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94화 (94/109)
  • 94화

    *

    “어째 병상에 누워 계신 모습을 가장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클라라가 나를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사실 이만 일어날 때도 되었는데.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흐린 눈으로 디에고를 힐긋 바라보았다.내 발치를 지키고 있는 저 짐승이 문제였다.

    “왕국 의원은 실력이 부족한 걸까요?”

    나는 심드렁하니 클라라에게 물었다.

    정말 내가 보고 남들이 봐도 이제 나 너무 멀쩡한데.

    - 좀 더 안정이 필요하십니다.

    - 이번에 구해온 귀한 약재가 있으니, 올리겠습니다.

    - 잘 먹고 푹 주무셔야 합니다.이게 의원이 할 소리인가.

    그도 더는 뭐라 할 말이 없었는지 갈수록 내용이 빈약해졌다.

    “이제 괜찮습니다, 했다가 행여나 영애가 삐끗하기라도 하면 어디 목숨 부지하겠습니까.”

    그래, 작작 쓰러져야지.

    내 탓이다.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나도.처음에는 나도 지은 죄가 있어서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내가 움직이는 게 모두에게 폐를 끼치는 것만 같아서.

    - 푹신한 카펫을 깔아라!

    - 뾰족한 물건은 다 치우세요!불편했다.

    아주 많이.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습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가만히 나를 질책하는 듯했다.그러게, 어차피 내 도움이 필요한 자리도 아니었는데.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으려나.

    “하나 아이의 목숨이 무사한 것은 순전히 영애 덕입니다.”

    온화한 목소리가 뒤따랐다.그게 또 담담한데 상냥해서 말의 신뢰도가 올라간다.괜히 민망해서 입술을 삐죽이고 있자 클라라가 샐쭉 미소 지었다.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으니, 확신이 들었다.

    이 일의 적임자는 슈베른 왕국의 왕녀, 클라라였다.

    “잠깐 담소를 나누고 싶은데, 단둘이.”

    웃음 띤 얼굴로 청하자 빤히 바라보던 클라라가 이내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자리를 준비하지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드디어 이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괜찮은가.”

    내 팔을 붙들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내 옆을 지키고 선 디에고.

    “저 지금 옆방 가는 거거든요, 각하.”

    그건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의 얼굴에 한 치의 흔들림도 드러나지 않았다.내가 지금의 너에게 무슨 말을 하랴.

    처음에는 너무 감동이었고, 그다음에는 조금 난감했으며, 나중에는 살짝 짜증이 일 정도였다.그리고 지금, 이젠 그가 안쓰럽기까지 했다.얼마나 그간 나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으면 이럴까 싶고.내 죄가 크다.기어이 옆방까지 나를 에스코트한 그가 아쉬운 눈길을 보내며 돌아갔다.

    “좋으시겠어요, 저리 사랑받으셔서.”

    전혀 부럽지 않은 말투로 클라라가 말했다.좋지, 좋다마다.

    행복했다, 아주.간만에 서로 가식적인 미소를 주고받느라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제 저택에서 연기를 하는 것은 퍽 버거웠는지 클라라가 먼저 표정을 허물었다.

    “이런 건 이제 그만두죠.”

    나는 고개를 끄덕여 격하게 동의했다.하마터면 경련 일어날 뻔했네.

    “그보다 제게 따로 무슨 할 말이 있으신 걸까요.”

    사실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

    “부탁이 있어요.”

    내가 알기 이전에 이미 왕국에 넘겨졌을 이들.

    그들을 다 구하겠다는 것은 내 오만임을 알았으나.아무것도 안 하고 놓아버리기엔 마음에 찌꺼기가 남았다.그러니까 결국 이건 나 좋자고,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에 불과했다.

    “제가 여태 챙겨본 자료가 있어요.”

    내 진지한 얼굴에 클라라의 표정에도 긴장감이 돌았다.

    “왕국으로 넘어갔을지 모르는 제국민들.

    그들에 관한 정보를 준비해 왔답니다.”

    비오첼라의 꼬리를 잡기 위해 시작했던 막무가내 조사는 계속 이어졌었다.하나하나 영애들의 위치와 진실을 캐었고, 그중 행방이 불분명한 이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마주하면 알아챌 수 있게끔 특징과 초상화 또한 준비한 참이다.

    “이번에 그간 노예 거래를 해온 왕국 귀족들을 추려낸 것으로 알아요.”

    나는 테이블을 향했던 시선을 들어 클라라의 하늘빛 눈동자를 담았다.

    “이제 와서 아무 소용 없을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다.

    지금은 그곳에 없을 수도.

    혹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손은 내밀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클라라가 생각에 잠긴 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건 부탁할 일이 아니군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답에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려왔다.

    “당연히 했었어야 할 일이죠.”

    부드러움 속에 한없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고생해서 만든 자료를 기꺼이 내어주신다면, 하나도 빠짐없이 살펴보겠습니다.”

    가슴이 뭉클했다.

    클라라의 목소리에 책임을 아는 자의 고귀함이 담긴 듯 힘이 실렸다.

    “그리고 그분들을 왕녀의 이름을 걸고, 보살피도록 할게요.”

    침대에 누워 이 부탁을 건네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해봤지만, 그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광경이었다.

    “…그리 말해줘서 고마워요.”

    진심으로 이게 헛된 일이라 치부하지 않아 줘서 고마웠다.

    아무래도 왕국과 얽힌 일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고.클라라가 보기만 해도 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저 진짜 이만 좀 움직이고 싶거든요? 어떻게 제 편 좀 들어주세요.”

