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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96화 (96/218)

96화. 다시 설명해

스페라도 대공저에 구혼서가 도착한 다음 날, 대공자는 제국의 황녀전하와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영애들의 구혼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제국에는 그러한 두 사람의 교제사실에 경악하며 파도가 밀려오듯 그들의 이야기가 퍼지고 퍼졌다.

대공작은 난리가 났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수도의 분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제이를 향해 물었다.

“대공작이 되는 날 황녀전하와 혼인을 한다고?”

“그러고 싶습니다.”

“네가 언제 대공작이 될 줄 알고...?”

“그것은 아버지의 자유십니다. 뜻대로 하세요.”

어쭈...

황녀전하께서 청혼을 수락한 것이 여간 좋은 정도가 아닌 듯 했다.

입이 귀에 걸린 제이를 질린 눈으로 바라본 대공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책상 위에 있는 문서 한 장을 들었다.

그리고 제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럼 이걸 해결하고 온다면 이 자리를 물려주마. 나도 쉴 때가 되었지.”

“....?”

문서를 받아드는 제이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일이기에 저 사람이 저런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벌써 걱정이 되었다.

천천히 시선을 내려 글을 읽기 시작한 제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조금 날카로워진 눈으로 대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확실한 정보인가요?”

“내가 언제 불확실한 이야기를 했더냐.”

“.... 후.”

“남부제국의 독립을 위해 반란을 준비하는 귀족들이 있을 것이다. 남부귀족들을 모두 조사하고 남부의 국민들과 귀족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관리하는 일이 어렵더냐.”

“장난하십니까.”

제이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반란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무력진압만큼 좋은 것은 없었고 그런 무력진압에는 제이와 리사가 딱 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테오와 에드윅, 아인대공은 긴 상의 끝에 두 사람이 남부의 일을 해결하도록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냈고 두 사람에게 의사를 물어보려던 계획이었다.

리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의사를 전했었고 말이다.

남부의 대지는 넓고 동북제국만큼 귀족들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그런 이들을 조사하고 반란군을 잡고 제국을 정리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모두 해결될 예상시간은...?’

잘하던 못하던 3년은 넘길지도 몰랐다.

계산하고 예측하고 빠르게 잡아도 그 정도 걸릴 것 같자 제이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어쩐지 저 인간이 순순히 자리를 넘겨준다더니...

제이는 이를 악물고 나직이 말했다.

“리사는 수락했나요...”

“그래.”

“후.....”

리사에게 약한 제이를 알기에 리사를 먼저 설득시켰던 대공이었다.

예상외로 빠르게 수긍한 그녀가 의외였지만 어찌 되었든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의 유도에 맞게 제이는 쉽게 거절의 한마디를 내뱉지 않았다.

“난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아들아.”

“..... 알겠습니다. 갔다 오겠습니다.”

“너라면 빨리 돌아올 수 있을 것 같구나. 준비는 어떻게 하겠느냐.”

“알아서 준비하고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제이는 대공작의 집무실을 나왔다.

제이의 눈동자가 오기와 함께 분노로 불타올랐고 이 억울함과 분노는 남부에 오자마자 크게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빠르게 제이가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사는 아무렇지 않게 짐을 싸고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이는 그런 리사의 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떼고 물었다.

“너는 왜 수락을 한 건지 도저히 모르겠구나.”

“제가 가는 것이 그리 이상한 건가요?”

“이상하다기 보다는... 몇 년이 걸릴 줄 알고서 선뜻 수락한 것인지... 걱정이 되어서 그래.”

“알고 있어요.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제가 따라 가는 것이 오라버니가 더 빨리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잖아요.”

“....?”

리사의 말에 제이의 눈이 커졌다.

리사는 푸른 눈을 돌려 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빨리 돌아와야 황녀전하도 기쁠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오라버니가 남부에서 어떤 사고를 칠 줄 알고 혼자 보내나요? 내가 전하를 대신해서 감시할 거니까 각오하시라고요.”

“..... 리사.”

“다 필요 없고 거기서 우리 전하 눈에 눈물이라도 흘리게 할 일을 한다면 죽여 버릴 거야! 제이 스페라도.”

리사의 푸른 눈이 불타오르며 제이를 올곧게 바라보자 제이는 침묵했다.

그러다 결국 작은 한숨처럼 웃음을 내뱉은 제이는 리사를 향해 말했다.

“명심하마...”

“당연히 명심하셔야죠! 제 2기사단들도 함께 출발하라는 명이 있었어요! 오라버니도 어서 준비하세요. 하루라도 빨리 출발해야 하루라도 빨리 전하께 돌아오지요.”

“.... 그래.”

제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리사의 방을 나왔다.

리사는 사라지는 제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한숨을 쉬었다.

“후아... 들키는 줄 알았네...! 야 이제 나와!”

스르르륵

리사의 부름과 동시에 침대의 그림자에서 이엔이 천천히 빠져나왔다.

건장한 체격에 딱 맞은 검은색 제복을 입은 이엔은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리사를 향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랑 제이 녀석한테 네가 날 보러 온 걸 들키면 몇 년 치의 놀림감이 되는 줄 알아??... 말도 없이 갑자기 대공저에는 왜 온 거야?”

