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머리가 아팠다.황태자와 함께 등장하자마자 각 가문의 귀부인들과 영애들의 부채 펴지는 소리가 연이었다.
나는 무슨 새들이 단체로 날아오른 줄 알았네.푸드득, 푸드득―대공까지 다가오면 숨이 막힐 것 같아 그에게 얼마나 경고를 날렸던가.
불만 가득해 보이던 이가 끝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눈을 돌렸을 때, 그제야 어깨에 힘을 뺄 수 있었다.
“…영애를 잘 모르겠네요.
실은 주목받는 것을 즐기시는 겁니까.”
스텔라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면목이 없다.
눈이 마주치자 코웃음을 치고 돌아서는 스텔라의 소매를 붙잡고 늘어지기를 수 초.
간신히 그녀를 내 옆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영애, 권력이란 참 무서운 것이어요.
그렇죠?”
너라면 집으로 찾아온 황태자, 문전 박대할 수 있겠니?
“그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영애가 훨씬 무섭군요.”
오른손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앞을 가리키는 스텔라의 손짓에 단호함이 깃들었다.
“두 분의 시선 덕에 아주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설명 좀 해볼래? 라는 뜻이 그녀의 눈에 담겨 있었다.
그게 가능하면 누군가 나한테도 이 상황을 설명해 주면 좋으련만.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함께 서 있는 제국의 미래들을 보았다.
둘이 같이 있자 존재감이 대단해서 주위 귀족들의 이목구비가 흩날려 보였다.
‘나 좀 그만 쳐다봐, 제발.’
대공이 이번만큼은 내 마음을 확실하게 읽어주기를 바라며 속으로 소리쳤다.황태자는 그래도 사리 분별이 되는 사람이었다.
리안은 슬쩍슬쩍 시선을 주기는 했지만 대놓고 날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에 반해 너어는! 너는 정말!’
내가 지금 잘못 본 건가.
대공이 입술을 달싹이며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전했다.
‘뭐 해줄 건데.’
“뭐?”
기가 막힌다.
쟤는 기회주의자인가, 야비하기도 하지.
제국의 하나뿐인 대공이 한낱 영애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기사도 어디 갔어, 너 검 좀 휘두른다며.뻔히 내 생각을 다 보았을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나를 이 수렁에서 구해준 것은 뜻밖에도 평소에는 하등 도움 안 되는 황제였다.
그가 대회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사냥터에 당도했다.*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사냥 대회가 이루어지는 숲의 입구, 황태자에게 다가온 디에고가 속삭였다.
대공의 흑마와 황태자의 백마가 나란히 선 채 그 주인들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비비안이 원치 않는 일은 하지 말라던 말씀 말입니다.”
리안의 표정이 일순간 흐트러졌다.
“오늘 이 자리에 전하와 함께 등장하는 것을 그녀가 원했던가요?”
윈데이너 후작 영애를 자신만이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 10년의 세월 동안 고작 그런 작은 것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대공께 질책을 들을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질책? 그거 아닙니다.”
저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어두운 감정을 무표정 아래 감춘 황태자가 고개를 돌려 대공을 바라봤다.
“전에 새겨듣겠다 했지만, 저도 꽤나 멋대로 행동하고 있으니.
전하도 그리되신 것 같아 동질감을 느꼈을 뿐이지요.”
시원하게 올라가는 디에고의 입매를 본 리안의 시선이 이윽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으로 향했다.
“비비안을 상처 입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비비안이 원하는 건 사랑과 평화니까.”
장난스레 웃는 디에고를 보며 저런 실없는 소리도 하는구나, 싶던 리안의 표정이 결국 허물어졌다.
“그걸 형님이 어찌 아십니까.”
허탈한 듯 툭 내뱉은 리안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비밀입니다.”
애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리안이 다시금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도 그와 같은 표정을 스스럼없이 지을 때가 있었다고 생각한 황태자의 얼굴에 후회가 깃들었다.그건 비비안과 계속 함께하고 싶다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던 그 미소였다.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몸조심하시지요, 전하.”
고개를 끄덕여 보인 황태자가 일행을 이끌고 숲 안쪽으로 들어섰다.황태자의 뒷모습을 보던 대공이 옅은 한숨을 내뱉는다.
“…건드린다고 그렇게 바로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
황태자가 사냥 대회에 비비안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뜻밖이었다.
후작가까지 직접 행차했을 줄이야.10년이나 참아왔으면서 벌써 이렇게 고삐가 풀린다고?저건 참은 게 아니라 비비안 주위로 그럴싸한 녀석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넘어갔던 것이리라.
‘좀 더 참아라, 리안.’
디에고가 고심하듯 눈매를 찌푸렸다.
“아직 비비안 마음 못 얻었는데.
금발, 금발이라.”
비비안 방에 자리한 대작, 태피스트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였다.
저는 금발도 적발도 아닌데, 가만 보니 비비안이 호감을 보이는 자들이 그 색을 지니고 있었다.황태자, 마이어 백작 영애.
“각하, 사냥 안 가십니까?”
대공이 심각한 표정으로 혼자 중얼대는 것을 한참 보던 콘라드가 결국 말을 걸었다.
“…가야지.”
대공령에 박혀 수도에서 행하는 모든 행사를 빠지던 그가 요즘은 틈만 나면 영지를 벗어나 수도로 달려오는 것이 수상하다 여긴 콘라드다.
‘수상하긴.
너무 뻔히 보여서 수상할 것도 없지.’
“그리 영애가 좋으십니까.”
어느새 그의 눈에서 존경심은 사라지고, 한껏 열에 들뜬 소년을 보는 한심한 눈초리만이 디에고를 향했다.그래도 아직 멋쩍음을 아는 것인지 대공이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티가 나나.”
