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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93화 (93/109)
  • 93화

    *내겐 부모가 없었다.대신 주인님이 있었지.부모가 무엇인지는 타인의 가정을 통해서 습득했다.

    그마저도 제각기 모습이 달라 나로서는 도무지 부모란 게 무언지 알 수 없었지만.첫 기억은 고아원이었다.내게는 이름이 없다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뒷문을 통해서 데이비드 후작가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 네 이름은 엘이야.보드랍게 빛나던 사내아이, 알렌 데이비드가 이름을 주었다.라엘, 이라는 제 애완동물 이름의 끝 자를 따서.언젠가 그의 품에서 그르렁대며 쓰다듬을 받던 라엘을 빤히 봤다.

    나보다 처지가 나아 보였다.그래서 그 밤, 땅속 깊이 라엘을 묻었다.다음 날, 식사도 하지 않고 울며불며 속상해하는 알렌 데이비드를 보고, 뭔가 잘못되었나 싶었지만.그날 밤 초코케이크를 입에 담으며 미소 짓는 소년을 보고, 그 생각을 지웠다.별일이 아니었다.내게 일상이란, 어릴 때는 맞는 것이었다.

    맞으면서 반대로 때리는 법을 배우는 나날.

    커서는 누군가의 죽음을 가져오는 게 종종 하는 일이었고.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다른 일상은 경험해 본 적 없었으니.그러다 어느 날, 작은 호기심이 일었다.정말 내 부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그렇게 처음으로 온전히 내 의지로 움직여봤다.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은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카터 남작.뜻밖에도 귀족이었다.그러나 살아 있지는 않았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동생에게 살해당한 것이다.분노라든가, 복수심이 일지는 않았다.

    다만 내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을 마주하자 기분이 묘했다.가져보면 어떨지.그들을 찾는 것만큼이나 카터 남작가를 취하는 것은, 쉬웠다.그러나 내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엘이었다.애완동물 이름의 끝 자를 딴 엘.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얼까.

    모르겠다.알 수 없어 하나씩 버렸다,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의 선을.그러자 하나, 둘.

    신기하게도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나는 어느새 카터 남작을 찾아 집어삼켰던 때처럼, 닥치는 대로 아가리를 벌렸다.허기가 졌다.무작정 뭉개는 것만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는데, 보다 보니 알게 되는 것이 있었다.순간의 폭력이 아니라 영원한 잠식은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나는 그 첫 실험을 나의 친애하는 주인님에게 바치기로 했다.다니엘 카터 남작이라는 이름 아래.*디에고의 시선이 애틋하게 비비안을 찾았다.

    자신이 따라온 피가 정말 비비안의 것이 맞는지.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그가 좀 더 가까이 걸음을 옮긴다.

    “…디에고.”

    작은 속삭임이 가 닿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손이 비비안의 팔을 움켜쥐었다.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아이는 여기서 죽어.”

    하얗게 질린 얼굴의 그녀가 남자의 손에 들려 축 늘어져 있는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방금 디에고가 이자를 다니엘 카터라 칭했다.그녀도 익히 알고 있던 이름.이리저리 방황하던 비비안의 시선이 곧바로 디에고에게 향했다.[보이죠, 각하?]비비안이 생각을 전해오자 디에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 그만 돌아가시지요.

    그녀가 무사하시길 바라신다면.”

    다니엘의 비열한 눈동자가 비비안과 디에고를 번갈아 눈짓했다.그러나 다니엘의 말은 디에고에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온통 비비안 주위로 떠오르는 말에 집중하느라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으니까.[하나 둘 셋 세면 검을 겨눠주세요.

    그럼 그때 제레미를 빼낼게요, 제가.]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왈칵 일그러진 얼굴의 디에고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 하자 비비안이 고개를 저었다.한 손에는 아이를,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을 잡고 있는 남자도 검을 마주하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어느 한 손은 놓아야겠지.완강한 거부의 의사를 온 얼굴로 전해오는 디에고의 모습에 더는 생각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되겠다 판단한 그녀가 멋대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하나.]디에고가 몸체를 낮추고 검 손잡이를 바로 잡았다.[둘.]뻗으면 닿을 수 있게끔 거리를 좁혔고.영문을 알 수 없던 다니엘의 무표정이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을 때.[셋.]

    “제길!”

    디에고가 거친 욕설과 함께 검을 들어 다니엘의 지척까지 뛰어올랐다.

    “이게 무슨!”

    당황한 다니엘이 제 얼굴이 검으로 뚫리기 직전 뒤로 물러나며 비비안을 붙든 손을 풀었다.그리고 그가 당황한 틈을 타 디에고가 뻗은 검 아래로 비비안이 몸을 숙인 채 힘껏 손을 뻗는다.꽉―제레미의 몸에 손이 닿자 그대로 몸을 욱여넣은 비비안이 있는 힘껏 두 손으로 아이를 붙들었다.

    “젠장!”

    짓씹듯 욕을 내뱉은 다니엘이 비비안의 머리채를 잡으려던 순간, 디에고의 검이 다시 한번 그의 목을 노렸다.반사적으로 뒤로 몸을 물린 다니엘이 휘청이는 찰나.그가 아이를 잡고 있던 팔에 힘을 줘 휘둘러 내쳤다.

    이내 다니엘의 몸짓에 있는 힘껏 제레미를 품으로 당기던 비비안이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쾅―

    “윽―”

    “비비안!”

    겨눴던 검을 물리고 비비안에게 달려간 디에고가 벽에 기댄 채 주저앉은 그녀를 살폈다.

    “망할!”

    숨을 헐떡이며 온 얼굴을 일그러뜨린 다니엘이 뒤편에서 허리춤에 걸린 검을 뽑아 들었다.

