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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10화 (10/109)
  • 10화

    “각하, 보는 눈이 많습니다.”

    비비안을 안아든 대공의 얼굴이 살벌했다.

    스텔라의 무덤덤한 어조에 그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대공의 눈을 피하지 않은 스텔라가 마저 입을 연다.

    “송구하오나 윈데이너 영애가 가장 원치 않았던 상황입니다.”

    대공이 눈을 감은 채 길게 심호흡한 후 황태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오늘은 이만 파하도록 하지.”

    황태자의 축객령이 떨어지고 이 상황을 즐기던 귀족들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뭉그적대기 시작했다.

    “의원은―”

    대공의 물음이 채 끝나기 전에 황태자가 그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불렀습니다.”

    디에고 품 안의 비비안을 내려다본 리안의 표정이 착잡했다.

    하얗게 질려 핏기 없는 얼굴에 덜컥 겁이 난다.

    “전하, 의원 도착하였습니다.”

    내내 한쪽 테이블에 상주하다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이런 사달이 일어나다니, 의원이 혼비백산해서 달려왔다.게다가 하필 쓰러진 이가 그 유명한 비비안 윈데이너일 건 또 뭐란 말인가.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의원이 그녀를 살폈다.

    “기력이 쇠하신 것 같습니다.

    날이 덥고 배까지 타신 것이, 무리가 된 듯합니다.”

    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의원이 속으로 안도했다.그러나 한시름 놓은 것은 자신뿐인 듯 대공의 시선이 여전히 따가웠다.

    의원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지, 지금은 의식을 잃으신 직후 잠이 드신 것 같으니 푹 쉬게 해 드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깨어나신 후에 기력을 보충할 만한 음식을 서서히 섭취하는 것이 좋겠고, 더불어 무슨무슨 약초가 효능이 탁월하니 그 또한 복용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둥 겁에 질린 의원이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의미 없이 중얼대는 의원과 사고를 잃은 듯 굳어 있는 두 남자를 보던 스텔라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내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정신 박힌 놈이 없군, 지금.’

    “전하, 해가 저물어 바람이 차니 그만 영애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태자궁으로 가지.”

    그녀의 상태가 위중한 것이 아니라면 눈이 많은 궁보다는 제집인 후작가 저택으로 가는 것이 비비안에게 더 좋을 터였다.

    어쩌다 자기가 이런 고민까지 해야 하는지 한탄한 스텔라가 의원을 돌아봤다.지금 영애의 상태가 굳이 궁에 머물러야 할 정도는 아니지? 얘 지금 이대로 제집으로 가서 쉬는 것이 낫겠지? 라는 말을 우아하게 전했다.의원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먼저 황태자에게 허락을 구하듯 스텔라의 시선이 향했다.비비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어서 대공을 바라본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각하, 영애를 직접 저택으로 모시겠다면 제가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스텔라를 보는 대공의 얼굴이 전보다 차분해졌다.

    “그래 주면 고맙겠군.”

    맞은편, 마차 창을 통해 노을이 들이치자 대공의 얼굴이 한층 우수에 차 보인다.비비안 윈데이너를 꼭 붙들고 앉은 대공의 옆얼굴을 보던 스텔라는 생각했다.

    ‘좋아하는 건 각하였군.

    이렇게까지 엮일 생각은 없었는데, 성가시네.’

    “숨은 자가 하나, 마부 그리고 하녀.

    셋인가.”

    느닷없이 입을 뗀 대공의 시선이 여전히 창밖을 향한 채였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제야 스텔라를 향해 고개를 돌린 대공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체가 뭔가, 영애.”

    “…마이어 백작가의 스텔라라고 합니다, 각하.”

    스텔라의 붉은 입술이 반듯한 호선을 그렸다.

    “이렇게 가까이서 각하를 뵙는 것은 처음이네요.”

    그런 그녀를 표정 없이 바라보던 대공의 시선이 느리게 제 품 안의 비비안을 향했다.고요한 비비안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디에고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평범한 영애가 암살자를 마부, 하녀로 부릴 일은 없을 테고, 뭔가 있기는 한데.

    “내가 그대의 뒷조사를 좀 하더라도 이해해 주게.

    영애가 비비안의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말이야.”

    단단한 대공의 팔에 마치 갇힌 듯 보이는 비비안을 본 스텔라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의 사이는 아닌 것 같던데, 이름 주인이 잠들어 있다고 아주 제멋대로구나.

    “미리 말씀을 다 주시다니 상냥하시네요, 각하.”

    후작가로 향하는 마차의 적막 속에서 둘은 같은 생각을 했다.

    ‘저 인간이랑 친해질 일은 절대 없을 것 같군.’

    비비안을 안은 채 후작가로 들어선 대공이 어느새 한쪽 벽을 차지한 태피스트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영애가 보기엔 어떤가.”

    그 옆에 선 스텔라의 눈이 흐렸다.

    그들 뒤로 침대에 고이 눕혀진 비비안의 숨소리가 색색댔다.자고로 태피스트리란 방의 보온과 더불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 밝고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졌거나 위엄 혹은 과시를 위한 장식용으로 웅장하게 그려지는 것이 보통인데.비비안의 방에 자리한 태피스트리를 보는 둘은 이것의 목적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그 정적 속에서 마리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자신의 주인을 데리고 돌아온 대공과 백작 영애가 서슴없이 아가씨의 방으로 들이닥치고 나서야 그녀는 탄식했다.평소 비비안의 방은 방 주인인 그녀와 마리 외 낯선 이에게 열린 적이 없어서 생각지도 못했던 그들의 실수.

