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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68)화 (168/292)
  • 168화 

    【 바람장미와 일지 】

    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분명 별장 안에 들어왔는데, 별장은 없고 다시 묘지가 나타났다. 그것도 애초부터 이 자리에 있었을 것처럼 생긴 묘지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별장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였다면 별장의 벽이며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투명한 막이 덧씌워져, 몇 발자국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메이슨과 그런 메이슨을 진정시키고 있는 요르문을 훤히 비춰 보이고 있었다.

    시아는 무심결에 막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막이 모래처럼 갈라지더니, 이윽고 다시 붙었다. 뱀의 타액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기묘한 감촉이었다.

    “별장은 위장용 환각이었군요.”

    라크시스가 깨진 묘비를 피하며 천천히 묘지로 다가갔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엉망이 된 묘지 한가운데, 거대한 성녀 상의 허리가 꺾여 반토막이 난 건물이 보였다. 둥근 지붕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 부서져 지붕의 역할을 다 하지 못했고, 문은 진작에 뜯겨나가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온전했다면 예배당 혹은 얼핏 사원처럼 보이기도 하였을 대리석 건축물이었다. 폐허 속에 황량히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초대 뮐러 가주가 묻힌 묘실이었다.

    “프레디 뮐러가 진짜로 숨기려고 했던 건 이 묘지였군요. 별장은 주변의 이목을 분산시키려고 했던 겉모습에 불과하고요.”

    “그 말은 여기에 카얄이 노리던 게 있었다는 뜻이네요?”

    “그렇죠. 바꿔말하면 초대 뮐러 가주의 묘에 광룡의 봉인이 숨어있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라크시스의 손바닥에 있는 정령에게서 가느다란 소리가 났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령이 울고 있었다. 사방에 널브러진 동족의 시체를 보곤, 서럽게 왱알거리더니 폭 엎어져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가 정령을 보고 살짝 인상을 쓰더니 입을 열었다.

    “카얄이 여기에 다녀간 지 얼마 안 되는 모양입니다.”

    “정령이 그렇게 말해요?”

    시아는 놀란 눈으로 감탄했다. 아스타도 그러더니, 마법사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 보다. 내 귀엔 모기 소리 같은데,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정령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걸 보면 말이다.

    “아뇨, 이 녀석은 지금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하는 중이라. 아직 정령의 사체가 산화하지 않고 남아있기에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다고 추측했을 뿐입니다.”

    라크시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코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정령을 감쌌다. 정령이 눌리지 않게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더니 태연하게 부서진 묘실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가보죠.”

    시아는 라크시스를 뒤따르며 생각했다. 호기롭게 프레디 뮐러의 흔적을 쫓아 그의 별장에 찾아오긴 했는데, 별장의 실체가 묘실이었다니. 서재며 연구실이 갖춰진 저택이 아니라 고작해야 관과 추모 공간이 전부인 묘실에 단서가 남아있다면 얼마나 남아있을까. 그것도 이미 카얄이 다녀간 묘실이라면.

    하지만 묘실에서 목격한 광경은 그녀의 예상을 보기 좋게 부수어놓았다.

    얼룩진 햇살이 부서진 지붕 사이로 스며 내려온 가운데, 묘실 중앙의 관이 열린 채 두 동강이 나있었다. 놀랍게도 관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때 시신이 누워있었을 흔적도, 흙먼지도 없이 완전히 텅 빈 관. 애초부터 위장을 위해 만들어둔 관이었다.

    시신 대신 관을 채우고 있던 것은 수많은 기계 장치들이었다. 토막 난 석관의 안쪽을 따라 적나라하게 드러난 태엽이며 황동빛 체인, 잠금장치 따위가 보인다.

    시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진짜는 관 밑에 있었네요.”

    관이 놓여있던 자리가 시커멓게 뚫려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드러나 있었다. 아마도 지금까진 관으로 입구를 위장해 두어 사람들의 시선을 돌렸던 모양이다.

    관을 굽어보는 성녀 상 발치의 석판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지식은 죽음이요, 호기심은 죄악이며, 무지는 축복이라. 금기된 지식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불러오니, 세월로 고이 덮어 영원히 잠들게 하라.]

    금기된 지식을 잠들게 하라. 이건 숨기고 싶은 지식을 가진 자가 묘지에 찾아올 도둑에게 할 법한 경고 아닌가.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 모양이었다. 기대감에 묘한 흥분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진짜 프레디 뮐러의 별장은 이 계단 끝에 있으리라.

    묘실의 벽과 바닥을 살펴보던 라크시스도 손가락으로 붉은 먼지를 훑어 올리며 말했다.

    “주변에 저주의 흔적도 남아있군요. 우리가 제대로 찾아온 모양입니다.”

    시아와 라크시스의 시선이 맞닿았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곧장 지하로 향했다. 라크시스의 손가락을 따라 고여 든 마력이 벽을 따라 걸린 등에 불을 밝혔다. 재게 놀리는 구둣발 소리만이 나선형 계단에 울려 퍼졌다.

    계단이 끝나자마자 라크시스의 손바닥에 노란 불이 확 피어올랐다. 일렁이는 불빛에 드러난 별장의 실체에 시아와 라크시스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프레디 뮐러가 괴짜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네요.”

    사방이 종이였다. 종이, 또 종이. 엉망으로 훼손된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손이 닿지 않는 천장과 걸어 다녀야 하는 바닥을 뺀 모든 공간에 빽빽하게 종이가 붙어있었다. 심지어 그 종이엔 하나같이 거미줄처럼 생긴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정확히는 팔방위를 나타내는 격자선 위로 길이가 들쑥날쑥한 막대가 빙 돌아가며 정체 모를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마치 장미가 겹겹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처음 보는 그래프였다.

