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달콤한 시간
황궁의 정원은 여전히 안개꽃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작은 꽃 한 송이들이 모여 다발을 이루었고 그 다발들로 정원이 꾸며져 있어 보다 정원의 분위기가 아름다워 보였다.
세린은 그런 정원을 제이와 나란히 걸어가며 불안감을 애써 감췄다.
무슨 이야기이기에 항상 잘 웃는 그의 표정이 딱딱한 것일까.
혹시.... 자신이 제이에게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일까?
그래서 자신에게 질려버려 헤어진다던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세린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다급히 제이를 향해 몸을 돌리며 물었다.
“제이!”
“... 네 전하.”
“제.. 제가 뭔가를 잘못했다면 미안해요...!”
“네??”
제이의 아름다운 눈매가 동그랗게 변했다.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눈을 뜬 제이가 당황하는 세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이가 저한테 화가 난 것 같아서요... 제가 뭔가 실수라도 해서 그래서 제이가 화가 난 것이라면 내가 미...”
“전하.”
세린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던 제이는 다급히 세린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큰 손바닥에서 나오는 따뜻한 온기가 그런 세린을 진장시킬 수 있었다.
제이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린을 향해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전하께 화가 날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 그러면... 왜...”
“제게 화도 나고... 전하께 너무 죄송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할지 아직 고민 중이었습니다.”
‘역시 헤어지자는 말이잖아...!’ 세린의 눈에 열이 몰리다가 결국 눈물이 고였다.
세린은 입술을 꾹 깨물며 제이의 가슴팍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올려 그의 푸른 눈을 마주보았다.
세린의 눈에 안쓰럽게 매달린 눈물을 본 제이의 표정이 무너졌다.
창백해진 얼굴로 서둘러 세린의 눈가를 닦아준 제이가 당황하며 물었다.
“전하.... 왜 우십니까!”
“나한테 왜 죄송해요? 뭔데요?”
“.......”
“제이가 하는 말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딱 책에서 봤던 그 장면이에요! 연인들이 헤어지는 그런 모습이라고요!”
“!!!!!!”
제이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며 답지 않게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 네?”
세린의 큰 눈동자가 크게 떠지며 동그랗게 변했다.
제이는 미간을 왈칵 좁히며 다급히 외쳤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왜 그런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하, 하지만 제이가 저한테 말씀드리기 죄송하다고...”
“그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전하 제발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말아주세요... 무서워서 숨도 못 쉴 뻔 했습니다.”
“.... 그러면 무슨 일인지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줘요!”
“.......”
세린의 굳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제이는 한숨을 쉬었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한테 실망하면 어찌할지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했다.
제이는 세린의 손을 잡은 손에 약간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영애들께 구혼서를 받았습니다...”
“... 구혼서요???”
“.... 네. 오해하지 않도록 미리 말씀드리자면 영애들께 그 어떤 관심의 여지도 주지 않았습니다.”
“영애가 아니라 영애. 들. 이라는 거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네요...?”
“.... 네.”
“몇 분이신가요?”
“.... 열 한분이십니다.”
“!!!!!!”
세린의 얼굴에 경악이라는 감정이 물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제이에게 청혼한 영애들이 총 열 한명이라는 건가?
그 많은 영애들이 먼저 다가설 정도로 제이가 매력이 넘치는 건가아아아... 넘치는 정도가 아니구나.
세린은 빠르게 수긍했다.
제이의 반짝이는 하얀색의 머리카락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푸른 하늘을 닮은 눈동자.
굵은 얼굴선과 날카롭지만 아름답게 자리 잡힌 콧대, 화사하고 깊은 눈매는 제이를 더욱 매력적으로 빛나게 만들었다.
커다란 키와 기다란 다리, 그리고 다부진 신체까지도 못난 구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린은 그런 제이를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볼을 붉혔다.
누구의 애인인지 잘나도 너무 잘났다.
‘아 이게 아니지...!’
다급히 정신을 차린 세린이 제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모두 거절할 생각입니다. 제게는 전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구혼을 거절당한 영애들은... 정말 앞으로 결혼을 하지 못하는 건가요?”
“....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면 영애들도 흠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유.....”
세린의 미간이 고민으로 인해서 좁아졌다.
제이는 그런 세린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네?”
“전하와 교제한다는 그 이야기를... 모두에게 알려도 괜찮을 지요.”
“?????”
제이의 수려한 얼굴에 죄책감이 섞인 난처한 미소가 담겼다.
“전하와의 교제를 모두에게 알리게 된다면 다른 귀족들도 구혼을 거절한 이유가 타당하다고 수긍할지도 모릅니다. 제국에 단 한 분밖에 없는 황녀전하와 교제를 하는데 다른 신분의 영애들의 구혼을 받아들일 일은 없다고 그들도 인지하겠지요.”
