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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15화 (15/109)

15화

방으로 들어와 잠시 두리번거리던 대공이 소파로 향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찬 기운이 감돌았다.제집처럼 편해 보이는 그를 보자 착잡했다.

황당함과 억울함이 세차게 밀려왔다.

명색이 후작가가 이렇게 쉽게 뚫려도 되는 거야?

“잘 지냈어?”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째려보는 나를 가뿐히 무시한 그가 산뜻하게 물었다.

“…네, 각하는요?”

“나는 그다지.”

눈을 맞추고 보니 대공의 얼굴이 조금 수척해진 것 같다.느긋하게 턱을 괴고 웃는 얼굴이 잘생겼다.

여전하구나, 네 얼굴.

‘아, 이런 거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수도에는 언제 오신 거예요?”

“방금.”

그럼 네 집으로 가야지.

이 야심한 밤에 여기는 왜 와, 대체.

대공이면 이래도 되는 거야?

“어쩐지 참을 수가 없어서, 비비안이 보고 싶더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대공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확실하다.

정작 뱉은 사람은 저렇게 멀쩡한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거지?

“…그러셨구나.

수도 저택엔?”

“가야지.”

언제? 지금 가야지 않겠니.

이 시간에 네가 여기 있을 일이냐고.대공의 입매가 나른하게 풀렸다.

살짝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깜빡이는 그에게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비안, 내가 네 마음 보는 거 잊은 건가?”

내리깐 눈으로 나를 보는 그가 짐짓 위협하는 듯 보였지만 정작 장난기가 듬뿍 묻은 목소리 덕에 무섭지 않았다.

“…황족 모독죄, 뭐 그런 거 씌우실 건가요?”

“풋.”

나는 기다랗고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으로 제 눈가를 덮은 대공을 빤히 봤다.

‘후, 차라리 눈을 감을까.’

자꾸만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이 큰일이다.시선이 그의 콧대를 따라 요사스럽게 올라간 입꼬리를 지나쳐 목을 타고 내려가다 결국 몸의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야해.”

잠긴 듯 탁한 목소리와 함께 그가 곁눈질로 나를 봤다.

“지금 제게 하신 말씀이세요?”

“응.

싫진 않은데 지금은 좀 곤란해서 말이야.”

“…각하, 쳐다보지 않으면 마음도 안 보인다고 하셨죠?”

답지 않게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나는 엄한 목소리로 청했다.

“그럼 제게서 시선 좀 돌려주시죠.”

내가 지금 말도 못 하게 창피하고 또 어떤 발칙한 생각을 할지, 스스로가 미덥지 못하거든?내 강경한 눈빛에 담긴 간절함을 포착했는지 대공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주었다.와, 못 살겠다.

수치스러워서 울고 싶은 건 처음이었다.

아니다, 대공을 만난 이후로 이런 순간이 일상이 돼가는 것 같았다.

‘…내가 원래 이렇게 밝혔나?’

“비비안.”

나직이 울리는 그의 부름이 마치 호수 위에 던져진 돌처럼 느껴졌다.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어째서 마음에서 번져 나가는 걸까.

“…….”

“같은 눈으로 봐줘서 고마워.

사실 조금 두려웠거든.”

긴장한 듯한 그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대는 내가 처음으로 이 비밀을 나눈 사람이라.”

안다.

발코니 창을 사이에 두고 바라본 그의 얼굴이 웃고 있음에도 불안해 보여서, 그래서 문을 열었는지 모른다.열어 달라던 게 단순한 문이 아닌 것만 같아서.대공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줄 수는 없을지언정 오늘, 그를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각하는 제게 여전히 성가신 분이세요.”

살짝 고개를 틀어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가 고집스레 눈을 맞춰왔다.

“그래.

여전히 성가시다 여겨줘서 고맙군.

난 아예 눈을 돌릴까 봐 걱정이었는데.”

“제 방 발코니에 떡하니 계신데, 어떻게 안 볼 수 있겠어요.”

난데없이 들이닥쳐서 한가득 시야를 채운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웃음이 헤픈 대공답게 역시나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그가 한결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 앞에서만 웃음이 헤픈 거니 그 점, 오해 없었으면 좋겠어.”

저렇게 내가 내뱉지 않은 속마음을 읽고 혼자 소리 내 답해주는 그가 야속하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

예, 저도 좀 자야 할 시간이죠.

이렇게 손님을 맞이할 때는 아닌 것 같네요.

“가시게요?”

너무 들뜬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 같지만 괜찮다.

“…가지 말까?”

무슨 소리세요.

왜 그래, 나는 피곤한데.

살짝 항의의 뜻을 담아 눈꼬리를 내리고 그를 바라봤다.

좀 봐주라.

“가서 주무셔요.

각하도 피곤하시죠?”

“딱히.

오히려 그대를 보니 피곤이 가시는군.”

이젠 보기만 해도 얄미운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밉살맞은 감정과는 별개로 볼 때마다 새로울 정도로 예쁘긴 했다.

“…제가 너무 졸려요, 각하.”

불쑥 다가온 그의 얼굴과 따듯한 눈길이 나를 향했다.

“그러게, 그만 재워야겠네.”

어느새 일어난 그가 스치듯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멀어졌다.

“잘 자, 비비안.”

순식간에 발코니로 나간 그가 손을 흔들었다.

훌쩍 발코니 아래로 뛰어내리는 모습이 과하게 멋졌다.

저럴 일인가.어쩐지 열이 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오늘 밤 잠은 다 잔 것 같다.*

“마리, 떨리면 사랑인가.”

