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고문방법
로레인은 그런 헤일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놓고 물었다.
“영애.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자신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제비꽃색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헤일리는 천천히 가슴을 진정시켰다.
정처없이 떨리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이곳이 로레인의 성 정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트레일과 둘러보며 산책했던 기억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길이 헷갈려 그만 실수를....”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만...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십니까.”
“..!!!!”
헤일리의 뒤를 살펴보며 주변을 확인한 로레인이 의문이 섞인 얼굴로 그녀를 내려 보았다.
헤일리는 떨리는 팔을 한 손으로 꾹 눌러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로레인은 그런 헤일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여인을 저리 사지로 몰아넣은 것처럼 두렵게 만들 인물은 이 성에서 누구일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브론이었다.
로레인은 묵묵히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고 망설임 없이 물었다.
“영애, 혹시 탑을 보셨나요.”
“....!!!!”
‘역시...’ 예상에 맞는 상황에 로레인이 미간을 약간 좁혔다.
어쩌다 그런 곳으로 가게 된 것인지...
공포로 인해서 안쓰럽게 떨고 있는 헤일리의 모습에 결국 한숨을 내쉰 로레인은 나직이 말했다.
“영애, 절 보세요.”
“.....”
헤일리의 남색 눈동자가 로레인의 제비꽃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로레인은 그런 헤일리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자는 절대 탑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
“대마법사가 세운 탑을 무시해서는 곤란합니다.”
“하지만...”
헤일리의 떨리는 입술에서 나오는 두려움에 로레인은 생각했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 한 헤일리의 두려움은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로레인은 제 턱을 쓸다가 이내 물었다.
“직접 보셔야 안심이 된다면 함께 가보겠습니까.”
“...!!”
“대신 트레일에게 허락을 받으시지요. 녀석이 영애를 그런 곳으로 데려갔다고 형을 원망하기라도 한다면 제가 곤란하니까요.”
헤일리는 로레인의 제안에 천천히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로레인은 그런 헤일리를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 헤일리와 함께 저리에서 워프를 외쳤다.
헤일리는 배경이 휘리릭 바뀌자마자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트레일의 뒷모습에 놀라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트레일은 연무장에서 기사들의 훈련을 지도하고 있었다.
“다리에 힘을 실어!! 하체에 힘이 부족해 자세가 자꾸 흐트러지는 것이다!”
“네!”
“거기는 집중하지 않고 뭐하나!! 하단 베기 100회 추가다!”
그 듬직하고 넓은 등과 여전히 구불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보며 헤일리는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
이 일을 그가 허락해줄까?
어떻게 어디서부터 물어봐야 하는 것일까?
지금 다가가서 물어보아도 괜찮은 것일까?
헤일리가 생각에 잠기며 망설이는 것과 동시에 트레일이 고개를 돌렸다.
붉은 루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온건히 헤일리를 담았고 헤일리를 바라보자마자 저절로 곱게 휘어진 개구진 얼굴로 트레일이 로레인과 그녀에게 다가왔다.
“형님, 헤일리.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에요?”
“너에게 허락받을 것이 있거든.”
“저한테요? 뭔데요?”
로레인의 말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뜬 트레일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로레인은 힐끔 헤일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죄인의 탑으로 그 인간을 눈으로 확인해도 되는 것이냐.”
“...!!!!!”
트레일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갑작스럽게 날카로워진 기세를 뿌리며 트레일이 로레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헤일리가 어떻게 그 자가 그 곳에 있다는 것을 안거죠? 설마 세린도 알고 있는 건가요?”
“세린은 모른다. 헤일리는 산책을 하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하더구나.”
“........”
트레일의 기세에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한 로레인은 진정하라는 의미로 트레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온기가 담긴 손길에 천천히 기세를 내린 트레일은 헤일리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헤일리는 트레일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내렸다.
너무도 무섭고 두려웠다.
혹시 자신이 오라버니를 구하려 한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의심하는 눈을 하고 있다면 어떡하지?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저 그가 살아 있는 게 무섭다고 한다면 믿어줄까?
뒤죽박죽 뒤엉킨 고민 속에서 답을 찾지 못한 헤일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트레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색의 눈동자를 더욱 크게 떴다.
트레일의 붉은 눈에 담긴 감정과 표정에 들어난 마음은 죄책감과 미안함이었다.
“.... 전하...?”
“헤일리.”
“.... 네.”
“미안해요. 숨기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
트레일의 사과에 헤일리가 숨을 멈췄다.
트레일은 그런 헤일리의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설명했다.
“그 새끼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 헤일리가 힘들어질 것 같았어요, 세린도 당신도 무서워할 것 같아서 그래서 알리지 않았어요.”
“... 그럼 왜 아직까지 그가 살아있는 건가요...?”
“..... 쉽게 죽이고 싶지 않았어요.”
“....”
