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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14화 (14/109)

14화

*

“…정말 변함이 없으시군요.”

제국 내 제일가는 부티크의 주인 세를린이 커튼에 바짝 귀를 대고 있는 비비안을 바라봤다.

“저택으로 부르시면 찾아뵈었을 텐데 어찌.”

“세를린, 여길 와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듣지.”

비비안이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댄 채 속삭였다.주인과 시녀가 쌍으로 커튼에 얼굴을 붙이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며 세를린이 속으로 혀를 찼다.

‘수많은 귀족을 봐왔지만, 얘네는 진짜 다르다.’

쟤들이 부티크에 옷 보러온 걸까, 여기가 정보상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 아닐까.허리까지 내린 결 좋은 분홍 머리와 초롱초롱하게 뜬 보랏빛 눈을 보며 결국 세를린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특이한 분이지만 누구보다 제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사랑스러운 영애를 볼 수 있다면야 좀처럼 이해 안 되는 행동 좀 하는 게 대수겠나.

“…조만간 황궁에서 개최하는 사냥 대회, 입고 갈 의상 보실 거죠?”

“응응.

세를린 안목은 탁월하니까, 그대가 골라주면 고맙겠어.”

세를린 부티크는 총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1층은 모두가 둘러볼 수 있도록 했으나, 2층부터는 소수의 인원만이 이용할 수 있다.

2층에는 다섯 개로 구분된 공간을 예약제로 운영하고, 3층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귀족을 위해 하루 단 두 번의 예약만 받는다.그러나 이곳의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은 3층 한쪽의 가려진 이 방이다.

커튼으로 항시 가려진 여기는 황족 혹은 세를린의 기준에 부합하는 몇몇 가문을 위한 장소로 따로 예약하지 않고 언제든 그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그리 정할 수 있었던 것도 그분들은 직접 가게까지 행차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상황을 염두해 준비한 공간인데.

‘이건 거의 뭐,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 개인 공간이 따로 없네.’

“무언가 신나는 일이라도 있나 봐?”

“어제 데이비드 후작님이 저택에 오셨었거든.”

“오호, 영애를 보러?”

세를린은 오늘 3층의 예약 손님, 비오첼라 영애와 벤젤 영애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는 두 다람쥐를 보았다.

“뭐,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지만, 날 보러왔다기에는 부끄러웠던 것 아니겠어? 그 후에는 나와 단둘이 티타임도 가졌으니까.”

“아, 퍽 좋았나 보네.

그런데 너, 요새 각하가 좋다고 하지 않았어?”

“사브리나,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데 두루두루 살펴야지, 안 그래?”

두 영애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퍼지고 뒤이어 데이비드 후작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자 비비안과 그 시녀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흥미를 잃은 듯 보이는 비비안의 맞은편에 세를린이 자리했다.

“쓸 만한 정보는 얻으셨는지요.”

“그다지, 그래도 이곳만 한 데가 없어.

웬만한 살롱보다 은밀하니 해도 될 말, 안 될 말 구분 못 하고 발설하는 이들이 많잖아.”

세를린 덕분에 매번 유용한 정보를 받아가니 고마울 따름이라며 선하게 웃는 비비안의 모습에 그녀도 따라 웃었다.

“예, 이 일 또한 발설되면 제 목이 날아가겠지만요.”

“에이, 내가 또 그대 위험할 만한 일을 벌이겠나?”

그래.

그 웃는 얼굴에 약한 내 탓이지, 내 탓이야.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의 미소를 보고 있자면 뭐든 해주고 싶어지는 세를린이었다.

“사냥 대회, 승마복으로 하시겠어요?”

“응.

다들 비웃기야 하겠지만 그게 더 자리에 맞는 복장 아니겠어?”

“그럴 리가요.

영애만큼 승마복이 잘 어울리는 이가 또 있을까요.

제가 이미 여러 벌 제작하지 않았습니까.”

