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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93화 (93/218)

93화. 거지같은 오해

황제는... 아니, 이제는 황제였던 에드윅은 아인대공과 함께 황궁의 정원으로 나와 로레인이 피워준 안개꽃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왔다고 업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고 산책을 하는 등의 여가시간은 늘어났다.

막내딸이 그토록 좋아하던 로레인의 꽃밭은 에드윅이 보아도 참 아름다웠다.

대공작은 그런 에드윅을 보며 물었다.

“매주 정원의 꽃이 바뀐다고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은 안개꽃이군요.”

“세린이 워낙 꽃들을 좋아하니까 레인이 정원을 관리하더군.”

“여전히 애정이 넘치십니다.”

“가끔씩 애들이 너무 팔불출이라는 생각도 들었지.”

‘자기소개...?’ 대공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며 그를 따라 걸었다.

에드윅은 안개꽃을 한 손으로 쓸어보며 대공의 푸른 눈을 마주보았다.

전쟁터에서 함께 굴러다닌 세월만 5년이었고 '친구'라는 이름 아래에 함께 있던 시간은 무려 30년을 훌쩍 넘겼다.

그러다보니 서로의 눈과 표정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심정인지 유추하기 어렵지 않았다.

에드윅은 오랜 친우인 대공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안개꽃을 관찰했다.

그리곤 묵묵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무슨 일이 있었나보군.”

“.......”

“리사경은 얌전하게 제2기사단들을 잘 이끌고 있으니 아닐 것 같고... 공자 문제인가?”

“.... 네.”

대공의 미간이 좁아졌다.

곧 짙은 한숨을 쉴 것 같은 표정이었고 에드윅의 예상처럼 대공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

“무슨 일인지 말해보도록. 혹시 알겠는가,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영애들에게 구혼서가 11장이 도착했습니다.”

“관할 밖이군.”

에드윅은 빠르게 긍정하며 발을 뺐다.

대공의 미간은 점점 좁아져만 갔다.

“제이는 모두 거절할 생각이겠지만... 거절을 하는 것에 앞서 타당한 이유를 만들기가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 11명의 영애들의 혼삿길을 위해서 말인가?”

“그것도 그거지만 하나뿐인 아들 녀석 때문도 있지요. 나름 저희의 귀중한 장남이 아닙니까. 제이도 가문을 이으려면 혼인을 해야 하니 그 혼삿길에 먼지가 깔리는 것이 싫었습니다.”

에드윅은 안개꽃을 묵묵히 바라보며 고민했다.

아직 대공은 세린과 공자가 교제를 하는 것을 모르는 듯 했다.

알았다면 이유를 만들기에 고민을 그리 오래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당연히 우리 세린 같은 아이가 옆에 있으니 다른 영애들이 눈에 차겠나...’

마음속으로 우쭐거리며 비웃음을 지은 에드윅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만약 제이의 구혼서가 세린의 귀에 들어가면 세린의 반응이 어떨까.

‘아빠! 안 되겠어요... 제이공자에게 구혼서를 써서 그 11장을 거절할 이유를 만들겠어요! 그리고 공자와 결혼을 할게요!’

쿠구구궁!

에드윅의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는 제 가슴을 움켜잡고 잔뜩 창백해진 얼굴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 결혼을 한다고...?”

대공의 눈썹이 약간 일그러지며 이상한 소리를 다 한다는 듯 되물었다.

“...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안 돼...! 아직 어려..!!”

“폐하?”

드디어 미친 것이냐는 표정으로 대공이 에드윅을 바라보았고 에드윅은 정처 없이 떨리는 눈으로 황급히 세린이 있을 성을 바라보았다.

그 소식이 세린에게 들리기 전에 서둘러 구혼서를 완벽하고 깔끔하게 거절해야 했다.

“대공! 시간이 없네. 회의를 시작하겠어.”

“..... 예?”

“제이공자의 구혼서에 대해서 빨리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닌가!”

“... 폐하께서 무슨 바람이 부셨기에 우리 제이를..”

“시끄럽고 따라오도록!!!”

에드윅은 대공의 말을 무시하며 서둘러 제 궁의 서재를 향해 걸어갔다.

세린이 부디 이 소식을 못 들었기를 바라며...!

테오는 황제의 집무실에서 처음으로 황제의 이름 아래로 날아온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날이었고 인생의 틀이 바뀐 첫 날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다급한 모습의 시종이 전한 말만 아니었다면 아주 완벽한 기분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대공작의 장남에게 11통의 구혼서가 왔다는 말이더냐.”

“... 네, 맞습니다. 폐하.”

테오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며 한 가지의 상상을 펼쳤다.

‘오빠...! 제이공자에게 구혼서가 11통이나 왔다고 들었어요...! 난 그를 사랑해요!’

테오의 상상 속에서 세린은 애처롭게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그 구혼서에서 공자를 지키려면 내가 제이공자에게 구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나 결혼할게요!! 허락해주세요 오빠!’

그 외침과 함께 웨딩드레스를 입은 세린이 장미다발을 들고 제이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웃으면서 테오의 상상이 끝났다.

테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 결혼을 한다고...?”

“네?”

시종이 얼빠진 얼굴로 되 물었으나 테오는 들리지 않았다.

“젠장... 아직 안 돼!! 허락할 수 없다!!”

“느에.....”