“정말 그럴까요...?”
“그 영애들과 전하는 비교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영애들이 매력이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저 비교할 상대가 너무 높았던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수긍할 것입니다. 제국에서 전하보다 높은 여성은 없으니까요.”
“아....”
세린은 ‘그렇구나’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제이가 이리도 조심스럽게 교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물어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귀족들에게 교제한다는 소문을 내는 것은 약혼이라고 봐도 좋았다.
미래를 확실히 장담했기 때문에 소문을 내는 것이었고 만인에게 공개를 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세린은 죄책감이 가득한 제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이는 절 책임지지 못하는 건가요?”
“..!!! 절대 아닙니다. 단지 전하를 곤란하게 만들기는 싫었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겠어요. 오히려 타당한 이유를 만들지 못해서 제이가 곤란해지는 것이 저도 싫어요... 그리고 제이가 구혼서를 받은 것도 제이 탓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제이.”
“......”
단호한 부름과 함께 세린의 연두색 눈동자가 반달모양으로 아름답게 휘었다.
제이의 가슴이 쿵 떨어질 정도로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난 제이를 정말 정말 사랑하고 있어요. 제이는요?”
“.... 같은 마음입니다.”
“그럼 해결이네요! 제이, 원하는 대로 해요.”
햇살이 고스란히 담긴 그녀의 눈동자가 눈부시게 빛났다.
다정하리만치 따뜻한 웃음도 온기를 품은 작은 손도 모두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파도처럼 물결치는 분홍빛 머리카락도, 오늘따라 생기가 넘치는 사랑스러운 입술도 붉은 색으로 변한 수줍은 홍조도 자신을 온전히 담은 연두 빛 눈동자마저도 너무나 눈이 부셔서 제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온 힘을 다해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스르륵 놓아버린 제이는 부드럽게 세린의 허리를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하얀 구름처럼 피어난 안개꽃들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입술이 마주 닿았다.
따뜻한 온기를 품은 입술이 닿자마자 제이는 눈을 감았다.
세린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며 붉게 달아오른 볼을 하면서 제이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았고 이내 스르륵 눈을 감으며 그의 온기를 느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는 바람도 모두 달콤하게 느껴졌다.
제이는 마주 닿은 입술을 살짝 벌려 그녀의 작은 입술을 한입 맛을 본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떼어진 입술 사이에서 뜨거운 숨이 세어 나왔고 제이는 짙어진 푸른 눈동자를 조심스럽게 뜨고 세린을 마주보았다.
완전히 붉어진 세린의 얼굴을 보니 저절로 입가가 허물어졌다.
제이는 세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마주 대고 말했다.
“정말 제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 그, 그래요!”
“그렇다면....”
제이의 푸른 눈동자가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세린은 그런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맹수 앞에 토끼라도 된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저를 잡아먹고 삼킬 것만 같았다.
제이는 매력적인 미소를 입가에 담으며 말했다.
“제가 대공작이 되는 날...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
“그 날... 제가 전하를 완벽하게 지켜드릴 준비가 된 날... 제 남은 인생을 전하께 드리겠습니다. 부디 그 날에 전하의 인생도 제게 주시겠습니까.”
제이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보던 세린의 멍한 표정이 점차 경악이 떠올랐다가 이내 다시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가 놀란 눈을 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이내 “푸핫!” 하며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미리 청혼하는 건가요?”
“네, 미리 수락을 받지 못한다면 이제는 제가 불안해서 안 됩니다. 또 다른 누가 혹시라도 전하를 채갈 까봐 제가 얼마나 전전긍긍하는지 모르셨지요.”
“네에??? 아하하하!!”
세린의 청아한 웃음이 보다 유쾌를 담았다.
그 듣기 좋은 웃음소리에 제이의 입가도 부드럽게 허물어졌다.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세린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다시 물었다.
“서둘러 대답해주셔야 제 마음이 놓입니다.”
“아! 흠흠....! 자 다시 질문해주세요.”
제이의 말에 서둘러 웃음을 멈춘 세린은 천천히 목을 가다듬고 제이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제이는 그런 사랑스러운 세린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대공작이 되는 날. 전하를 데리러 가겠습니다. 그 날 제 모든 것들을 전하께 드릴 테니 부디 전하 하나만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제이의 부드러운 어투가 사랑스러워 세린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넓은 가슴에 안기며 말했다.
“좋아요 제이.”
제이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후회하셔도 늦으셨습니다.”
“제가 할 말이거든요? 제이, 이제 후회해도 늦었어요!”
제이가 부드럽게 웃으며 세린의 연두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세린도 마주 바라본 푸른 눈동자를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사랑합니다.”
“저도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다시 마주 닿았다.
길고도 달콤한 입맞춤은 세린에게도 제이에게도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