‘설마 지금 수줍어하는 거야?’
잔뜩 찌푸린 콘라드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재빨리 불손한 생각을 지운 그가 말을 이었다.
“숨기신 거 아니잖습니까.”
세상 사람들 다 알아달라고 그리 설치고 다닌 것 아닌가.
여태 제 상관의 완벽함을 의심한 적 없던 콘라드는 혼란스러웠다.마치 전혀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대공이 맥이 풀린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러니 비비안이 화낼 만하군.”
마차에서 황태자의 손을 붙들고 내린 비비안을 보자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몰아쳤다.
불안, 초조, 시기.
그 낯설고 질척한 감정에 속수무책으로 잠겨 들었다.그러나 이내 비비안과 맞닿은 시선이 기껍고 기꺼워서,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여기는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그녀가 그 맑고 어여쁜 눈으로 나를 바라봐 주었으면 된 거지.
‘비비안 손바닥 위였나.’
“적당히 하고 돌아가야겠어.”
휘잉―대공의 손을 떠난 화살이 짐승의 목을 관통했다.
“여기 무슨 재미가 있는지 모르겠군.”
사냥감을 추스르는 시종을 한 번 보고 말을 돌려 더 안쪽으로 향하는 그에게 콘라드가 바짝 다가왔다.
“각하, 백작 영애 측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은밀한 그의 전언에 디에고의 표정이 굳었다.
“…비비안은?”
“가까이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가지.”
말의 고삐를 튼 대공이 콘라드의 안내를 따라 숲을 가로질렀다.
【 닿으면 보이지 않는 마음 】
“그러니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가능한가, 영애?”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대공이 제 한쪽 눈썹을 문지르며 황당함을 표했다.삐딱하게 서 있는 스텔라와 그 옆에 쓰러져 있는 이름 모를 사내 하나.
무엇보다.
“…비비안, 그만 나와.”
덤불 뒤에 웅크리고 앉아 이곳을 살피고 있는 분홍색 토끼까지.스르륵 일어선 비비안을 보는 대공과 스텔라의 눈에 놀라움이 없었다.
여기서 놀란 척이라도 해주는 건 그나마 콘라드였다.디에고가 이리 오라는 손짓을 하자 주춤대던 비비안이 걸어 나온다.그들 사이에 선 비비안이 여기저기 바삐 동공을 움직이며 상황을 살폈다.
산책이라도 하자던 스텔라의 말에 호기롭게 숲으로 들어섰고, 잠시 쉬고 있으라던 그녀의 말에 쉬었을 뿐인데.인기척에 몇 발짝 움직였다가 사람을 치는 스텔라를 목격했으나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뭐, 사람 좀 칠 수 있지.
그러나 이유가 뭘까, 온갖 추측을 하던 중 설상가상 대공까지 들이닥쳐 지금에 이르렀다.
“안녕하십니까, 영애.”
“으악.”
이 와중에 언제 슬금슬금 곁으로 왔는지 비비안을 화들짝 놀라게 한 콘라드가 디에고의 눈총을 받았다.
“콘라드, 떨어져.
비비안은 툭하면 놀라거든.”
그 꼴을 더 보고 있기 지루해진 스텔라가 손가락을 튕기자 나무 위에서 두 사람이 떨어졌다.
“악!”
왜 아무도 이 상황에 놀라지 않는지, 자기만 쉴 새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비명을 지르는 것이 억울한 비비안이었다.디에고가 그녀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스텔라를 차갑게 바라본다.그런 그들 뒤로 드디어 잡았다는 표정의 콘라드를 보자 스텔라의 얼굴에 비웃음이 들어찼다.
“들킨 것이 아니라 제가 보인 것입니다.”
바닥에 널브러진 검은 복면의 두 사내를 훑은 그녀의 눈썹이 꿈틀댔다.
“각하가 붙여놓은 것들이 슬슬 성가시기도 하고.
공들여 살핀 결과, 이편이 이득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득이라.”
늑대의 이빨은 두려워도 목줄이 매인 늑대는 그 주인만 잘 구슬리면 오히려 쓸 만하다 판단한 스텔라다.그리고 그 늑대의 목줄을 쥔 비비안과 눈을 맞춘 그녀가 화사하게 웃었다.
“영애, 저에 대해 더 알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 미소에 홀린 듯 비비안의 고개가 세차게 끄덕여졌다.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무섭기도 한데 그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한참 앞섰다.절로 한 발짝 스텔라로 향하는 비비안을 은근 막아선 대공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그대가 보이려는 것이 뭐지.”
“아, 각하.
제가 보낸 소개서는 잘 받으셨는지요?”
“소개서?”
“레사에 의뢰한 건 말입니다.
저를 털어보겠다고.”
디에고가 자신의 이마를 문지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대인가?”
“예, 제가 레사의 주인입니다.”
레사, 제국 내 숨겨진 꽤 규모가 큰 단체로 온갖 정보를 취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국의 꼭대기부터 가장 낮은 곳까지 긁어모을 수 있는 것은 다 쓸어 모으니, 돈만 있다면 이 모든 것을 쥘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유혹이었다.
“레사……? 스텔라, 레사……?”
잔뜩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비비안을 보고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한 웃음을 흘렸다.
‘와, 나 레사 아는데! 거기 주인이 스텔라라고?’
비비안의 동공이 풍랑에 흔들리는 깃과 다름없었다.
‘…언니, 진짜 끌린다.’
그녀의 주위가
‘언니, 멋져.’
를 비롯해 온통 스텔라에 대한 감정으로 넘실댔다.그 휘황찬란한 내면을 실시간으로 보던 디에고의 수심이 깊어진다.
‘후, 적발.
적발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