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8화 (8/109)
  • 8화

    *

    “아가씨, 연애하세요?”

    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비비안 윈데이너, 브라이트 대공과 궁에서 밀회를 나누다.”

    “밀회? 누구랑?”

    미이일회? 밀회는 무슨! 우연히 몇 번 궁에서 대공을 마주치기는 했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한 군데서 시작한 소문이 아니라 했다.

    마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소문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는지 조목조목 일러주었다.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걸 보아 제각각 가문에게 직접 이야기가 흘러 들어간 것이리라.

    “다들 궁에 얼마나 사람을 심어놓은 거야?”

    있는 줄은 알았지만 보이지도 않던데, 그렇게 많은 가문의 세작들이 성실히 자신의 직무를 다하고 있을 줄이야.

    황궁 이대로 괜찮은가.나만 없어, 세작.우리 가문, 이 거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저희도 세작이라면 있을 텐데요.

    아가씨가 따로 심은 사람만 없을 뿐이지.”

    “마리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저는 제 나름의 정보망을 위해 항시 노력하거든요.”

    그랬구나.

    야무진 표정을 보니 신뢰가 간다, 이 친구.

    내가 궁에 세작은 안 심었어도 유능한 시녀는 뒀네.소문 퍼지는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수도 내 사람이 둘만 모이면 내 이름이 언급된다니.

    괴로움에 수명이 주는 것과 욕먹어서 수명이 느는 것, 무엇이 더 빠르려나.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라는 말까지 나온 것 같던데요.”

    “뭐?”

    나는 답답함에 침대를 팡팡, 두들기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쳤다.

    “그 자식! 노력은 무슨!”

    구설수에 시달리지 않게 노력한다며! 아주 폭풍에 휘말리게 만들어놓는구나.입궁만 하면 황궁 복도에서 마주치고, 뭘 사러 나가든 먹으러 가든 상점가 가게마다 모습을 드러낸다.

    숨이 막혀오던 황궁 도서관에서의 만남을 비롯해 저택 밖으로 발만 내밀면 어디선가 그가 나타나 내 앞을 차지하고는 했다.

    ‘…소문이 날 만도 하다.’

    나를 따라다니겠다던 대공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자가 내 뒤를 밟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결국 우연을 가장한 여러 만남을 뒤로하고 난 칩거했다.그렇게 대공에게 겨울을 빼앗긴 채 봄을 맞았다.

    “마리, 황궁 뱃놀이 언제지?”

    “이틀 남았네요.”

    “가는 게 좋겠지? 가야겠지?”

    하아, 날 두고 속닥거릴 귀족들 생각하면 안 가고 싶은데 또 뭐라 수군대나 직접 보고 싶으면서도, 막상 그럴 걸 생각하니 꼴 보기 싫고 막 그러네.아오, 안 봐도 뻔하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소문을 잠재우겠다고 황태자와 찰싹 붙을 수도 없고, 새롭게 부상하는 대공과의 소문을 그냥 두자니 황태자 리안의 입장이 우스워질 테지.치정은 치정대로, 정치는 정치대로.

    이보다 재미난 화두가 어디 있겠는가.

    물고 뜯고 씹을 귀족들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나라도 허구한 날 그 이야기로 떠들겠네.

    “답이 없다, 답이.”

    “이참에 두 분 중 한 분을 만나보는 건 어떠세요?”

    이게 무슨 소리지, 마리?

    “지난 10년간의 그 고생들을 잊은 거야?”

    내가 뭣 때문에 그리 사서 고생을 했는데.

    황후 안 되려고 발악 아닌 발악을 했는데, 대공비라고 뭐, 많이 다르겠어? 웃기지 마라, 이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나, 둘 다 안 좋아해.”

    원래 못 해본 이가 기대치가 높은 법, 내가 그리는 사랑은 그야말로 엄청난 마음이다.

    ‘리안을 사랑했으면 황후 한다고 설쳤을지도.’

    사랑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나는 보기보다 사랑에 진심이었다.*

    “오긴 왔는데.”

    황궁 내 호수는 여기서 더 가야 하는데, 내 발은 떨어지질 않는구나.복도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자 앞쪽에서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후작 영애라지만 전하에 각하까지, 욕심이 과한 게죠.”

