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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67)화 (167/292)
  • 167화 

    지금이야 뤼스도 그렇고 대부분의 지역이 많이 도시화되어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물론 몇백 년 전에 비해 도시화가 되었다는 뜻이지 모르간 같은 대도시가 되었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만고불변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국교회가 세운 교회였다.

    영주의 성을 허물어도 교회는 허물지 않는다. 주신 디아우스를 섬기는 국교회 신자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국의 특징이었다.

    교회는 어느 영지에서나 영주의 성과 더불어 중심부에 위치했다. 영주만큼이나 권력이 있었던 것이 사제였기 때문이었다.

    라크시스는 교회를 유심히 관찰했다. 첨탑에 매달린 성녀 상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는 오래전부터 주거지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택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들어서 있었다.

    교회가 굽어보는 곳. 넓은 부지. 주택가의 한복판.

    걸어가던 중, 발끝에 돌이 채였다. 라크시스는 지팡이로 우거진 풀을 헤치고 돌을 살펴보았다.

    [3167-3236 제인 메이어]

    그것은 쓰러진 묘비였다.

    “농장 부지였다는 건 거짓이었군요.”

    라크시스는 지팡이로 묘비를 두드리며 시선을 모았다.

    “여긴 공동묘지였습니다. 오래전, 그러니까 중세의 장원이 존재하던 시기부터 영지민들이 묘지로 사용하던 부지였어요.”

    “묘, 지요?”

    당황한 시아가 다가오자, 라크시스는 다시 한번 지팡이로 덥수룩한 잡초를 헤치고 묘비를 보여주었다.

    “미스 뮐러가 우릴 속인 것 같진 않고, 죽은 프레디 뮐러가 딸에게 거짓말을 한 것 같습니다.”

    “미친놈…….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묘지에 별장을 지어?”

    요르문이 황당하다는 듯 욕을 내뱉었다.

    그 후로도 시아 일행은 묘비를 여러 개 더 찾았다. 모두 3200년경의, 아스타보다도 백 년은 더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무덤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요르문이 욕 아닌 욕을 중얼거리면서 메이슨과 묘비를 조사하고 있는 사이, 시아는 계속해서 그녀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던 라크시스를 조용히 불러세웠다.

    “라크,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당신도 느꼈군요.”

    자고로 제국에서 공동묘지는 묘비와 조경수를 채워 넣어 보기 좋게 꾸며둔 공원과 같은 의미의 단어로 쓰였다. 죽은 영혼이 주신 디아우스 곁에서 행복하게 지낼 거라 믿는 제국인들은 교회와 가까운 곳에 가족을 묻고 산책이라도 하듯 묘지를 자주 찾으며 죽은 이들을 추모했다.

    이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애초에 공동묘지라는 게 그렇게 큰 공간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많이 걸었는데도 별장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건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뜻이고요.”

    그렇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아까부터 프레디 뮐러의 별장을 향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별장과 그들 사이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보통의 공동묘지 크기를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라크가 분명 이 부지에 들어올 때 정상 범위를 벗어나는 마력이 많다고 했잖아요. 이건 마법이에요. 틀림없어요.”

    라크시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가 반달처럼 휘었다. 그런 시아가 기특하다는 듯 그가 대답했다.

    “시아, 이젠 정말로 마법사를 해도 될 것 같군요.”

    “장난치지 말고요! 라크는 원인을 알고 있죠?”

    이러다 그녀의 머리까지 쓰다듬게 생겼다. 시아는 부끄러워 빽 소리치곤, 라크시스에게 물었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언제나 정답을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만.”

    라크시스가 턱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제 생각엔 공간 왜곡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당신의 슈트 케이스에 걸었던 마법, 기억하죠?”

    당연히 기억난다. 무한대로 짐이 들어가는 가방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그것과 원리는 같습니다. 이곳엔 별장 근처의 바닥을 무한정으로 늘리는 마법이 걸려있어요. 아마 별장을 지은 사람은 외부인이 별장에 접근하는 걸 막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프레디 뮐러라는 거죠?”

    “그건 확신할 수 없겠군요. 세간에 알려진 프레디 뮐러는 마법사가 아니었거든요.”

    그의 대답에 이젠 정말로 확신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수상한 별장엔 반드시 들어가 봐야 한다.

    봉인의 비밀을 간직한 프레디 뮐러가 모든 증거를 남겨두었을 비밀 장소.

    라크시스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고민 중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엔 마법을 만들어낸 당사자 본인만이 비밀 장소에 드나드는 법을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라크는 고대 마법사잖아요. 별장에 걸린 공간 왜곡 마법을 아예 없던 걸로 만들 순 없는 건가요?”

    “…방대한 마력은 만능이 아닙니다. 엉켜있는 실을 억지로 풀면 더 엉켜버릴 수가 있죠. 그렇다고 무작정 잘라버리면 두 번 다시 원래 길이의 실로 되돌릴 수도 없고요.”

    결국 고대 마법사씩이나 되는 라크시스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별장은커녕 본전도 못 찾을 수 있단 말인데. 시아는 근처 묘비에 털썩 주저앉았다. 왠지 일이 술술 잘 풀리더라니.

    풀밭이라 그런가, 벌레들이 많았다. 시아는 바지를 타고 기어 올라오는 개미들을 쫓아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묘비 옆 무성한 잡초가 짓이겨진 채 누워있었다. 사람의 발자국이었다. 그것도 자주 밟혀 아예 그 부분엔 풀이 더는 자라지 못하는 상태에 가까웠다.

    “라크, 여길 봐요.”

    라크시스가 뒷짐을 지고 몸을 숙였다가 멈칫했다.

    “…누군가가 밟은 자국이군요.”