“.... 남부로 가신다는 말씀을 듣고... 저도 모르게....”

“뭐어??”

그렇다.

황성에서 제 2기사단들이 남부의 반란군 진압문제와 제국정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떠나야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도 놀라고 걱정이 되어 달려온 이엔이었다.

이엔은 예전 제국의 반란군으로 인해서 다쳤던 황후와 세린의 사건을 알고 있어서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그 곳으로 몇 개월도 아닌 몇 년을 떠나게 될 리사가 너무도 걱정이 되었다.

그 긴 시간동안 만나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 속도 쓰렸다.

그래서 소식을 접하자마자 다급히 대공저로 향한 이엔은 대공저의 입구에서 서성이다가 리사와 마주쳤다.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저기... 잠시 물어볼 것이...”

“나한테?? 야이씨! 너 여기 온 거 안 들켰지?”

“... 네? 아 네...”

“따라와!!!”

그리곤 서둘러 이엔을 데리고 대공저에 잠입하듯이 그를 숨기고 제 방안으로 들였다.

그러다 막 왜 왔는지 물어보려는 찰나에 다가오는 제이의 발소리에 서둘러 이엔을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은 리사였고, 그 후 지금 이 상황이었다.

(현재)

“내가 남부로 가는데 왜 걱정을 해??”

“그게...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이 위험하다고 들어서.. 그리고 몇 년이 걸릴지 모르니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고... 인사라도...”

얼굴이 빨갛게 익어가며 쩔쩔매는 이엔의 표정이 참 귀여워도 보이고 재밌기도 했다.

리사는 가만히 그런 이엔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야, 그럼 내 얼굴 보러 온 거야?”

“...!!!”

그녀의 그 한마디에 이엔의 얼굴이 완전히 붉게 변했다.

금빛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입술을 달싹이던 이엔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네...”

“......”

‘이상하다...? 이엔은 분명히...’ 저절로 가늘어진 눈을 하며 천천히 제 턱을 쓸어본 리사는 날카롭게 이엔을 바라보며 물었다.

“야.”

“.... 네?”

“너 나 좋아해?”

“끄앙!!!!!!”

“사내자식이... 비명은 삼키고 말해!!!”

수려한 얼굴에 당황을 가득 담고 이엔이 입을 꾹 다물자 리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허리에 올렸다.

“대답 안 해? 나 좋아하냐고! 황녀전하가 좋다며?”

“..... 그게....”

“야이씨X!! 똑바로 말 안 할래??!!”

답답한 진행을 극도로 싫어하는 리사가 버럭 소리치자 이엔이 허겁지겁 자세를 곧게 세우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뭐야??!!”

“그, 그게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리사님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고 몇 년을 못 뵈는 것이 슬픈 것도 사실입니다...!”

“.......”

리사의 침묵에 이엔은 다시 눈을 질끈 감고 외치듯이 말했다.

“황녀전하를 진심으로 좋아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번에 리사님이 해주신 말씀들이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줄곧 감사함을 느꼈고... 그리고..”

“......”

“그리고...”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는 이엔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사는 두 손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계속해봐.”

“.... 그 후부터... 계속 리사님이 생각이 납니다. 해주신 말씀들도 머릿속에 맴돌고, 걱정도 되고... 뵙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고... 아니, 그...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흠....”

“웃기는 녀석이라고 말씀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뭐야?”

미간을 좁혀가며 자신을 째려보는 리사의 푸른 눈에 이엔은 뒷짐을 지며 눈을 슬금슬금 피했다.

리사는 한 손으로 제 턱을 쓸어보며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불확실하다는 건지 확실하다는 건지 뭐라는 건지.

리사의 눈에 보이는 이엔은 금빛 눈동자가 담긴 날카로워 보이는 아름다운 눈매와 수려한 이목구비를 가졌으나 본래 성격은 그 외면과 정반대였다.

차가워 보이는 외면에 비해 내면은 솜사탕처럼 몽글한 녀석이었다.

그런 여린 녀석이 거짓말을 내뱉을 일은 없고 본인도 정말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인지한 리사였다.

“하나도 안 웃겨. 그러니까 잘 알아와.”

“... 네?”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네 감정이나 생각 잘 알아내서 다시 설명해.”

“....!!”

이엔의 눈이 커지며 다급히 리사를 바라보았다.

리사는 팔짱을 풀고 짐 가방을 들며 다시 이엔을 향해 말했다.

“어떤 마음인지 인지하고 설명해주면 그때는 나도 진지하게 같이 생각해주고 들어줄 테니까.”

“리사님...”

진중한 그녀의 눈동자에서 이엔은 안도를 느꼈다.

자신의 말에 신중하게 생각해주는 리사의 모습이 그에게는 깊은 감동을 주었다.

리사는 고개를 올려 그런 이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올 생각이지만... 그 시간동안 황녀전하를 잘 부탁한다.”

이엔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이엔은 훨씬 밝아진 얼굴로 환히 웃으며 리사를 향해 힘차게 대답했다.

“네!”

“웃지 마!”

고개를 휙 돌리며 말하는 리사를 향해서 이엔은 여전히 부드럽게 웃었고 이내 고개를 숙인 후 그림자 속으로 숨어 대공저를 나왔다.

황궁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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