    옳지, 벌써 시작인 게로구나.

    목소리가 한참 어리게 들리는데.

    “외모야 아름답다지만 그 정도야 뭐, 백작가의 스텔라 영애만 하겠습니까.”

    나를 발견한 맞은편 영애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지도 모르고 내게 등을 보이고 있는 갈색 머리의 영애가 쉼 없이 떠들었다.

    “전하랑 각하께서 윈데이너 영애에게 홀려 잠시 눈이 어두워지신 게 아닐지!”

    “그런가요? 그런데 영애, 앞으로 그 혀를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고작 신체 일부 때문에 명을 달리하면 안타깝지 않겠어요?”

    나는 한 손을 얼굴에 댄 채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화들짝 놀라 뒤를 돈 갈색 머리 영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아,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너무 겁먹지 마세요.

    제가 당장 그대의 목을 치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떠시나요.”

    헉, 하고 헛숨을 들이켠 영애가 손을 바르르 떨었다.

    그에 시선 한 번을 흘깃 둔 나는 싱그럽게 웃었다.

    “조심하세요, 궁에는 듣는 귀가 많답니다.

    오래 사셔야지요.

    그럼 이만.”

    정말이다.

    내가 그 귀에 당한 게 얼만데!나는 진심이었다.

    정작 듣는 이는 흉흉한 겁박을 들은 것 같겠지만, 정말 안타까웠다.

    아직 한참 어린 여자아이가 철없이 내뱉는 말로 인해 화를 당하면 어쩌나.그런 말은 집에 가서 몰래 하라고.

    “비비안.”

    “전하!”

    터덜터덜 걸어가던 내 옆으로 황태자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고개를 기울인 채 날 빤히 보는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

    ‘아프다고 저택에만 있었는데 그래서 살피나?’

    너무 잘 먹고 잘 자서 걱정이었다.

    얼굴에서 티 나는 거 아니겠지.

    “설마 전하, 지금 호수 뱃놀이 가시는 거예요?”

    “응.

    그런 참인데.”

    너 이런 거 원래 참석 안 하잖아.

    왜 또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이렇게 가면 황태자랑 나랑 같이 도착하는 거 아니야?

    “안 바쁘세요?”

    “응.

    나보다 그대가 훨씬 바쁜 것 같던데.”

    바빴지.

    마리에게 부탁해 수시로 사다 먹은 상점가 디저트 제패하는 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얼굴 본 지가 한참 된 것 같아서 말이야.”

    그건 본의 아니게 대공 때문에 칩거해서 그래요.

    집 밖으로 한 발짝만 내밀면 그 사람이 나타나거든요.나는 오랜만에 본 리안의 옆얼굴을 힐끗대며 그와 함께 복도를 거닐었다.

    ‘알겠지? 황태자도 소문 다 들었겠지?’

    “대공이랑은.”

    그의 말이 이어지지 않자 입 안이 말랐다.

    뭐! 대공이랑 뭐!시선이 바닥을 향하며 반쯤 감긴 눈꺼풀이 애처로워 보인다.

    미남이 분위기까지 넘치면 눈만 내리깔아도 서사가 생기는구나.

    “전하를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서 죄송해요.”

    “…내가 곤란할 만한 일이 있었어?”

    “다들 좋을 대로 떠들 테니까.

    괜히 전하의 명예에 흠집이 날까 봐 걱정이네요.”

    “사실이 아닌 거로 떠드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보다 내가 알아야 할 진실은 뭐지, 비비안?”

    진실? 그거야 당연히.

    “지금부터 저들이 수군댈 모든 얘기가 실은 다 헛소리라는 거죠.”

    나는 눈앞에 펼쳐진 야생을 훑었다.

    오늘따라 숨을 곳 하나 없게, 흐린 구석 없이 맑구나.

    황궁 호숫가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 주위로 젊은 귀족들이 넘쳐난다.그리고 수없이 다양한 감정과 이야기를 담은 눈빛들이 나와 황태자를 향했다.질투, 혐오, 흥미, 때때로 음험한 시선까지.

    ‘아무튼 뭐 하나 산뜻한 것이 없어.’

