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9화 (9/109)

9화

인상을 쓴 채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 대공의 모습은 소문 그대로였다.사람한테 살갑게 굴지 않는 한 마리 늑대, 아주 자기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짜증이 여지없이 느껴지는 짐승 그 자체다.그에게 다가가고 싶어 슬쩍 움직이던 귀족들이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늑대는 늑대인데, 한 마리는 왜 자꾸 빼먹는 거지, 저 인간?’

나는 혹여나 눈이 마주칠까 봐 스텔라의 머리칼 뒤로 숨어보려 애썼다.

“영애, 뭐 하십니까.”

마치 하찮은 것을 본다는 듯한 스텔라의 눈빛을 마주하며 나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역시 솔직함이 매력인가 보다, 이 영애.다시 대공의 동태를 살피려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 같은데, 이쪽으로 오는 거 아니지?나는 다급하게 스텔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영애, 시간 괜찮으면 저랑 배 타고 호수 한 번 돌죠.”

스텔라는 영 탐탁지 않다는 듯 대답을 회피했다.

내게 붙잡힌 손도 빼내려는 게 느껴졌다.하나 나는 지금 누구보다 절박하다.

“살면서 한 번쯤 윈데이너의 이름이 필요할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네 부탁 나중에 들어줄게.

오늘 내 부탁 좀 들어주라.

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 무시하지 말아줘.마지못해 스텔라가 일어섰다.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지 걸음이 몹시 더딘 그녀를 나는 거의 끌다시피 붙잡고 배로 향했다.배에 올라타면서 뒤를 돌아보자 황태자의 등 뒤로 대공의 집요한 눈이 보인다.

‘그만 쳐다봐.

정말 오늘은 아니거든?’

그가 눈가를 찡그리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쟤는 뭘 알고 끄덕이는 걸까, 내 눈빛이 제대로 전달된 것이라 믿고 싶다.

“각하를 피해 자리를 옮긴 건가요?”

유유히 호수를 가르는 배 안에서 스텔라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려한 외모와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무게가 있었다.

“그럴 리가요.

그저 영애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청해본 거랍니다.”

눈동자를 통해 진실을 가늠해 보듯 한참 내 눈을 바라보던 스텔라가 이내 대충 고개를 끄덕여준다.

‘봐줘서 고맙다.’

“보기 드문 광경이네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테이블에 자리한 황태자와 대공이 보인다.

그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고 싶어 안달이 난 귀족들의 엉거주춤한 자세가 우스웠다.둘이 같이 있으니 그림이 좋네, 좋아.

“이런 귀족 놀음에 두 분이 함께 모습을 드러내다니.”

호수를 내려다보는 덕에 그녀의 긴 속눈썹이 도드라졌다.

“과연 이게 우연일까요, 혹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요.”

매끄럽게 내 얼굴로 이동해 온 스텔라의 시선이 첨예하다.

‘이 언니, 무섭네.’

고민된다.

얼마만큼 거짓을 섞어 대하면 좋을까.그런데 내게 적의도, 호의도 없어 보이는 저 비꼼 없는 솔직함이 끌렸다.나는 눈앞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마주한 시선을 피하지 않는 그 눈 속의 맑음을, 좀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영애의 질문에 제가 제대로 답을 못 했던 것 같군요.”

나는 무표정의 스텔라를 향해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각하를 피해 배에 올라탄 게 맞아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가 웃었다.

“그렇지만 거짓으로 그대의 질문에 답한 것은 아니랍니다.

정말 영애와 친해지고 싶거든요.”

“…그렇군요.

한데 방법을 잘못 고르신 것 같아요.”

스텔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영애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문제 있는 거죠?”

그랬다.

배에 올라탄 것은 내게 썩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속이 안 좋네요.”

빨간 머리 미인이 정말 가지가지 한다는 심정을 온 얼굴로 표했다.그래.

미안하다, 야.

“그만 내리는 게 좋겠군요.”

어, 어? 아직 안 된다.

안 된단 말이다!

“아뇨.

경치도 좋은데 좀 더 호수 위에 있고 싶어요.”

“영애, 지금 눈 감으신 거 아닌가요?”

일렁이는 호수 표면을 보면 어지러웠다.

눈을 감으면 좀 나을까 싶었으나 흔들리는 배의 감각이 더 잘 느껴져 하마터면 속을 게워낼 뻔했다.스텔라가 무척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여기서 영애가 곧 쓰러질 것 같다며 호들갑을 떠는 게 낫겠습니까.

아니면 제 발로 내리시겠습니까.”

억울함과 반항의 감정을 담아 간절히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단호한 표정만이 돌아왔다.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푸른 풀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심란함을 곱씹었다.

“내리시면 궁 내 마련된 응접실로 함께 가시지요.

그때까지 부디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주세요.”

무심하기만 한 목소리가 어딘지 상냥하게 들리는 건 내 착각인가.

“몸이 안 좋은 게 드러나면 영애가 피하고자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거예요.”

가뿐히 일어선 스텔라가 앞서 배에서 내렸다.

‘감동이다.

멋있다, 이 언니.’

평생 아픈 척만 해오다 안 아픈 척하는 날이 올 줄이야.나는 배에서 내리며 비틀대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둘이 자리한 테이블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오지 마라.

오지 마.

절대 가까이 오지 말라고.’

당장이라도 앞으로 튀어나올 듯한 자세의 대공이 멈칫하는 것이 보인다.

이번에도 눈빛이 통하는 것일지도 몰라.나는 한껏 더 강렬하게 그를 쳐다봤다.