    “…디에고, 뒤에.”

    “…….”

    가만히 비비안의 손을 잡았다 놓은 디에고가 검을 다시 쥐었다.

    “너희가 검을 겨눌 사람은 내가 아니야.”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린 다니엘의 눈엔 이미 광기가 가득했다.

    사람의 눈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노예 따위를 거래한 건 내가 아니라 데이비드 후작이라고.”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지만,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 위협적인 디에고의 모습에 다니엘의 입이 바짝 말라왔다.그리고 눈으로 채 따라가지도 못한 사이 제 앞으로 휘둘러진 검에 의해 다니엘의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졌다.암살자와 같이 살아온 지난 세월이 아니었다면 지금 떨어져 나간 것은 자신의 목이 되었을 거란 걸 다니엘도 알았다.

    “…어째서.”

    가볍게 뒤로 뛰어오른 다니엘이 디에고와의 거리를 벌렸다.

    “짐승 같군.

    하는 짓도.”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 다니엘을 파고들었다.마치 물건, 지나가다 치이는 돌을 보는 듯한 그것에 가느다랗게 남아 있던 그의 이성이 끊어졌다.

    “틀린 말은 아닌데.”

    다니엘이 짙게 웃었다.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삶인데, 사람답게 살 필요가 있을까.”

    괜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설핏 미간을 구긴 디에고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다니엘의 앞에 검을 꽂아 넣었다.

    “윽.”

    “개소리를 다양하게도 하네.”

    간신히 검으로 그를 받아내었으나 아무런 힘도 가하지 않은 듯 편안한 디에고의 표정과 달리 다니엘의 얼굴에는 여유가 없었다.끼기긱―검날끼리 부딪히며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끝내 버티지 못한 다니엘이 또다시 뒤로 물러선다.

    그러나 이번에는 검을 고쳐 잡을 시간마저 주어지지 않았다.벽에 부딪힌 다니엘의 목 위로 곧게 그려지는 붉은 실선.디에고의 검이 당장이라도 그의 목뼈를 드러내고 싶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흐으.”

    앓는 소리를 내는 다니엘이 옅은 반항이라도 해보려 움찔했으나 그에게 드리운 검날은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람대접이라고 했나.”

    어느새 방울방울 붉은 동그라미가 솟아나는 목에서 얼굴로 시선을 옮긴 디에고가 낮은 소리로 되물었다.

    “웃기는군.”

    조소와 함께 디에고의 눈에 미약한 분노가 치밀었다.

    “누구나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맞닥뜨리지.”

    작든 크든, 산다는 것은 그런 시험과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남는 자들이 사람대접을 받는 거다.”

    스윽―부드러이 디에고의 검이 다니엘의 목을 스쳐 바닥을 향했다.

    “으윽―”

    “그러니까 같잖은 합리화는 치워.

    지금 네 모습은 그저 네 선택일 뿐이다.”

    주륵 피가 흐르는 목을 두 손으로 쥔 다니엘의 눈이 처음으로 공포에 젖어들었다.더 이상 그 어떤 힘도 남지 않은 듯한 그를 뒤로하고 디에고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제레미를 꼭 안은 채 벽에 기대어 있는 비비안.캉―검을 놓은 디에고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이 붉게 물든 비비안의 팔을 더듬었다.눈가를 찡그린 비비안이 이를 악물었다.

    “…그건 제가 낸 상처예요.

    뭔가 단서를 남겨둬야 할 것 같아서.”

    조심스레 팔을 내려둔 그가 이번엔 그녀의 곳곳을 세심하게 살폈다.

    “각하, 디에고.”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보이는 디에고를 비비안이 다정하게 불렀다.그제야 고개를 든 그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싼다.

    “…미안해.”

    더없이 큰 죄를 지은 듯한 사람의 표정,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비비안의 마음을 쓰리게 했다.

    “아니야.

    이번엔 제가 각하 막 가보라고 등 떠밀어서, 그래서 생긴 일인걸요.”

    시무룩하게 눈꼬리를 내린 그녀를 시야 가득 담고 있던 그가 조심스레 눈가를 쓸었다.

    “주군!”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비비안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린 디에고가 뒤를 돌아보았다.제랄드를 비롯한 서넛의 기사들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피가 흐른 것으로 추정되는 붉게 물든 드레스, 어딘가 아픈 것이 분명해 보이는 비비안의 모습을 발견한 제랄드가 헛숨을 들이켰다.그리고 그 앞에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아 보이는 눈을 한 제 주군까지 확인한 그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늦었군.”

    그랬다.

    늦어도 너무 늦은 듯싶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그들을 무감한 시선으로 훑은 디에고가 비비안 품에 안겨 있는 제레미를 빼들었다.

    “받아.”

    얼떨떨해하는 기사에게 아이를 맡긴 그가 비비안을 안아들었다.

    “제랄드, 뒤를 부탁한다.”

    “…예.”

    한없이 가라앉은 제 주군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리자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윈데이너 영애가 보였다.걸음을 옮기는 주군의 뒷모습을 확인한 제랄드가 기사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 뜻을 알아챈 기사가 빠르게 디에고와 비비안을 태울 마차를 준비하러 자리를 떴다.

    “…이 버러지같이 꿈틀대는 게, 여태 저 잘난 줄 알고 설쳐댄 그놈이라는 거지.”

    파랗게 질린 입술, 쉴 새 없이 바들대는 눈가.앞섶이 피로 흠뻑 젖은 다니엘 카터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그 앞을 가로막은 제랄드가 다리를 굽혀 앉았다.

    빙긋이 웃은 그가 다니엘의 턱을 들어 올린다.

    “넌 곱게는 못 죽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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