    누군가가 밟은 자국이라니. 분명 여긴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채 방치된 곳이었을 텐데.

    그렇다고 팔 년 전에 죽은 프레디 뮐러가 살아나서 묘비를 밟고 다니진 않았을 것 아닌가.

    시아는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지금까지 지나온 곳을 돌아다니며, 묘비란 묘비는 죄다 훑어보았다.

    “누님, 왜 그러세요?”

    “요르문, 혹시 사람이 밟은 것처럼 잡초가 누워있던 묘비를 본 적 있어?”

    네 사람은 눈이 빠져라 묘비를 살폈다. 그리고 그 결과 잡초가 밟혀있는 네 개의 묘비 측면에서 아주 작은 표식을 발견했다.

    구불거리는 뱀과 장미 덩굴에 휘감긴 이니셜 M.

    초대 뮐러 가주가 사용했던 문장이었다.

    “…이게 별장으로 들어가는 방법이었어요. 묘비로 위장한 발판을 밟으면 별장에 접근할 수 있는 거예요.”

    한껏 고양된 호흡을 억누르며, 시아가 말했다. 메이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순서가 있을까요? 아니면 동시에 밟아야 되는 걸까요?”

    “프레디 뮐러가 혼자 여길 드나들었다면 네 개의 묘비를 동시에 밟진 못했을 것 같긴 한데요.”

    그렇다고 굳이 같은 발판만 밟도록 설계하지도 않았을 것 같고요. 시아는 뒷말을 덧붙이며 라크시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라크시스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진, 이젠 척하면 척이었다.

    “알았어요. 경우의 수를 모두 고려해 보자는 말씀이시죠.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다 해봅시다.”

    이렇게 또 저렇게. 요르문과 메이슨의 도움까지 받아 발자국이 난 묘비를 순서를 바꿔 밟아보길 스물한 번째.

    “……!”

    거대한 그림자가 네 사람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멀게만 느껴졌던 별장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감각이 고장 나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게 이렇게 가까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자그마한 우체통이며 녹슬지 않은 철제 울타리가 낡은 별장과 부조화를 이루며 세워져 있었다.

    프레디 뮐러의 별장. 예상치 공간 왜곡 마법을 통과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보상이었다. 쓰러져 가던 폐가로만 보이던 별장이 낯선 이들을 잡아먹을 듯 시커멓게 굽어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던 벽에서 이상하게 생기가 감돌았다.

    “이제야 좀 별장다운 크기가 된 것 같군요.”

    라크시스가 아연한 목소리로 멀거니 중얼거렸다.

    벽을 뒤덮은 덩굴이 움직이는 것만 같다. 마치 뱀처럼. 샛초록 줄기들을 뱀 같다고 생각하자마자 뮐러가의 문장을 휘감고 있던 장미 덩굴과 뱀이 떠오르고 만다.

    그때, 낡은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 문이 혼자 열렸어요……!”

    낮은 계단 위에 그림처럼 매달려 있던 현관이 저절로 열렸다. 바람결에 끼익끼익 흔들리며 손님을 맞이하는 입구 너머로는 온통 시커먼 그림자뿐이다. 창문 없는 집에 등불마저 꺼놓은 것처럼 완전히 새카만 공간 속에 돌연 동그란 빛이 홀연히 나타났다.

    “아아악!”

    메이슨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가 질겁하며 요르문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만 좀 떨어. 자네가 마류 탐지기도 아니고, 왜 이렇게 벌벌거리는 거야.”

    “그치만 무섭다고요! 안 무서우세요? 우리 당장 돌아가요. 저건 악령이에요, 악령이 분명하다고요!”

    메이슨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애원했다. 괴담 수집가였던 루드윅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루드윅이었다면 신이 나선 먼저 들어가자고 했을 텐데.

    “자네가 이러니까 나도 무섭잖아! 진정해, 메이슨. 여기에 고대 마법사가 있는데 뭐가 위험하겠어?”

    그러나 메이슨의 앓는 소리는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놀랄 건 없습니다. 이건 정령이니까요.”

    어느새 동그란 빛을 낚아챈 라크시스가 움켜쥔 손을 보이며 말했다. 그의 손에서 찌그러진 정령이 조그맣게 소리를 질렀다.

    “라크, 여기에 들어가도 되는 거겠죠? 솔직히 좀 으스스하긴 한데.”

    “여기까지 왔는데 되돌아갈 수도 없잖습니까. 무서우면 밖에 있어요. 혼자 다녀올 테니.”

    라크시스는 어느새 계단에 올라 문간에 서있었다.

    분명 아까까진 무서웠는데, 태연하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그를 보자 용기가 났다.

    그래, 여기까지 와놓곤 도망칠 순 없잖아?

    “아녜요. 같이 가요. 라크와 같이 다니면 괜찮을 것 같아요.”

    시아는 무의식중에 손을 내밀었다. 라크시스는 그런 시아의 손을 자연스럽게 붙잡았다. 떨림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직도 무섭긴 한가 본데.

    “좋습니다. 같이 가죠.”

    뒤에선 요르문이 메이슨과 여전히 실랑이 중이었다. 누님, 먼저 가세요! 전 천천히 뒤따라갈게요! 이렇게 외치는 요르문의 표정엔 짜증이 가득했다.

    그 덕에 긴장이 살짝 풀렸다. 시아는 작게 웃으며 라크시스와 함께 별장의 문을 넘어섰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목격한 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무성한 들풀 위로 사방에 널브러진 깨진 묘비 조각과 정령의 시체.

    그리고 한때 사원처럼 웅장하게 지어졌으나, 무너지고 입구까지 열려 마치 도굴이라도 당한 것처럼 보이는 초대 뮐러 가주의 무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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