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제이의 고민
제이의 입술이 떨어지고 천천히 고개를 올린 세린은 자신을 온전히 담은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제이는 세린과 눈을 맞추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믿음이 가나요?”
세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 네에.”
“일주일 근신은 필요할까요?”
“아니요!!”
다급히 외친 세린의 한 마디에 제이의 얼굴이 화사해졌다.
세린은 부끄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제이 얄미워요....”
“이런... 전하는 사랑스럽습니다.”
“으억!!!!”
세린의 얼굴이 단번에 붉어지며 허겁지겁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자, 잘 거예요!! 잘 자요!!!”
“큽...”
제이는 주먹으로 제 입을 가리며 웃음을 꾹 참았다.
제 웃는 소리라도 들리면 아마 그녀가 더 부끄러워할 것 같았다.
제이는 눈가를 곱게 휘어 웃으며 세린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 후 말했다.
“내일 오겠습니다. 좋은 꿈꾸세요.”
“제이도 좋은 꿈 꿔요...!”
제이의 인사에 고개를 빼꼼 올린 세린이 맑게 웃으며 하는 말에 제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언제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제이는 행복한 얼굴로 세린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창문으로 조심스럽게 나왔다.
하늘 위의 달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다.
*
황제의 인사가 끝나가는 연회장은 아직 밝았다.
제이는 연회장의 귀족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서서 세린이 잠든 궁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그녀가 너무도 그리웠다.
연회장의 수많은 영애들은 그런 제이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절로 없던 갈증이 생길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무심하게 창문 밖을 바라보는 그의 날카로운 턱 선과 콧대, 풍성한 속눈썹 밑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
생기를 머금은 붉은 입술이 무척이나 색정적이었다.
그의 곁에서 서성이던 영애가 결국 그에게로 한 발 다가서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세르노 백작가의 장녀 세르노 로인 이라고 합니다. 공자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제이의 푸른 눈이 백금발을 가진 영애를 시야에 담았다.
제가 누군지 모르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붉게 달아오른 두 볼을 하고 수줍게 웃는 영애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제이는 잠시 고민을 했다.
무시를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 지로 말이다.
그러다 제이는 이내 몸을 돌려 금발의 영애를 마주 보았다.
커다란 키와 다부진 체격이 입고 있는 옷 밖으로도 느껴졌고 정면에서 바라본 외모는 더욱 화려하게 빛이 났다.
백작가의 영애의 얼굴이 더욱 붉게 타올랐다.
제이는 그런 영애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스페라도 대공작의 장남 제이 스페라도 입니다. 제게 용무라도 있으신지요.”
“아... 그저 인사를 나누고 싶어서...”
“다행입니다. 이제 해결이 되셨으니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
무심한 감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망설임 없이 영애에게서 멀어진 제이는 짙은 한숨을 쉬었다.
원래는 무시하려 했으나 다정한 세린이 이러한 제 성격을 싫어할지도 몰라서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린이 옆에 없으니 무시해도 좋았을지도...’
제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끝나가는 연회장의 샹들리에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내일 다시 만나게 될 세린의 얼굴이 벌써부터 몹시 보고 싶어졌다.
제이의 세린 앓이는 나날이 커져만 갔다.
그리고 정확히 다음 날 아침부터 제이의 기분은 아주 최악으로 하락했다.
제이는 아침이 밝자마자 서재에 앉아 대공작의 정무를 도와 일을 하고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은색으로 보였고 푸른 눈동자가 집중을 하느라 더욱 짙어져 있었다.
얼른 서류를 마무리하고 세린에게 갈 생각이어서 서류를 향한 집중력이 대단했다.
그러던 중 제이의 집무실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정갈한 노크가 끝나고 제이의 허락 아래에 들어온 이는 대공가에 온 편지와 우편을 체크하는 시종이었다.
시종은 은쟁반 위에 있는 10개정도 되어 보이는 편지봉투를 들고 제이에게 다가왔다.
“편지가 왔습니다.”
제이는 그 편지들을 무감정하게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중요한 내용이 아니거든 따로 뜯고 싶지 않다고 전했던 것 같은데...”
“송구합니다. 하지만 읽어보셔야 하는 내용이라고 판단했습니다.”
“..... 내려놓고 가도록.”
“감사합니다.”
시종은 부드러운 몸짓으로 편지를 제이의 책상에 내려놓았고 깔끔하게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제이는 깊어지는 미간을 좁히며 편지를 뜯어보았다.
한 장씩 편지가 뜯어질 때마다 제이의 미간이 구겨졌고 이마에 힘줄이 돋기 시작했다.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이를 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나왔다.
으드득
제이의 푸른 눈이 결국 왈칵 일그러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겉옷을 걸치고 문을 나섰다.
기다란 다리로 걷는 보폭 속에서 조급함과 분노가 보였다.
제이는 대공작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나직한 부름에 대공의 허락이 떨어졌다.
“들어 오거라.”
벌컥!
“들어오라고 했다고 문을 부수지는 말거라...”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을 뜯어버릴 기세로 열어버린 제이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대공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냐.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이 있어 보이는 구나.”
