아와요...”

제이는 슬퍼져가는 세린의 눈동자에 입을 맞췄다.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제이는 그런 세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

“늘 지켜줬잖아요.”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아프지 않아요.”

“..... 후회는 언제 해도 늦어...”

세린의 눈이 곱게 휘어지며 맑게 웃었다.

“사랑하는데 왜 후회를 하겠어요...”

제이는 세린의 한마디에 무너졌다.

다시 마주 닿은 두 사람의 그림자는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고 밝게 떠있는 달은 점차 먼 산의 뒤로 넘어갔다.

다음 날, 아침이 밝고 제이는 리사와 제 2기사단들과 함께 남부로 떠났다.

떠나는 마차 안으로 제이의 피부가 매끈했다.

리사의 눈이 가늘어지며 제이를 향해 물었다.

“오라버니. 왜 기분이 좋아 보여요?”

“..... 황녀전하와 인사를 나누고 왔었거든.”

“..... 인사를 어떻게 했기에 오라버니가 표정관리를 못하시나요?”

“넌 남부에서 어떻게 반란군을 잡을지나 생각 하거라.”

“그냥 저택이고 기사들이고 다 때려 부수면 알아서 자백하지 않을까요...?”

“.......”

“왜요?”

“폐하께서 왜 너와 나를 붙였는지 알 것 같구나.”

“뭔데요???”

리사의 의문이 피어오른 눈동자를 무시한 제이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기다려줄 그녀를 위해 자신이 노력해야 할 때였다.

같은 시각, 세린은 메리부인과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세린의 아름다운 얼굴에 피어난 행복이 가득한 미소에 메리부인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전하, 표정이 좋아 보여요...”

“아... 그래보이나요??”

“네, 공자가 전하께 무슨 말을 해주셨기에 그리 행복하신지 궁금해지네요.”

“아하하! 비밀이에요!”

메리부인과 세린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정원에 퍼졌다.

세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이제 남부로 출발했을 제이를 생각했다.

너무도 사랑하니까 신뢰했고 신뢰하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다.

그와의 약속, 지난밤의 다정한 말과 대화를 기억하며 세린의 볼이 붉어져갔다.

결국 어제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이는 세린을 침대에 눕히자마자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세린이 잠들 때까지 곁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듣기 좋은 음성으로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여 주며 부드럽게 세린의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애정이 가득한 손길과 목소리를 들으며 세린은 천천히 잠이 들었고 제이는 오래도록 그런 세린을 바라보다가 귀여운 입술에 작게 입을 맞추고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

세린은 자신을 아껴주려 노력하는 제이의 마음을 알기에 행복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를 믿고 그가 다시 올 날을 기다릴 때였다.

모든 것들이 처음인 연인들은 가슴 아픈 이별 속에서 행복을 느꼈다.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괴롭지 않을 것 같았다.

헤일리는 트레일 없이 정원을 거닐며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정원을 가득 채울 정도로 피어난 안개꽃들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헤일리는 천천히 그 꽃을 쓸어보다가 정처 없는 발걸음을 옮겨 처음 보게 된 견고한 탑을 발견했다.

‘내가 언제 여기까지...’

생각 없이 걸어가다 보니 늘 걷던 방향과는 정반대로 걸어온 듯 했다.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 헤일리는 탑의 입구를 지키는 제국의 기사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아직도 숨이 안 끊어진 것을 보면 독해.”

“안 끊어진 것이 아니라 폐하와 다른 전하 분들께서 안 끊어지도록 조절한 부분이야.”

“이래서 사람은... 깨끗하게 살아야 해.”

“남부도 미쳤지. 저런 새끼를 황태자로 들이고 말이야...”

“!!!!!!”

헤일리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너무도 놀란 가슴이 강하게 요동쳤고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살아있다고...? 아직도 살아있다고???’

아직도 그녀의 가슴을 갉아먹는 지옥에 숨이 붙어있었다.

작은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쥔 헤일리는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발걸음을 뒤로 옮겼다.

‘도망가야... 도망가야 해!’

강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정신없이 살펴보던 헤일리는 재빠르게 궁으로 달려갔다.

‘도망가야 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헤일리는 앞만을 바라보며 달리고 또 달렸다.

창백해진 피부와 잔뜩 떨리는 다리를 애써 무시하며 달린 헤일리를 누군가 붙잡지 않았다면 멈추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턱!

“꺅!”

부드럽지만 강하게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놀란 헤일리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헤일리가 잔뜩 떨리는 손을 마주 움켜잡고 고개를 천천히 들자 보이는 인물은 긴 분홍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서 있는 꽃같이 아름다운 사람... 로레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