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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95화 (95/109)
  • 95화

    【 서로를 깊이 알아가는 시간 】

    - 내가 이제부터 납치범이 돼볼까, 하고.나는 그냥 여행이 가고 싶다고 말한 것 같은데.어떻게 그게 이렇게까지 변질될 수 있는 걸까.

    제 수하들은 물론이고 왕세자가 붙여준 이들까지 죄다 따돌린 디에고가 해맑게 웃었다.그렇게 시작된 납치극은 내 생각보다 꽤 좋았다.그 누구의 시선도 따라붙지 않고 아무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건 그것만으로 충만한 해방감을 주었다.게다가 제국과는 다른 왕국의 것들도 한몫했다.처음 먹어보는 음식, 같은 듯 다른 풍경.더불어 사람들 사이로 아무 이질감 없이 섞여 들어가니 그들의 생동감이 여과 없이 전해졌다.내게는 정말 특별한 경험인데.다만 한 가지.따라붙는 시선과 선을 긋는 사람들 대신에 전에 없던 것이 늘었다.바로 디에고 브라이트.

    “각하.”

    “디에고.”

    그래, 디에고.

    “저 말고 다른 걸 좀 보세요.”

    납치범 역할에 흠뻑 빠지기라도 한 걸까.

    아니, 납치는 내가 당했었는데 후유증은 왜 얘가 더 겪는지 모를 일이다.어쩌면 그간 달라붙던 시선보다 더했다, 얘가.

    “내가 그대에게 눈을 떼는 것에 두려움이 생겨서.”

    얼굴은 절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잠깐 눈 뗀다고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나요, 라고 따지기엔 때마다 일이 생겼었다.이런 실랑이도 한두 번이지.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

    아니다.

    이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재주도 좋지.

    내 손을 붙들고 이 번화가 인파 속을 앞도 안 보고 잘만 걷는다.고개가 아예 내 쪽으로 돌아가 있다.

    이젠 이 기이한 광경 덕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 같은데.고치자.

    이 병, 하루빨리 고쳐야겠다.

    “디에고, 제 손이 절단 나기 전에는 우리가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이만 앞 좀 보면서 걷지 않을래?

    “…제가 다 불안해서 그래요, 정말.”

    쀼루퉁한 얼굴로 투덜대자 끝내 그가 푸스스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가벼이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준다.

    “당분간만.”

    따스함이 깃들었음에도 어딘지 고통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입이 다물렸다.어쩌면 나보다 더 디에고에게 악몽이지는 않았을까, 그 시간들이.나부터도 내 목숨이 위험했던 순간의 두려움보다 그를 잃을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하는 쪽이 더 괴로운 것 같다.

    ‘이래서 네가 안심이 된다면, 까짓것!’

    나는 꼭 잡고 있던 손을 잠시 풀어 팔짱을 꼈다.

    그대로 다시 디에고의 손에 내 손을 얽어내니 순간 움찔하는 팔 근육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진다.두터웠다.팔짱을 끼니 아주 한아름 가득 찬다.내 적극적인 자세에 퍽 놀랐는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내려다보는 디에고.귀엽기도 하지.

    “제가 이렇게 찰싹 붙어 있을게요.

    어디도 안 가고.”

    지그시 내리깐 그의 눈동자에 느른함이 스몄다.

    만족스러운 게 여실히 드러나는 나른하고 몽롱한 눈빛이었다.

    “그래 주면 고맙겠군.”

    *

    - 왕국엔 전설이 내려오는 꽃나무가 있지요.

    그 아래서 입맞춤을 하면 나무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 그 연인은 헤어지지 않는다더군요.

    - 나무가 먼저 시들면 어쩌죠?눈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 세운 내게 클라라는 확신에 찬 요사스런 미소를 짓고 귀에 속삭였더랬지.나는 오늘 그 꽃나무를 쟁취하러 길을 나섰다.물론 디에고랑 입을 맞춰야 하니 그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꼭 그걸 믿어서는 아니었지만 기왕 온 김에 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무려 전설이라는데.언제 또 와보겠어.어디 험준한 산속에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다만 왕녀의 숲이라 함부로 사람이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기는 했다.

