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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69)화 (169/292)
  • 169화 

    시아는 직감했다.

    이 챕터에 분명 중요한 정보가 있을 터다. 게다가 사도의 실존 증명이라니. 냄새가 나도 확실히 나는데.

    시아는 재빨리 내용을 읽어나갔다.

    [고대 갈리프 신화가 단순히 신화가 아닌 실재였음을 증명하는 증거는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예컨대 서부 에이즈번 갈리프콜 광산 제17구역에서 발견되는 마정석과 다무스 슈테른베슈테크의 고대 다무스 신전 터에서 발굴되는 마정석 등이다. 이들 모두 원소 연대 측정법과 특이 마류 분석법에 의해 고대 마도 시대부터 존재해 온 행성 밖 물질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갈리프 신화에 등장하는 빛(Galipe)과 어둠(Kayal)의 본질을 파악해야만 한다. 천체 물리학자 솔리스톤 박사는 무거운 천체가 자체 중력에 의해 끝없이 수축되어 종국에는 검은 별이 될 것이라 예측한 바…….

    그리하여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검은 별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지름이 1인치도 채 되지 않는 공이나 다름없을 것이며, 그것이 대지 위에 실존한다면 대지는 순식간에 중력에 의해 찌그러져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공만 한 크기의 검은 별이라니. 그 단어를 마주한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다름 아닌 봉인을 발견할 때마다 마주하던 조그마한 어둠이었다.

    어쩐지 감히 다가가선 안 되는 진실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신화 속 태고의 존재를 밝혀내려는 인간이라니. 이래서 이단 취급을 받았었던 건가.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다음 장을 넘긴 시아는 이내 시야가 아찔해지는 감각에 경악하고 말았다.

    온통 빽빽한 동그라미와 정체 모를 메모가 페이지를 시커멓게 뒤덮고 있었다. 프레디 뮐러의 흔적이었다. 게다가 어지간히도 같은 곳에 반복해서 펜을 놀렸는지, 악령이라도 씐 사람이 주문을 적은 것처럼 종이가 우둘투둘 눌려있었다.

    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나마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인쇄된 활자를 읽어나갔다.

    [다음은 고대 유적지 중에서도 실제 사도의 무덤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지역이다. 해당 지역에서 측정된 마류 파장은 모두 -980mght 이상의 주기함수를 그리며, 이는 검은 별이 발산할 것으로 추정되는 파장과 매우 흡사한 형태의…….]

    “잠깐, 여긴…….”

    문장을 따라 움직이던 눈동자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르카나. 지르가나. 뤼스. 에이즈번. 술란. 다무스. 보테나. 맨덜랜드.]

    익숙한 지명이었다. 그것도 방금 전에 메이슨이 내밀었던 바람장미에서 보았던 지명이었다.

    ‘아까 미스터 비렌체와 라크시스가 그랬지. 이곳의 바람장미가 영 이상하다고.’

    책의 저자는 사도의 무덤이 있을 곳으로 특정 파장이 관측된 곳을 꼽았다. 검은 별이라는 미지의 천체를 신화 속 어둠(Kayal)의 본질로 가정하고, 검은 별이 내뿜을 것으로 예측한 파장을 고대 유적지에서도 발견했기 때문이란 근거를 들었다.

    시아는 검은 별의 서술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어둠이라니. 그것도 조그마한 공과 같은 크기로 말이다.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검은 별이 봉인 속의 어둠이라면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진다. 만약 그 가설이 맞다면, 검은 별의 파장을 쫓아 사도의 신전을 찾아다니던 프레디 뮐러는.

    ‘프레디 뮐러는 봉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마도 시대에 오기 훨씬 전부터 봉인을 찾아다녔던 거였어!’

    시아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운 바람장미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중 아르카나라고 적힌 영역의 바람장미 수십 개를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고작해야 수도의 행정구역 중 하나일 아르카나의 바람장미가 저렇게 많다는 건, 아르카나 내에서도 한정적인 장소의 바람(이젠 바람이 아니란 걸 알지만)을 정확히 측정해야 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시아는 팔방위의 모든 수치가 최고로 기록되어 동그란 모양으로 보이는 아르카나의 바람장미 한 장을 뜯어냈다.

    어쩌면 이 바람장미는 아르카나 중앙역이나 글레이셜 홀의 마력 파장을 기록한 그래프일지도 모른다.

    프레디 뮐러가 봉인을 찾아다녔다는 그녀의 가설이 맞는다면 말이다.

    뇌리를 스친 깨달음에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해. 들이켠 숨을 채 내뱉기도 전에 시아의 몸이 본능적으로 라크시스를 향했다. 입이 벌어진 상태로 시아가 라크시스를 부르려고 했을 때였다.

    “라크, 바람장미의 정체를 알았어요! 여기 책에……!”

    시아는 그대로 멈춰 섰다.

    “시아. 잠시 이걸 좀 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뒤돌아본 곳에는 낡은 일지를 멀거니 들고 있는 라크시스와 심각한 표정의 요르문, 충격받은 듯한 표정의 메이슨이 서있었다.

    * * *

    [시그무트 아 함 나타.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멸망을 막아야 한다, 멸망을 막아야 한다…….]

    [어둠, 어둠, 어둠. 사특한 어둠이 배회한다. 지하를 기어 다니는 그의 수족이 제국을 집어삼킨다.]

    [빨갛다. 빨강. 빨강. 흰. 흰. 흰 것이 검게 변한다. 붉은 것이 지나간 자리에 죽음만 남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이번에도. 이번에도…….]

    [눈알이 타버릴 것 같다. 뇌가 조각나 지옥의 바닥을 구른다. 끔찍하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아.]