“무슨 일 정도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요.”
“... 일단 앉고 나서 말해 보거라.”
제이는 대공의 대각선 의자에 앉으며 싸늘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말했다.
“로만티 후작, 벨로 후작, 메로 후작, 불다그 백작, 라먼 백작, 머구시퍼 자작.... 이 후에 더 이름을 불러야 하나요.”
“........”
대공은 침묵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 이름들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제게도 저 귀족들에게서 온 편지가 한가득 이었으니까.
대공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제 이름들에 금이 가는 줄 모르고 일부터 저질렀더구나. 나도 오늘 받은 편지를 보고 알았다.”
“그들의 이름에만 금이 가나요 아버지...!”
제이의 미간이 왈칵 좁아졌다.
분노로 그의 목에 핏대가 섰고 푸른 눈동자에는 불이 튈 것처럼 타올랐다.
제이가 받은 편지는 모두 영애들이 쓴 편지였다.
문제는 내용이 '구혼'이라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이 먼저 구혼서를 보내는 것이 대중적이었으나 아주 가끔씩 이렇게 영애가 먼저 구혼을 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이 후가 문제였다.
구혼을 수락한다면 행복한 결말이지만 남성이 이를 거절할 시에는 여성이 또 다른 구혼자를 찾기가 매우 어려워진다는 부분이었다.
여성의 구혼이 거절당하면 그 여성에게서 결혼을 할 만한 매력이나 능력이 없다는 뜻으로 여긴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혼은 못한다고 볼 정도로 영애들의 귀족세계가 참으로 냉정했다.
그런데 그런 구혼서가 제이에게 도착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도착한 구혼서의 숫자가 무려 11통이라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11명의 여성들을 거절한다면 제이는 수많은 영애들의 인생을 망쳤다는 이유로 명성에 금이 갈 수도 있었고 거절당한 영애들의 인생도 똑같이 금이 갈 것이었다.
대공은 각 귀족들이 보낸 구혼수락 요청 편지를 읽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 귀족들은 대공작 부인의 자리가 탐이 나 제 딸의 인생을 걸어버린 못된 생각을 가졌을 것이었다.
제이가 제 명성에 흠집이 날까봐 구혼서에 할 수 없이 허락이라도 하기를 바란 것인가.
이 생각 없는 아버지들로 인해서 흔들릴 어린 영애들의 인생이 참 안타까웠다.
그러나 제이의 고민은 오직 하나였다.
이 소식으로 인해서 세린이 받을 불안함과 상처였다.
제 명성은 신경 쓰지 않으나 그녀가 다른 오해라도 품고 속상해 할까봐 그것이 걱정이었다.
대공은 침묵을 하다가 이내 물었다.
“넌 어찌하고 싶더냐.”
“모르셔서 묻는 것입니까. 다 거절할 것입니다.”
“예상했던 말이지만 명분을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
“이 영애들의 미래에 문제가 생긴다면 네게도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이미 구혼서를 쓴 후부터 문제였습니다.”
“그러니까 명분을 잘 생각하라는 말이다. 거절의 이유가 모든 귀족들을 납득시켜야 영애들도 너도 금이 가지 않을 것 아니냐.”
“....... 하!”
제이는 고개를 기울이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이 상황이 매우 화가 났다.
제이는 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에게 어떻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지 암담하기만 했다.
보다 소중하게, 어떤 것보다 귀중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상처하나 받지 않도록 노력할 생각이었는데...
제이의 눈이 일그러졌다.
*
세린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그저 메리부인을 따라 자수를 놓고 있었다.
“전하,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늘고 계시네요.”
“정말요??”
“네, 매우 완벽하십니다.”
메리부인의 아름다운 호박색 눈동자가 곱게 휘었고 세린의 미소가 환해졌다.
어쩜 웃는 것마저도 저리 예쁘신지.
우리 제이도 리사도 웃는 것은 예쁜데... 성격이 영...
제 아이들의 흉도 보면서 미소를 짓는 메리부인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세린은 수줍음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 아빠가 좋아할까요?”
메리 부인의 눈이 커졌다.
“답이 너무도 명확해서 답하기 곤란합니다 전하. 폐하께서는 전하께서 주시는 모든 것들을 다 좋아하실 것이라고 감히 장담합니다.”
“하하하 그렇지만 예쁜 것으로 드리고 싶어서요.”
“선물의 의미는 무엇인지 여쭈어도 괜찮을지요?”
메리부인의 질문에 세린은 하얀 손수건 위에 완성이 되어가는 팜파스그라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팜파스그라스 꽃말이 뭔지 아세요?”
“무엇인가요?”
세린의 얼굴이 다정하게 빛났다.
애정을 가득 담은 음성으로 세린이 말했다.
“'자랑스러움'이라고 해요.”
“어머나....”
“그래서... 꼭 예쁘게 만들어서 드리고 싶었어요...”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하하 아빠라면 그럴 것 같아요. 고마워요 부인”
메리부인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담겼다.
세린의 마음이 너무도 예뻐서, 저 선물을 받을 황제가 몹시도 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