    - 아주 가까운 곳에 잔뜩 있답니다.그때만 해도 몰랐지.

    그게 걔 땅인 줄은.

    흔쾌히 내게 문을 열어준 클라라에게 감사를 전해본다.그렇게 디에고의 손을 꼭 잡고 들어선 숲은 처음에는 평범했다.

    물론 아름답기는 했지만, 여느 숲과 확연한 차이는 없었는데.그것도 잠시.향긋한 꽃향기가 먼저 우리를 찾아들더니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와―”

    겨울에도 꽃을 피워 그런 전설이 붙었다 들었다.맑은 공기 덕에 더없이 깨끗한 햇살이 하얀 꽃잎들을 감쌌고, 상쾌하다 싶은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반짝임을 더했다.눈이 부셨다.한참 시선을 빼앗겨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디에고의 손길이 닿는다.후드가 벗겨져 바람에 흩날리는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는 그 느낌이, 꽃나무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던 나를 그에게로 돌려놓았다.분명 방금까지 새하얀 아름다움에 온 정신이 팔렸었는데.

    마주한 디에고의 푸른 눈이 더 가슴 시리게 아름답다 느껴졌다.한참 그 눈동자에 넋을 잃고 있다 아차 한 내가 퍼뜩 디에고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부지런히 해야 해.’

    족히 열 그루는 넘어 보이는 나무의 행렬을 비장하게 훑은 내가 첫 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간다, 디에고.너무 높아 닿지 않는 목표물에 잠시 망설여졌으나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내게 당겼다.

    ‘부끄러움은 잠시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힘내자, 나.’

    벌써 벌겋게 얼굴에 열이 오른 게 절절히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읍―”

    찬 겨울답게 조금은 서늘하고 말캉한 입술이 맞부딪혔다.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눈에 입술을 대었을 때와 같은 청량함이 전해진다.어린아이 같은 입맞춤을 끝내고 들었던 까치발을 내리자 짐짓 놀란 듯 굳어 있던 디에고가 내게 손을 뻗어온다.진득하게 내 허리와 등을 감싸는 손길에 나는 그의 입술을 두 손으로 막았다.

    “이번엔 저쪽 나무에서 해야 해요.”

    내게 입이 막힌 채 눈썹을 구기는 디에고.

    “클라라가 그러는데 이 나무 아래서 입을 맞추면 나무 수명이 다할 때까지 헤어지지 않을 수 있대.”

    “그게 무슨―”

    네 의견은 듣지 않는다.그의 손을 잡고 두 번째 나무 아래로 향했다.

    바빴다.

    - 여러 나무 아래서 다 하면 하나가 수명을 다해도 다른 나무가 살아 있으니 그야말로 영원 아니겠어요, 영애.그랬다.

    안전이 제일이었다.

    아주 이런 쪽으로 영특했다, 클라라가.두 번째까지는 한 번 하고 다시금 입을 맞추려 움직이던 디에고가 세 번이 넘어가자 체념하고 빠르게 내 이동을 도왔다.그렇게 마지막 남은 나무 아래 서자 어쩐지 조금 지친 우리는 웃음마저 말라버린 채였다.

    “이제 여기가 마지막인가.”

    잘 따라와 준 디에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공을 치하했다.그리고 까치발을 들어 좀 전과 다르지 않게 입술을 맞댄 순간.입고 있던 로브가 사정없이 구겨질 정도로 그의 커다란 손이 나를 통째로 움켜쥐었다.