트레일의 눈이 날카로운 살기를 담았으나 저를 향한 기운이 아니었다.
헤일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트레일의 이야기를 들었다.
“세린을 납치하고 감금한 것도 화가 나서 죽겠는데 세린을 죽이려고까지 했어요. 그 아이에게 그런 끔찍한 기억을 만든 대가가 고작 죽음일리가 없지요. 절대.”
“......”
“수백 번을 고문하고 치료하고 고문하고 살리기를 반복했어요. 당신에게는 잔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 번에 죽이기에는 지은 죄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커요.”
그의 말처럼 브론의 죄는 무게가 무거웠다.
그의 말 한마디와 돈 몇 푼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니 가벼울 일은 없었다.
트레일은 수긍하는 헤일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죄인의 탑에 가게 된다면 잔인한 모습도 볼 것이고 지독한 악취도 날 겁니다. 헤일리, 가서 확인하고 싶은가요?”
헤일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 네.”
트레일은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헤일리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말리지 않아요. 다만 이거 하나만 알아둬요.”
“.....?”
“이제 그 녀석은 당신의 친 오빠가 아니에요.”
“.......”
“헤일리는 이제 우리 제국의 가족이니까... 그 녀석을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네...”
헤일리의 얼굴에 작은 안도가 떠올랐다.
그의 신뢰와 다정함에 힘을 얻은 헤일리는 로레인의 도움을 받아 죄인의 탑으로 이동했다.
트레일은 사라지는 헤일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부디 그녀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를 바라며...
더 이상 그로 인해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로레인과 워프하여 탑으로 돌아온 헤일리는 긴장으로 인해서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로레인은 그런 헤일리를 힐끔 바라보며 그녀를 불렀다.
“영애.”
“... 네?”
“죄인은 강한 마법사라고 했던가요?”
“..... 네.”
“그럼 무서울 이유가 없군요.”
“....?”
로레인의 얼굴에 꽃처럼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아름다운 외모에 떠오른 더욱 아름다운 미소는 눈이 부셔 시각이 이대로 멀어버릴 것 같았다.
“제가 더 강하니까요.”
“....!”
로레인은 그 말을 끝으로 헤일리를 에스코트하며 탑으로 들어갔다.
로레인의 팔에 손을 얹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던 헤일리는 점점 풍겨오는 지독한 악취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피 비린내와 살이 썩는 냄새였다.
또각 또각
탑에 울리는 구두소리가 너무도 선명해서 이 죄인의 탑이 얼마나 깊은 공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한참을 내려간 헤일리는 로레인이 열어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 발을 옮기자마자 헤일리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처음 눈에 보인 것은 마치 새장과 유사한 모습의 감옥이었다.
넓은 탑의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굵기의 철 기둥은 수많은 마법의 인장이 그려져 있었고 그 기둥 안에는 한 사람이 견고한 의자에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그 사람의 두 손과 두 발은 족쇄와 함께 쇠사슬로 칭칭 감겨있었고 온 몸에는 베어내거나 도려진 듯한 또는 구타를 당한 듯 한 상처가 가득했다.
피 비랜내의 원인은 의자에 묶인... 과거 남부제국의 황태자였던 브론의 것이었다.
그는 기절한 것인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발밑은 이미 피로 흥건해서 헤일리는 서둘러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로레인은 그런 헤일리를 향해 말했다.
“트레일이 설명했지만...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고문을 하고 치료해주고 고문을 하고 치료해주기를 반복하며 벌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
“잔인합니까?”
“......”
“잔인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군요. 우리들의 화는 이 정도로 그칠 만큼 단순한 크기가 아니거든요 영애.”
로레인의 묵묵한 말에 헤일리는 두 손으로 입가를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말처럼 황족들은 브론을 곱게 죽일 생각이 지금도 없었다.
질리도록 지겹도록 고문을 하고 또 하다가 죽일 생각이었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감금한 것도, 그녀의 두 손을 죄인들이 착용하는 족쇄로 묶어버린 것도, 그녀를 죽이려고 마법을 난사한 것까지도 모두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마탑으로 인해서 피해를 받은 제국민들과 죽어버린 어머니까지 아직도 가슴 속에 깊이 남아 있었다.
로레인은 그 생각을 다시 하다가 이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다시 생각할수록 다시 되짚어 볼수록 분노가 차올랐다.
헤일리는 천천히 눈을 떠 브론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눈을 멀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살을 막기 위해서 혀를 잘랐습니다. 족쇄를 풀지 못하도록 팔에 힘줄도 잘랐으며 걸어 나가지 못하게 발도 부러트렸습니다. 여기서 더 설명해드려야 저 녀석이 여기서 절대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하시겠습니까.”
“.... 아니요.. 이제 그만 해주세요...”
헤일리는 고개를 저으며 브론을 바라보았다.
더는 로레인의 잔인한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헤일리는 천천히 브론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