처음 그녀가 자신의 가게를 찾아왔을 때만 해도 이런 관계가 될 줄은 몰랐건만.

매번 저택으로 부르지 않고 가게를 찾는 귀족 영애가 부담스러워지던 찰나, 비비안이 승마복을 의뢰했다.제국 내에서 허약하기로 유명한 영애의 주문이니만큼 의아했으나 귀족들 생각이야 내가 알겠나, 하고 만들면 그만이었다.그저 평상시에 입지 못하는 색다른 옷을 원하나 보다 하고 제작해 선보였을 뿐인 그날, 자신은 그녀에게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 이거 미안하네.

이렇게 멋진 옷을 만들어줬는데 나만 봐야 한다니.그 꾸밈없는 칭찬과 말간 미소, 더불어 그 이후에도 이어지던 비비안과의 시간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세를린이 만들어준 옷이 가장 편하고 예쁘거든.

승마할 때마다 잘 입고 있어.”

후작가 소유의 숲에서 아무도 모르게 승마를 즐긴다며 한쪽 눈을 찡긋하던 어여쁜 소녀.자신의 작은 비밀 하나를 내보여 신뢰를 표해준 비비안을 위해 이 작은 방 하나 내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언젠가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이 오면 영광이겠어요.”

잠시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던 비비안이 장난기를 담아 웃었다.

“다음에 후작가의 숲으로 초대하지.

나도 매번 그대의 역작을 마리와 말에게만 선보이는 게 아쉬운 참이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세를린이 멍하니 비비안을 바라보다 이내 소리 내 웃었다.

“이번 여름 사냥 대회에서 누구도 승마복 입은 영애를 비웃지 못할 겁니다.

아마 보자마자 다들 감탄하기 바쁠 테니까요.”

의욕에 불타는 그녀를 보던 비비안이 동그랗게 눈을 뜨며 미소 지었다.

“세를린이 그렇게까지 말하다니 엄청 기대된다.”

*

“영애, 사냥 대회 참석하시나요?”

노을이 무척 잘 어울리는 스텔라가 물었다.황궁 뱃놀이 사건을 계기로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앞에 앉은 스텔라일 것이다.

나는 그날 참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얻었다.감사를 표한다는 구실로 서신과 함께 만남을 종용한 덕에 스텔라는 아주 가끔 나와 자리를 함께해 주었다.

“그럴 생각인데, 영애도 참석하시죠?”

“예, 그렇다면 그날이 좋겠군요.”

여전히 탐스러운 붉은 머리를 옆으로 땋아 내린 스텔라가 차를 한 모금 하고 내려놓았다.

얘는 어쩜 저렇게 우아할까.내내 구질구질하게 매달린 보람이 있었다.

“무엇이요?”

“아닙니다.

그보다 영애, 저번에 저와 친해지고 싶다 하셨던 말, 아직 유효한가요?”

암요! 내가 이렇게 질척대는 거 보고도 모르겠어? 비위 맞춘답시고 허투루 말을 내뱉기보다 침묵을 선택하는 스텔라가 좋았다.

여태 친우라고는 마리뿐인 내게 그녀는 탐나는 사람이었다.

“그럼요.

게다가 영애께 폐만 끼쳤는걸요.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기꺼이 응하고 싶군요.”

스텔라가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 주위로 붉은 꽃잎이 흩날리는 것만 같다.

‘와, 너무 예뻐!’

“그것참, 든든하군요.”

눈까지 휘며 한층 더 입꼬리를 말아 올린 스텔라를 보자 갑자기 등골이 찌르르 울렸다.

‘…날이 좀 쌀쌀한가?’

“각하도 필히 오실 것 같은데, 그날도 그분을 피할 요량이신가요?”

네 생각에도 걔, 거기 올 것 같니? 씁쓸해졌다.

작년 사냥 대회 때 대공이 왔었던가.