시간은 가차 없이 흘러 어느덧 사냥 대회 당일이 되었다.

머리 빗질에 열 올리는 마리가 날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글쎄요.

그렇지 않을까요?”

“전하를 봐도 떨리고 스텔라를 만나도 떨리고.”

하다못해 좀 생긴 기사만 봐도 가슴 떨리던데.

“그게 사랑이면 난 대체 얼마나 가벼운 사람인 거지?”

“왜 대공 각하는 빼세요? 보아하니 요새 아가씨를 가장 떨리게 하는 분이 그분 아닌가요?”

대공은, 대공은, 걔는!마리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

그 앞에 서면 발가벗은 기분인데 안 떨리면 그게 정상이야?

“떨림이 다는 아니겠지?”

“뭐, 그야 그렇겠죠.”

이 분야에서 마리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아니, 내가 사랑을 해봤어야지.

그 흔한 첫사랑도 아직인데.깔끔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가 찰랑이며 등을 쓸었다.

“그나저나 오늘 아가씨 의상 정말 멋져요.”

세를린이 두문불출하고 영혼을 갈아 넣었다던 승마복은 이미 옷의 경지를 넘어선 듯했다.

“이래서 다들 세를린, 세를린 하나 봐.”

“이번에 아가씨 옷 제작하느라 예약도 안 받았다고 하던데요.”

아, 그건 좀.

나 때문이라고 소문났대? 이렇게 또 적이 늘어나나요.살짝 침울해지던 마음이 거울을 보자 화창하게 갰다.

결과물이 이렇게 멋지면 어쩔 수 없지.

“아가씨!”

다급하게 열린 문으로 헐레벌떡 달려온 하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 황태자 전하께서!”

“전하?”

“지금 저택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리안이 우리 집에? 지금? 이게 또 무슨 일이야.

“금방 갈 테니 응접실로 모셔.”

오늘따라 응접실로 향하는 복도가 짧게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마음을 가다듬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창가에 서 있는 황태자가 뒤돌아본다.

“전하.”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갔다.

“아, 승마복 입은 것은 처음 보여 드리는 건가요.

어때요?”

좀 멋지죠?장난스러운 미소를 걸친 채 한 바퀴 돌아보자 그제야 리안의 얼굴에 여유로운 웃음이 번진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매번 사냥 대회에 참석할 때조차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갔지만 이제 관두기로 했다.이쯤 되면 내가 옷 좀 다르게 입는다고 내 병약함을 의심할 사람도 없을 것 같고.

뱃놀이 때 쓰러진 보람이 있어, 이렇게라도 그날 내가 입은 피해를 마음에서 지워본다.

“잘 어울려, 비비안.”

어설프게 엄지를 들어 올리는 황태자의 모습에 그만 소리 내 웃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그대를 에스코트할까 해서.

내가 그래도 될까?”

깔끔하게 넘긴 머리 때문일까, 오늘따라 유독 더 단정하고 말끔한 모습의 황태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요.

제가 영광이지요.”

황태자와 함께 마차에 오르자 어쩐지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며칠 전에는 사촌 형이 야밤에 쳐들어오더니 오늘은 대낮에 사촌 동생이 쳐들어오고.황족들, 요새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얘네는 먼저 미리 기별 좀 넣어주는, 뭐 그런 거 왜 안 하는 거야.어쩐지 생각할수록 다들 괘씸했다.쿵―

“전하?”

갑자기 황태자가 마차 창에 머리를 갖다 박더니 눈을 감았다.저게 무슨 짓이야.

“…미안, 나답지 않았어.”

미간을 찡그린 그가 여전히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애처롭게 내 눈을 바라본다.

“초조해지는 바람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한 그가 곧이어 마차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황태자 성정에 아마 자책하는 거 같은데.

지금 그가 벌인 일을 내가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 여겨서 저러는 것 같다.

“어릴 적에는 종종 오셨잖아요.

저와 한참을 놀아주셨죠.

그때 제가 따로 다른 이들과 교류가 없어서 전하가 무척 위로가 되었는데.”

지금도 막 친우가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랬나.”

“전하는 제 첫 친우세요.”

나는 느리게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언제 저렇게 다 컸담! 어릴 적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새삼 그의 성장이 놀라웠다.그때도 꼬마 주제에 청순하고 처연하더니, 지금은 더했다.

“내게 그대는, 첫 친우는 아닌데.”

그래도 한 열 번째 친구 정도는 되지 않겠니? 누구 닮아서 저렇게 빈말도 할 줄 모르는지!

“뭐, 순서가 중요한가요.

제가 영원히 전하의 친구가 되어 드릴게요.”

그와 눈을 맞춘 나는 확신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믿지? 나, 우리 믿지?오늘도 나는 황가에 대한 충심을 표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런 건 틈날 때마다 해주는 게 좋지.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리안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의 다 왔군.”

하나둘 마차에서 내리기 시작하는 귀족들이 보였다.새삼스럽게.내 뜻과 상관없이 존재 자체가 상징성을 지니는 것에는 이골이 났다.오해와 곡해 없이 온전히 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서러움에 숨죽여 울던 일도 관둔 지 오래다.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게 언제였더라.그러니 이렇게 황태자의 옆에 서 나란히 등장하는 일쯤이야 별일도 아닌데.

샅샅이 뜯어보겠다며 자신들의 입맛대로 나를 해부할 그 시선들도 이제 아프지 않다 여겼는데 말이다.그런데 리안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는 이 순간.어째서 대공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그리고 눈을 들었을 때, 왜 제일 먼저 내 눈에 가득 담기는 것이 삐뚜름하게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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