시종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당황하는 것과 동시에 테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쾅!!

부서질 듯 열리는 문을 넘은 테오는 심각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구혼서의 해결방도를 당장에 찾아야 했으며 세린에게 이 소식이 닿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오빠~!”

“...!!!!”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고운 목소리에 테오의 발걸음이 굳었다.

빳빳한 모습으로 뒤를 돌아보자 아름답게 웃으며 제게로 달려오는 세린과 뒤를 따라 걸어오는 이엔이 눈에 담겼다.

테오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세린을 품에 안아주며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뛰어 오는 것이냐.”

“오빠가 힘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요...! 일은 어때요? 괜찮아요?”

세린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테오의 입가가 허물어졌다.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힘들지도 않고 무리하지도 않았단다.”

테오의 다정한 말에 세린의 얼굴에 안도가 차올랐다.

“정말 다행이에요!”

“널 걱정시킬 만큼 오빠가 무능해보였느냐.”

“힉!! 오빠! 왜 그런 오해를 하세요!! 당연히 아니죠!”

세린이 당황하며 테오의 소매를 붙잡자 테오가 작게 웃었다.

세린은 그런 테오를 밉지 않게 흘기며 툴툴거리다가 이내 놀란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바쁘신 거 아니에요? 어디가세요?”

“.......”

테오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조금 난처한 마음에 시선을 돌리다가 말했다.

“... 로레인에게 가는 길이었단다.”

“레인오빠요??”

“그래... 잘 되었구나. 네가 대신 전해주겠느냐?”

“제가 가져다 드려도 괜찮아요? 뭔데요?”

“녀석이 하도 달라고 부탁해서 구한 것이란다.”

세린의 연두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하며 두 손을 천천히 올렸다.

테오는 제 겉옷의 안쪽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무거나 주고 시선을 돌리자. 로레인이라면 내가 보냈다는 것을 알면 바로 눈치를 채고 세린을 붙잡아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형제들의 심각한 세린앓이를 알고 있는 테오라서 눈치가 빠른 로레인에게 세린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소문이 그녀에게 들리지 않도록 시선을 돌리고 막아줄 수 있는 자는 아마도 로레인이 최고일 것이다.

테오는 서둘러 주머니에서 잡힌 무언가를 꺼내어 세린의 손에 올렸다.

“.......”

“.......”

아주 긴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테오의 얼굴이 티가 나지 않게 창백해졌지만 이내 그 당황스러움도 자연스러운 표정관리로 감췄다.

세린은 제 손에 올려 진 무언가를 바라보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테오를 바라보았다.

뒤에 서 있던 이엔마저도 당황하며 테오를 바라보았다.

진담이냐는 무언의 눈빛이었다.

세린이 물었다.

“... 정말 이걸 레인 오빠에게 드리는 거... 맞죠?”

잠시 머뭇거리던 테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그래, 잘 부탁한다.”

“... 네에....”

세린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대답한 후 다시 제 손에 올라온 그것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은색의 긴 원형의 작은 그것은 수도의 유명한 화장품을 만드는 뮤랑 마담의 립스틱이었다.

뚜껑 밑의 색을 확인하니 연한 분홍과 진홍이 섞인 듯 한 무척 생기 있고 아름다운 느낌의 색이었다.

‘이걸 레인 오빠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2황자 전하께서 이걸 왜....?’

“......”

테오는 침묵했지만 그 침묵 속에서는 억울함과 분노가 일렁였다.

몇 개월 전부터 세린에게 어울릴 것 같아 미리 뮤랑 마담에게 주문을 넣은 립스틱은 제 빛을 보지도 못하고 칙칙한 남동생의 품으로 떨어지게 생겼다.

세린이 저걸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저 색을 바르는 모습도 보고 싶었는데... 이 무슨 어이없는 일이란 말인가.

테오는 절망하며 아버지에게로 향했고 세린은 난처한 얼굴로 로레인에게 향했다.

로레인은 제 연구실에 찾아온 세린을 반갑게 맞이했다.

“세린! 오빠가 보고 싶어서 온 거니?”

화사하게 웃는 로레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세린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 웃으며 말했다.

“오빠가 보고 싶기도 했고 테오 오빠가 전해달라고 한 것도 있어서요...”

“형님이...?”

로레인의 제비꽃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테오가 자신한테 줄 것이 있었나?

그런 로레인을 향해 세린이 슬쩍 립스틱을 꺼내주었다.

“....?”

“오빠가 원했던 것이라고... 하도 달라고, 달라고 부탁을 하셨다고 했던걸요...?”

“... 이걸?”

“네?”

“아, 아니 맞아! 고마워 세린”

로레인이 황급히 세린에게서 립스틱을 받아가며 다정하게 웃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고 차오르는 분노에 머리는 차게 식었다.

‘형님... 도대체 무슨 문제기에 이딴 거지같은 오해를 내가 받게 만드는 건가요...’ 아무래도 세린의 문제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로레인은 황급히 세린을 붙잡고 궁 안으로 들였다.

“세린! 차라도 마시고 가렴. 오랜만에 꽃차를 끓여주마.”

“와아..! 좋아요!”

일단 세린을 제게 보낸 것은 그녀를 붙잡고 있으라거나 시선을 돌리라는 의미 같으니 최대한의 시간으로 그녀를 붙잡을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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