    그 안일했던 지난날.

    - 크으.

    마리, 어때.

    방이 훤하다, 훤해!마리는 아가씨와 쌍엄지를 치켜들며 칭송하던 그 걸작, 미남과 미녀가 한가득 그려진 태피스트리를 보았다.…다시 봐도 지나치게 웅장하고 과했다.

    “영애의 취향을 알 만하군요.”

    스텔라의 얼굴에 비웃음이 들어찼다.

    “그런가.”

    하고 읊조린 대공이 눈앞의 대작을 꼼꼼히 살폈다.

    어찌나 정성과 시간과 돈을 들였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여기 미인들 중 나랑 닮은 이가 보이는가.”

    팔짱까지 낀 대공이 진중하게 미남, 미녀가 그려진 태피스트리를 훑었다.그의 진지한 모습에 스텔라는 고개를 젓고 발걸음을 옮겼다.

    ‘지친다.

    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저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각하는 후작님을 뵙고 돌아갈 요량이시죠.”

    스텔라를 보며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확인한 그녀가 가볍게 인사를 올리고 돌아서자마자 디에고의 시선이 태피스트리로 돌아간다.어느새 서로를 먼지만도 못하게 여기는 둘이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각하.”

    금발과 적발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보며 디에고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흑발에 푸른 눈을 한 자는 없는 건가.”

    쾅―스텔라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컥 열린 문 사이로 후작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흐트러진 머리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무척 초조해 보였다.자신의 딸을 향하던 그의 발이 대공을 발견하고 멈칫한다.

    “각하.”

    “영애부터 살피게.”

    고개를 끄덕인 후작이 비비안에게 다가갔다.

    딸아이의 창백한 모습에 그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옆에 선 마리가 저택 내 의원에게 전해 들은 그녀의 상태를 상세히 보고했다.

    깊이 잠이 든 비비안의 얼굴을 조심스레 한 번 쓸어내린 후작이 대공과 자리를 옮겼다.*유독 꽃이 만발했던 봄이었던가.

    여느 때처럼 집무실에 앉아 있던 황태자의 시선이 창밖에 오래 머물렀던 날이 생각난다.

    - 후작, 내가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비비안이 날 봐줬을까.집무실 책상을 바라보다 들어 올린 고개가 그를 따라 창으로 향했을 때, 딸아이의 머리칼을 연상시키는 분홍 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전하, 윈데이너는 항시 전하를 따를 것입니다.그 마음을 품고 그 모든 힘을 누른 채 딸아이를 지켜준 감사의 마음은 고작 저 정도의 답밖에 해줄 수 없었다.

    - 그거 고맙군.그가 웃었던가.

    울었던가.창밖을 바라보던 후작이 이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대공을 보았다.그는 제가 보기에 황태자보다 더 아니었다.

    그가 제국에서 지닌 위치, 잘은 모르지만 성격까지.

    무엇 하나 딸아이의 짝으로 괜찮은 구석이 없었다.

    특히 느낌이 그랬다.

    “제 딸아이는 자리를 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혹여 마음을 품으신다면 각하의 신분은 독이나 다름없지요.”

    신분도, 재산도 이미 다 갖췄다.

    비비안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이미 제가 줄 수 있으니, 아이는 자신에게 맞는 행복만 추구하면 될 터였다.

    “이제야 알겠어.

    황태자가 싫은 게 아니라 황태자비가 싫었던 거군.”

    황태자는 물론 자신과도 그토록 엮이기 싫어하던 비비안을 떠올리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대공인 자신은 애초에 그녀의 고려 대상에 들 수 없었음을 상기한 디에고가 웃었다.그는 이미 이런 상황을 수없이 겪어왔다.

    내가 아니었다면, 대공이 아니었다면, 남들과 다르게 이상한 것을 보는 내가, 디에고 브라이트가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던 치열한 나날.그러나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후작, 나는 대공이라는 작위 말고도 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네.”

    ‘대공’

    은 내가 가진 것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야.

    “그러십니까.”

    “그러니 비비안이 꺼리는 대공이라는 작위를 만회하기 위해 가진 것을 총동원해 보겠네.

    그럼 봐줄지도 모르지.”

    장난스럽게 웃는 대공을 후작이 한참 바라봤다.

    제 딸이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그가 한숨을 삼켰다.

    지금 이 순간, 먼저 간 아내가 절절히 떠올랐다.

    ‘어찌하면 좋겠소.’

    후작의 그늘진 얼굴을 보는 디에고의 얼굴엔 미소가 서렸다.

    “그대가 비비안의 아비라 다행이군.”

    후작 주위에 강건한 기운과 함께 딸을 향한 걱정이 넘실대고 있었다.

    그가 욕심에 자식을 파는 인간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딸아이가 거절한다면 저 또한 전력으로 각하를 막을 것입니다.”

    얼핏 비장하기까지 한 그의 말에 대공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강요할 생각은 없어.”

    비비안이 다치는 일은 없을 거야.이미 거절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지만 정식으로 구애한 적은 없으니 아직은 괜찮다 넘기는 디에고였다.그렇게 둘의 대화가 마무리되고 마차까지 배웅 나온 후작을 돌아본 대공이 야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비안이 깨어나면 제일 먼저 소식 전해주길 바라네.”

    후작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가 마차에 올라탔다.대공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디에고는 그가 여태 보고 들었던 비비안의 모습을 되새겼다.자신은 이 능력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덕분에 인간다운 삶을 잃어야 했다.비비안을 처음 마주한 순간, 안개가 덮인 자신의 세상에 무지개가 떠오른 그날.

    이미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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