    나는 또 하나의 간절한 바람을 읊었다.여기는 내 편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제국에 내 편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디에고의 서슬 퍼런 눈빛에 그 누구도 입 벙긋 안 하고 그저 네네, 거리는 중이다.

    “이러다 해가 바뀔 것 같아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진저리치는 내 모습을 본 클라라의 맑은 웃음소리가 응접실을 메웠다.

    “예, 저는 능력이 부족하니.

    오라버니께 한번 청해보지요.”

    왕세자는 내가 쓰러지고 눈을 떴던 직후, 한 번 찾아왔었다.

    내가 구분할 수 있는 그 잔뜩 찌푸린 채 짓는 걱정 어린 표정을 하고.

    - …저는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영애와는 만나지 못할 것 같군요.장난스러운 말을 던지고 내 쾌차를 빌어준 그는 그 뒤로 그날 잡아들인 귀족들의 목을 짤짤 흔드느라 바쁘게 산다던데.잠잘 시간도 없다 들은 것도 같지만, 사양하기엔 내가 사정이 좀 급했다.

    “예,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네요.”

    어떻게든 이제 이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다.그리고 그녀는 약속을 참 잘 지켰다.

    “이만 돌아가지 그래, 디에고.”

    유일하게 지금 디에고에게 할 말, 못 할 말 구사할 수 있는 사람.

    “영애도 이제 충분히…….”

    말을 하다 말고 나를 힐긋 본 에녹의 얼굴이 미묘해진다.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것 같다만.”

    너 왜 잘 나가다가 삐그덕대냐.

    그 흐트러짐을 알아챈 디에고가 비웃음을 날렸다.나는 맹렬하게 에녹에게 시선을 주었다.

    더 힘 좀 내봐라, 이 사람아.

    “…차라리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그럼 왕국 온 김에 여행이라도 하든가.”

    미간을 찌푸린 왕세자가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디에고를 책망했다.

    그리고 그의 발언은 내 마음을 들끓게 했다.여행? 지금 여행이라고 했어?!

    “각하.

    여행이래요, 여행.”

    심하게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마음을 전해본다.

    내가 얼마나 그런 것을 동경해 왔는지.

    내가 지금 얼마나 가슴이 떨리는지.지금 여기에 응하지 않으면 한동안 너를 어떻게 괴롭힐지!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에고의 입매가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그럼, 그래 볼까.”

    긍정의 답이 돌아왔음에도 무언가 미묘하게 어긋난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비비안 납치 사건 및 왕국과의 노예 거래까지.일련의 일들을 휘몰아치듯 처리하고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제국의 황태자가 제 손에 쥐어진 서신을 한참 바라봤다.[비비안 윈데이너는 또다시 납치당했으므로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죄인은 모두 제국으로 인도하였으니 나머지는 전하께 맡기겠습니다.]디에고 브라이트가 보내온 짤막한 서신을 도대체 몇 번째 반복해서 읽는지 모를 리안의 얼굴이 끝내 일그러졌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비비안이 납치당한 이후, 제국은 한바탕 뒤집어졌다.설상가상 그 일을 계기로 밝혀진 진실들은 그들 모두를 경악하게 했고.하나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로 벌어진 일들을 수습함에 있어 모두가 뛰어난 역량을 펼쳐주었다.덕분에 일에 치여 죽을지언정 그만큼 성과가 두드러지는 나날인데.

    “전하, 마이어 백작 영애 도착하였습니다.”

    간단한 손짓으로 백작 영애를 들인 그가 익숙한 듯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소식이라도 들어볼까 하여 들렀습니다.”

    자신에게 디에고의 서신이 도착했음을 알고 온 것이 분명했다.

    리안도 이제는 레사가 가진 능력의 한계를 의심하지 않았다.

    “여기 보시겠습니까.”

    여태 쥐고 있던 서신을 영애에게 넘긴 리안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

    항시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던 그가 이제 이만큼 느슨해질 수 있을 정도로 스텔라와의 시간이 익숙해진 참이다.

    “하.”

    짤막한 토막을 읽고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은 스텔라마저 같았다.기가 막히는지 헛웃음이 튀어나오고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이 저와 다르지 않음에 리안이 피식 웃었다.

    “…납치범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스텔라가 더 말을 잇지 않았다.황태자에게 서신이 도착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문이 난 것인지, 뒤이은 방문객이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하필 이번에는 상대가 더 안 좋았다.

    “전하!”

    윈데이너 후작이 헐레벌떡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무슨 연유로 저리 저를 찾는지 아는 리안이 스텔라에게 돌려받은 서신을 말없이 후작에게 내밀었다.가뿐히 그것을 받아든 후작, 그리고 흐르는 정적.툭―서신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울렸다.

    “이,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납치라니요!”

    딸아이 걱정에 잔뜩 예민해진 후작은 상황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납치’

    라는 단어에 이미 질겁한 그가 어쩔 줄을 모르고 바들바들 떨자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황태자가 힘겹게 입을 떼었다.

    “그게…….”

    “납치범은 누구랍니까! 지금 당장 기사단을 꾸려 제가 가봐야겠습니다! 허해주십시오!”

    스텔라가 지끈대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가도 소용없을걸세.”

    착잡한 리안의 목소리가 후작을 만류했다.

    그에 사정없이 얼굴을 구긴 후작이 서운함을 토로하듯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어쩐지 리안이 황당과 부끄러움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아마도 그 납치범이 디에고 브라이트, 제국의 대공인 것 같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