    놀란 나머지 움찔 멀어지려는데 그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침범하더니 그대로 퇴로를 막았다.꼼짝없이 붙잡힌 나는 속수무책으로 디에고의 숨을 받아 마셔야 했고.견디기 힘들어질 때쯤 그의 등을 두드리면 입술이 스치는 거리만큼 멀어져주는 것을 반복했다.수많은 나무 아래 입을 맞댄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할애한 디에고와의 입맞춤이 버거워질 때 자비를 베풀듯 그가 입술을 떼었다.디에고와 이마를 맞댄 채 밭은 숨을 내뱉고 있으니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 들어온다.조금은 벅찬 입맞춤에 어쩐지 자그마한 심술이 들어간 것 같아 그를 노려봤다.

    “참느라 애먹었거든.”

    코끝을 맞대고 도리도리하는 그가 귀여워서 내가 한번 봐줬다.추운 곳에 오래 머문 탓에 허기가 진 우리는 음식점으로 향했다.왕세자가 미리 알려준 가게로 향하면서 나는 디에고를 힐긋댔다.

    - 아, 디에고는 매운 것을 못 먹는답니다.마치 잊은 물건이라도 있다는 듯 내게 말을 흘린 에녹이 싱긋 웃었었다.

    필시 내가 이러기를 바라고 던진 거겠지.조금 왕세자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궁금했다.그리고 도착한 가게의 앞에서 디에고가 멈칫한다.그 모습을 빤히 보자 내 시선을 인지한 그가 빠르게 표정을 정돈하고 걸음을 옮겼다.

    ‘진짜인가 봐.’

    탁자 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보자 입에 침이 고였다.딱 봐도 맛있어 보인다.

    붉은색의 스튜같이 보이는 음식을 먼저 먹어보자 입 안에 열기가 번지며 맛이 퍼져 나갔다.왕국 특유의 향신료가 낯설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살짝 매콤함이 감돌았다.이 정도 매운 것은 괜찮을 것 같은데.여태 평소와 다르지 않던 디에고가 어쩐지 음식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것 같았다.

    “먹어요, 디에고.

    맛있어.”

    그가 먹는 것을 보고 말겠다는 듯 주시하자 아무렇지 않게 입에 떠 넣는다.

    “…맛있군.”

    ‘왕세자, 이 거짓말쟁이.’

    그러나 그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판명 났다.

    핏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으로 제 입가를 틀어막은 디에고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기 때문이다.

    “물! 물 마셔요!”

    얼른 물컵을 손에 쥐여주자 벌컥벌컥 들이켠다.

    목울대가 몇 번을 꿀렁일 때마다 요상하게 내 마음도 같이 요동쳤다.얼굴을 찡그리며 쓰읍, 하아―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뱉는 모습이 야했다.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가끔 같이 매운 음식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나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은 발견이었다.

    제국에 돌아가면 왕세자에게 선물을 보내도록 하자.친하게 지내서 나쁠 게 없어 보였다.야한 식사 시간이 끝나고 종일 돌아다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침실.우린 왕국 남매의 배려 덕에 그 지역 귀족의 대저택에서 머물 수 있었다.

    그저 왕세자의 사람이라 둘러댄 채.그러니까 그 말인즉슨, 방은 차고 넘친다는 것과 다름없는데, 어째서 침실을 하나만 쓰는 걸까.매일 잠들기 전 심술 난 마음이 치고 오른다.언제부턴가 꼭 같이 잠에 드는데, 욕망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나와 달리 쟤는 너무 평화로워 보였다.사실은 그냥 무서워서 밤에 혼자 못 자는 거 아니야?

    “각하, 밤에 혼자 주무시는 게 무서운 거세요?”

    나는 침대에 눕혀놓고 소파에 앉아 서적을 뒤적이던 그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이젠 막 그런 표정도 짓고, 참 많이 편해졌다, 우리?

    “따로 방을 쓸 생각은 없으니, 그리 생각하고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틈 하나 없는 벽 같은 미소가 쓸데없이 해사했다.

    그런 그를 곁눈질로 흘기고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후우―”

    완벽한 하루였다.

    “…이렇게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시간을 보내니까, 모든 게 꿈같았어요.”

    그야말로 꿈이었다.이제 끝이 보이는 이 여행에 아쉬움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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