    이리될 줄 알았으면서도 그에게 먼저 가라던가, 따로 시간 차를 두고 도착하자고 말할 수 없었다.리안 로렌스는 바보가 아니니까, 이건 필시 그가 계획한 그림이다.10년의 세월 동안 그와 내가 쌓은 것이 고작 거짓뿐이겠는가.사랑은 아닐지라도 도움이 필요할 때 기꺼이 손을 내밀 정도의 정은 있었다.

    ‘애초에 내가 벌인 문제인 것도 같고.’

    아니지, 내가 뭘 했다고.

    대공, 그 뻔뻔한 남자 때문이다.

    “오늘은 제가 전하의 충직한 신하가 되어 드리지요.”

    나는 언제 우리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을까, 주시하는 야생동물들 떼를 향해 화사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그런 날 물끄러미 보던 황태자가 근사한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가.

    그냥 비비안과 뱃놀이가 하고 싶었을 뿐인데.”

    충직한 신하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이 평소 황태자비 자리를 회피하던 나의 뜻과는 먼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황태자와 내 사이가 굳건함을 보여주려 했다.마음은 정말 그랬다.

    단지 이놈의 몸이 안 따라줬을 뿐.저 멀리 귀족 자제들에게 둘러싸인 황태자에게 눈빛을 쐈다.

    ‘미안해요, 전하.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나는 차일이 드리운 테이블에 턱을 괴고 주변을 관망했다.

    해가 너무 쨍했다.

    옆에서 점차 희게 질리는 내 안색을 보고 황태자가 나를 여기 앉혀놓고 떠났다.

    - 비비안은 여기서 쉬는 게 좋겠어.부드러이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곁에 있던 어린 영애들이 어찌나 웅성대던지.

    ‘하여간.

    죄가 많다, 죄가 많아.’

    들릴 듯 말 듯 떠들어대는 이야기들 사이로 거슬리는 단어가 많았다.

    선망의 대상인 두 사람의 이름과 얽힌 내가 어지간히 미운가 보다.

    “영애, 괜찮으시다면 잠시 함께 자리해도 될까요.”

    청아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흔치 않은 붉은 머리가 무척 탐스럽게 흔들렸다.

    주홍빛 도는 눈동자에서 과즙이라도 흐를 것 같은 게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예쁘다.나는 의자를 가리키며 긍정의 미소를 띠었다.

    “부디.”

    스텔라, 마이어 백작 가문의 외동딸이었지.

    아까 갈색 머리 영애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한 이유를 알겠다.

    무척 고혹적이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의례적인 질문이었으나 곧은 시선 덕분인가.

    그녀의 말에서 조금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졌다.

    “덕분에.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영애.”

    그냥 목적 없이 다가온 것은 아닐 텐데, 침묵이 이어졌다.

    스텔라는 머리고 눈이고 색이 무척 강렬하고 뚜렷해서 존재감이 대단했다.

    ‘저 고운 얼굴로 무슨 말을 하려나.’

    “영애는 각하를 좋아하시나요?”

    와, 이건 예상 밖인데.

    그녀의 낯이 마치 날이 좋군요, 수준의 말을 내뱉은 사람처럼 담담했다.

    “대놓고 물어봐 주니 오히려 낫군요.”

    그녀의 직설적인 물음에 나 또한 솔직하게 답했다.

    “각하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랍니다, 혹 영애도 각하를 마음에 품고 있는 건가요?”

    스텔라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아뇨.

    대공 각하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뭘 그렇게까지 정색하고 그러나.

    대공의 외모가 취향을 따지는 그런 것이 아닐 텐데.

    “그렇군요.”

    또다시 우리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뭐지? 그래서 용건이 뭐였던 거야? 얘는 뭐가 목적인 건데.

    “어머!”

    “허억.”

    방금 그 소리 뭐야.

    누구 숨넘어가니? 주변이 소란해지는 이유가 저 멀리 내게도 보였다.

    “각하가 오셨군요.”

    스텔라의 무심한 얼굴이 내게 향한 것을 느꼈지만 나는 그녀를 마주 볼 수 없었다.나의 불청객, 검은 제복을 입은 대공이 불쾌한 표정을 지은 채 성큼성큼 이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