기억이 안 나네.

“…오실까요?”

아주 산뜻하고 단호하게 스텔라의 고개가 끄덕여졌다.내게는 그를 피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

그때까지 생각 안 하는 연습이라도 해야 하나.

내 인생은 왜 갈수록 더 고단해지는 걸까.사냥 대회는 황제가 주최하는 행사인지라 웬만한 이유가 아니고서 불참하기 어렵다.

윈데이너 후작가의 일원으로서 황가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에는 주저 없이 앞장서는 게 우리 일이기도 하고.

“저와 함께하시지요.

그런다고 각하가 영애 곁으로 안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둘만 있는 것보다야 셋이 낫지 않겠습니까.”

라며 무심히 말하는 스텔라의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다.천사인가? 힘겨운 내 삶에 한 줄기 빛인가!

“영애, 그동안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죠?”

내 호들갑과 잔망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스텔라는 그저 찻잔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저 담담함도 매력이지.

몇 번 티타임을 함께하며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스텔라는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난리를 치건 장난을 치건 울적해하건, 저 여인은 언제나 호로록 차를 마시고 제 할 말을 할 뿐이다.그래서 더 이것저것 시도해 봤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그럼 그리 알고 이만 가볼게요.

시간이 꽤 지났군요.”

아, 언니.

벌써 가?

“다음엔 언제 볼까요, 영애?”

잽싸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스텔라를 올려다보며 말하자 그녀가 싱긋 웃었다.

“사냥 대회가 되지 않겠어요?”

차갑디차갑다.

사냥 대회 전까지 만나주지 않겠다는 거구나.그렇게 스텔라를 배웅하고 마리와 성대하게 저녁을 먹은 후 침대에 누웠다.

무탈한 하루를 돌아보자 마음이 푸근해진다.

“오늘만 같으면 얼마나 좋아.”

평화로웠다, 아주.예정된 행사를 떠올리면 오던 잠도 달아날 판이지만 잠시 한구석으로 밀어뒀다.

‘스텔라 옆에 찰싹 붙어 있어야지.’

그러나 역시 고민과 걱정은 미뤄둔다고 미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풀리지 않는 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한 가지를 반복적으로 생각하면 다른 건 안 보이지 않을까?”

정원에서 그의 비밀을 나눈 이후로 틈만 나면 대공 앞에서 했던 내 생각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혔다.

이제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수치스러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다.

“얼굴도 두껍지.

내가 그렇게 잘생겼다고 난리를 쳤는데 어떻게 그리 태연할 수 있지?”

나는 절로 힘이 들어간 입술을 말아 물었다.적당히 할걸.

볼 때마다 외모 찬양을 얼마나 했던가!똑똑―그때 톡톡톡, 창가에서 소리가 들렸다.

비가 오나?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점점 더 커졌다.이건… 비 아닌데?벌떡 일어나 발코니 커튼을 젖혔다.

“허!”

“안녕, 비비안.”

“각하가 왜……?”

대공이 눈을 휘며 웃었다.

“들어가도 될까?”

어디를 들어와.

나 지금 꿈꾸나? 쟤가 여기 왜 있어.당황한 나는 발코니 창을 사이에 두고 하염없이 그를 바라만 봤다.

깜깜한 밤하늘 아래 달빛을 받아 요요히 빛나는 그가 내 방 발코니에 서 있었다.말이 되는 건가, 지금.멍하니 눈을 껌뻑이며 대공을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열어주면 안 될까?”

아, 안 되는데.안 되는데, 정말.

이건 아닌데.하지만 발코니 문손잡이에 얹어진 내 손이 또 나를 배신하고 앞서 행동했다.

“…들어오세요.”

옆으로 비키자 대공이 성큼 발을 디뎠다.발을 뻗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들어오지 말라 해도 들어왔겠다.그렇게 야밤에 맹수 한 마리가 침입했다.

몹시 울적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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