    [신이여. 왜 저입니까. 왜 하필 저입니까. 왜…….]

    시아는 말없이 낡은 일지를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눈을 떼고 싶어도 도무지 뗄 수가 없었다. 섬뜩하게 반복되는 메모에서 외면할 수 없는 절박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엉망으로 번진 잉크 자국이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절규처럼 보였다. 시아는 일지의 겉면을 확인했다. 하단부에 ‘프레데릭 G. 뮐러’ 라는 서명이 조그맣게 적혀있었다.

    시아가 물었다.

    “이런 건 어디에서 찾았어요?”

    “책장 밑에 숨은 공간이 있더군요. 밟아보니 다른 곳과 달리 텅 빈 소리가 나기에, 책장을 치우고 카펫을 들추어보았더니 이런 비밀 공간이 있었습니다.”

    라크시스가 구둣발로 바닥을 밀어 보였다. 워낙 어두워 카펫이 깔려있는 줄도 몰랐었는데, 용케도 이런 비밀 공간을 찾아낸 모양이다.

    “카얄이 이곳까진 못 찾아냈던 모양이에요. 걸쇠에 쌓인 먼지와 녹을 보면 그간 아무도 이 공간을 열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누님, 듣고 계시죠?”

    요르문이 나무판자를 들어내며 불을 소환했다. 돌돌 말린 지도와 나침반, 수 권의 연구 일지와 이상한 계기판이 달린 기계 따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르문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며 횡재했다는 듯 말했다.

    “여기 완전 보물 창고예요, 누님. 아마 프레디 뮐러가 급하게 뤼스를 뜨려다 여기에 연구 자료를 숨겨두고 갔던 것 같아요.”

    메이슨은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그의 낯빛이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했다. 시아는 라크시스에게 슬쩍 물었다.

    “그런데 미스터 비렌체는 왜 저래요?”

    “본인이 오토마톤의 동력원으로 썼던 마정석이 광룡의 봉인이란 사실을 방금 전에 알았거든요.”

    책장 밑 비밀 공간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다름 아닌 메이슨이었다. 본인도 한때 연구실에 저런 공간을 만들어놨었다나 뭐라나. 어쨌든 경험을 토대로 프레디 뮐러의 비밀 공간을 발견해 낸 메이슨이 일지의 내용을 제일 먼저 읽어버렸고, 사도니 광룡이니 하는 내용에 그가 혼란해하자 라크시스가 진실을 슬쩍 알려준 모양이었다.

    “라크, 설마 다 말해준 거예요? 제가 시간 여행자라는 것도?”

    “아뇨. 그것까진 모릅니다. 다만 자신을 죽이러 왔던 검은 코트의 마법사가 신화 속 광룡이라는 걸 알고 충격을 좀 받은 것 같습니다.”

    하긴 그 정도면 충격을 받을 만하지. 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이슨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금 라크시스에게로 돌렸다.

    그런데 라크시스의 표정이 이상했다.

    “왜 그래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라크시스도 영 찜찜한 표정이긴 했지. 일지를 발견했다고 했을 때부터 말이야.

    “그보다, 시아. 일지의 뒷부분을 마저 읽어보시겠습니까?”

    라크시스가 손수 특정 페이지를 펼쳐 주었다. 평소보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왠지 겁이 났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는 거지.

    그가 내민 페이지의 첫 문단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있었다.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미래를 내다본다니, 이게 다 무슨 말이야?

    “라크, 제가 지금 잘못 본 거 아니죠?”

    “…아뇨. 보고 계신 그대로가 맞습니다.”

    [지식은 죽음이요, 호기심은 죄악이며, 무지는 축복이라. 금기된 지식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불러오니, 세월로 고이 덮어 영원히 잠들게 하라.]

    [모든 것은 작은 반지에서 시작되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작은 반지. 이건 분명 초대 뮐러 가주의 반지였다. 시아는 천천히 다음 장을 넘겨보았다.

    그녀를 맞이한 건 빛바랜 종이에 빽빽하게 차있는 문장들이었다. 일지에 적혀있던 것은 바로 프레디 뮐러의 회고록이었다.

    [서재에 꽂혀있던 이름 없는 책. 그것을 들추지 말았어야 했다.]

    [아버지는 서재의 모든 책에는 이름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철없던 어린 시절엔 그것이 서재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려던 아버지의 거짓말인 줄로만 알았다.]

    [텅 빈 책에 글씨가 나타났다. 초대 가주의 무덤으로 오라. 치기 어린 소년이었던 나는 그대로 뤼스로 향했다.]

    [진짜 무덤은 지하에 있었다. 부패하지 않은 가주의 시신이 나를 반겼다. 반지를 빼내자 시신이 한 줌 재로 변했다. 나는 홀린 듯이 반지를 꼈다. 그래, 그때 그 반지를 끼지 말았어야 했다.]

    [미래가 보였다. 일 분 후의 미래부터 수개월, 아니 수년 후의 미래까지. 쏜살같이 흐르던 시간의 끝에서 스무 해도 채 남지 않은 세상의 종말이 보였다. 제국이 불로 뒤덮였다. 광룡의 울음에 하늘이 찢어지고 사람이 죽어나갔다.]

    시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에, 라크. 초대 뮐러 가주의 반지가…….”

    “예. 프레디 뮐러에게 미래를 보여주었죠. 그것도 광룡이 나타나 마도 시대가 멸망하는 미래 말입니다.”

    라크시스의 눈동자가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미래를 보는 자. 프레디 뮐러는 시간 여행자인 시아 켈튼 외에, 제국에 다가올 종말을 알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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