부정의 뜻을 담아 미간에 주름도 형성한 채 대공을 위협했다.

‘나는 지금 예민한 짐승이야.

다가오면 물어버린다.’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린 대공이 엉거주춤 의자에 앉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 잘했어.

착하다.’

한숨 돌린 나는 스텔라의 옆에서 걷기 시작했으나 쉽지 않았다.

당장 바닥에 누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와, 땅이 파도치네.’

눈앞에 번개가 치며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어쩐지 익숙한 단단함이 느껴진다.거칠게 욕하는 목소리, 아는 목소리인데.

“각하……? 이게…….”

“파도가 치긴.”

파도? 뭐라는 거야, 이 인간.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맡겨.”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나는 생각했다.맡기긴 뭘 맡겨.

네가 문제야.

네가 날 안고 있는 것부터 틀렸잖아.

이 거짓말쟁이.아, 망했다.

제대로 망했어.*

“대공, 오랜만입니다.”

비비안을 발견한 브라이트 대공이 그쪽으로 향하려던 찰나 그의 앞을 황태자가 막아섰다.

“전하, 웬일로 이런 자리에서 다 뵙는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예, 저야말로 이곳에서 대공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리 말하는 황태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대공의 앞에서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그를 물끄러미 보던 대공의 시선이 저 멀리 살금살금 걸어가는 비비안을 향했다.배에 올라타면서도 뒤를 살피는 것이 꼭 도망가는 토끼의 행태 같다고 생각하며 주시하자 토끼의 눈이 저를 향했다.그녀의 강렬한 눈빛 위로 떠오르는 글자들을 노려보던 대공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강조하고 싶었던 것인지 글자가 말도 안 되게 크게 보였다.

“전하가 괜찮으시다면 잠시 담소라도 나누시겠습니까.”

“좋은 생각이군요.”

황태자를 위해 마련된 테이블로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에게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물리자 서로를 향한 낯에서 한결 느슨한 분위기가 풍긴다.황태자와 대공, 두 사람이 앉은 의자가 서로가 아닌 호숫가를 향한 채 대화가 시작되었다.

“형님, 무슨 생각입니까.”

단둘이 남게 되자 형님이라 지칭하는 리안을 디에고가 빤히 바라봤다.

그보다 세 살 어린 리안은 처음부터 그랬다.자신을 형이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던 해맑던 아이.

리안의 주위로 여전히 맑고 청아한 하늘빛이 넘실거린다.

그를 보는 대공이 자기도 모르게 안심했다.

“제 어떤 생각이 궁금하신 겁니까.”

디에고의 눈이 저 멀리 배 위에 앉은 비비안을 좇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

‘친해지고 싶다.’

라는 글자가 반짝이자 그제야 그 앞에 앉은 여인에게 시선이 옮겨간다.제 턱을 손으로 쓸며 마이어 백작 영애를 보는 그의 눈이 가느스름해진다.그런 디에고를 찬찬히 살피던 리안의 시선 또한 비비안에게 향했다.

“비비안 윈데이너, 그녀에 관한 생각이 궁금하군요.”

그 이름에 반응한 대공이 한참 만에 황태자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근래 형님이 움직이는 동선에 매번 비비안이 있는 것은 우연일까요?”

“우연, 아닌데.

제가 한창 따라다니는 중입니다만.”

“…따라다닌다라.”

그간 건강을 핑계 삼아 저택 안에 머물던 비비안을 떠올린 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 아이가 한동안 칩거한 원인이 형님인 것도 아십니까.”

“…응.

그건 반성하고 있어.”

미간을 좁힌 디에고의 얼굴에 잠시 시무룩함이 비치자 그를 본 리안의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그 아이가 원치 않는 것은 하지 마십시오.”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리안의 말에 대공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 제게 하는 말씀입니까.”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냐는 시선이 대공에게 향하자 이내 그가 웃었다.

“스스로에게 하신 말 같아서 물어본 겁니다.”

잠시 굳은 표정을 짓던 황태자가 고개를 젖혀 감은 눈가를 손등으로 가렸다.

그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 둘에게 한 말입니다.”

“새겨듣지요.”

비비안에게 못 박힌 시선을 돌릴 생각이 없는 디에고가 이어 말했다.

“그런데 리안, 참기만 하면 안 좋아.

물러나야 할 때를 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야.”

게다가 나는 참을 수가 없거든, 이미.배에서 내리는 비비안의 상태가 안 좋았다.

몸이 먼저 그녀에게 향하려던 대공이 멈칫한다.비비안이 필사적으로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 살벌한 눈빛은 굳이 그녀 주위에 떠오른 생각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그 뜻이 전해졌다.

“쯧, 고집 하고는.”

한 걸음 떼는 것이 고역인 듯 위태로운 비비안의 모습에 디에고의 초조한 눈길이 따라붙었다.끝내 그녀 위로 파도가 덮치는 것을 보며 디에고가 뛰쳐나갔다.

“젠장.”

대공이 짓씹으며 내뱉은 말에 황태자의 시선이 뒤늦게 그를 향했다.날렵한 짐승처럼 달려 나간 대공이 비비안에게 향하는 것을 리안은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뒤이어 비비안의 허물어지는 몸을 보고 그제야 정신이 든 황태자가 다급하게 일어섰다.이윽고 비비안의 자안이 감긴 눈꺼풀 사이로 사라지며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이 대공의 품 안으로 내려앉았다.파도는 무슨 파도인가, 지나치게 가벼운 비비안의 몸을 안아든 디에고의 얼굴에 전에 없던 초조함과 불안이 가득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