    덩그러니 놓인 책상을 제외하고, 손바닥만 한 방을 가득 채운 그래프가 왠지 모를 섬뜩한 느낌을 준다. 이 방의 주인이 정말로 무언가에 미쳐있었던 것 같아서. 레베카가 말해주었던, 프레디 뮐러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대체 이 그래프는 뭘 나타낸 거야?”

    “그건 바람장미예요. 레이디.”

    언제 따라 내려왔는지 메이슨이 계단에 서서 시아의 혼잣말에 대답했다. 화들짝 놀란 시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미스터 비렌체! 언제 왔어요? 영 못 들어올 줄 알았는데.”

    “말도 마세요, 누님. 얼마나 징징거리던지. 그래놓고 막상 별장 안으로 들어오니까 신기해선 본인이 먼저 묘지로 가더라니까요?”

    요르문이 모자를 벗으면서 툴툴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다, 시아가 목격한 것과 똑같은 광경을 발견했다. 요르문이 경악했다.

    “뭐야, 이것들은…….”

    그러나 메이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발명가의 피가 이런 곳에서 발동되기라도 했는지 남이 그려둔 그래프들을 마치 제 도면처럼 들추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돌아가신 뮐러사의 사장님께선 비행선에 관심이 많으셨나 봐요. 아니면 항해라도 하려고 하셨나?”

    메이슨이 턱을 괴며 진지하게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하나같이 비행선이나 배를 띄울 만한 지역이 아닌데, 대체 왜 이런 곳의 바람장미를 붙여놓은 걸까요?”

    “저어, 미스터 비렌체. 그 바람장미라는 게 뭐예요?”

    장미를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름이 진짜로 바람장미였다니.

    “특정 지역에 불어오는 바람의 방위별 출현 빈도를 기록한 것입니다. 풍배도라고도 합니다만, 그래프의 모양이 마치 장미를 닮았다고 해서 바람장미라고 부르게 되었죠.”

    메이슨 대신 라크시스가 대답해 왔다. 그도 메이슨과 마찬가지로 바람장미에서 무언갈 발견한 눈치였다.

    “원래 바람장미는 오래전 선원들이 주풍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하던 장식이었습니다. 지금은 바람의 강도나 비율, 풍향 같은 정보가 필요한 곳에 두루 쓰이고 있고요.”

    라크시스가 벽에 붙어있던 바람장미 한 장을 떼어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색이 바랜 종이에서 퀴퀴한 잉크 냄새가 났다.

    그가 내민 바람장미 상단에는 조그맣게 지명이 적혀있었다. 그곳은 험준한 산세와 마정석 광산으로 유명한 북부의 지르가나였다.

    “미스터 비렌체가 정확한 지적을 했군요. 활주로가 있거나 바다 한복판도 아닌 곳의 바람을 이렇게나 광적으로 조사할 이유는 없습니다.”

    메이슨이 시아와 라크시스 사이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게다가 심지어 다 틀렸어요, 레이디. 예를 들면, 아르카나는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지역인데 이 그래프를 보면 사방에서 강한 바람이 주기적으로 불어오는 것처럼 그려놨거든요.”

    아르카나. 지르가나. 뤼스. 에이즈번. 술란. 다무스. 보테나. 맨덜랜드. 메이슨이 뜯어온 바람장미에 적힌 지명이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수도의 중심지인 아르카나에 바람이 많이 분다고 표기해 놓은 것만큼은 공감할 수 없었다. 아마 라크시스나 요르문, 메이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 모인 네 사람은 모두 수도 출신이었으니까.

    이상했다. 바람을 측정해 놓은 그래프를 이렇게 사방팔방 붙여놨는데, 그게 모두 틀렸다니. 심지어 이렇게 다 틀린 정보만 모아놓았는데도 프레디는 죽기 전까지 이곳을 드나들었고, 카얄은 이곳에 숨은 정보를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 말인즉, 이 바람장미들은 바람이 아닌 다른 정보를 담고 있는 단서라는 뜻이다.

    그것도 광룡의 봉인과 관련된.

    문득 의문이 들었다.

    ‘카얄은 바람장미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나 본데. 다른 곳은 다 파헤쳐 놓고 바람장미는 손도 대지 않았어.’

    카얄이 실제로 이곳에서 찾던 건 바람장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아는 말했다.

    “아무래도 여길 좀 더 살펴봐야겠는데요.”

    바람장미에 시선을 빼앗겨 있었던 탓에 뒤늦게 방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고학과 신화학에도 상당한 수준을 자랑했던 사람이라더니, 프레디 뮐러의 서명이 적힌 두꺼운 학문서가 한쪽 구석에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책장이 넘어져 있는 것을 보니, 한때 가지런히 꽂혀있던 책들을 카얄이 죄다 뒤집어 엎어놓은 듯했다.

    시아는 바닥에 있는 책들을 이리저리 들춰보다 가장 손때가 많이 묻은 책을 골라 들었다.

    “이건…….”

    고대 갈리프 신화가 단순한 신화가 아닌 오래전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는 한 신화학자의 주장을 담은 서적이었다.

    ‘예전엔 신화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이단 취급을 받았었구나.’

    책의 저자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증거를 모두 동원하여 신화가 사실임을 증명하며, 동시에 본인은 신실한 국교회의 신자이고 삿된 어둠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루드윅과 신화 이야기를 할 땐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시아는 책장을 쭉 넘기며 책을 읽어나갔다. 그러다 어느 페이지에 도달한 후 멈칫하고 말았다.

    [(2) 고대 유적지의 마류 파장으로 본 사도의 실존 증명]

    “사도의 실존 증명?”

    다른 부분과 달리 이번 소제목에는 강조라도 하듯 별과 밑줄이 한가득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페이지에만 귀퉁이가 여러 번 접혔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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