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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83)화 (83/292)
  • 83화 

    * * *

    지옥도가 펼쳐진 푸른 절벽 위. 허공을 배회하던 까마귀의 눈이 새까맣게 번들거렸다.

    날짐승의 눈동자에 서로 엉겨 붙어 물어뜯고 싸우는 기사들과 국왕 에드먼드, 슈테른베슈테크 백작과 그녀의 손님이 고스란히 비쳐들었다.

    개미처럼 새까맣게 들판을 뒤덮은 인간들은 이제 누가 아군이고 적인지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어젯밤 이자벨라의 계획이 실패했던 건 알고 있었다. 제국군의 기습을 역으로 이용해 국왕을 조종하여 백작의 환심을 사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백작의 화력은 생각 이상이었다. 슈테른베슈테크의 포효는 제국군을 압도했었다.

    이자벨라는 계획에 실패했음에도 친위대를 물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백작령에 남아있었나 했는데.

    이런 사태를 만들어?

    까마귀는 창공을 낮게 질주했다.

    저주에 걸린 기사들이 백작의 기세에 종잇장처럼 떨어져 나갔다. 이내 저주가 역류한 기사들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갔다. 바짝 마른 미라로 변해 들판 위를 뒹굴었다.

    제물이 죽는 건 반길 일이다. 제물의 영혼은 저주의 거래에 따라 내게 귀속되니까.

    그러나 왕에게서 아직 붉은 심장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이자벨라는 현자의 별을 욕심냈다. 붉은 심장 하나도 제대로 얻어내지 못하면서 현자의 별을 탐내더니, 이젠 왕과 백작 모두를 죽이려 들었다.

    ‘미궁의 열쇠를 얻기 전에 죽여서는 안 된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까마귀가 울었다.

    [멍청하긴.]

    곧 까마귀의 눈동자에서 이채가 사라졌다. 지배에서 벗어난 날짐승은 자신이 왜 날고 있었는지조차 잊은 채 절벽을 벗어나 사라졌다.

    * * *

    같은 시각. 수도 엘 다무스의 중심, 왕궁.

    왕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하녀들은 잘 말린 빨래를 모아들고 삼삼오오 뒷길에 모여 걸었다. 관리들의 부름을 받은 시종이 서류를 들고 종종걸음을 쳤다. 시녀들이 회랑 바깥으로 잠시 몸을 내밀어 날아드는 나비를 구경했다.

    그때, 차분한 미성이 시녀들의 주의를 끌었다.

    “날이 참 좋지 않습니까.”

    천사를 닮은 금발이 하얀 성직 칼라 위에서 살랑였다. 금욕적인 얼굴이 왕비의 시녀를 마주치자 온화하게 풀어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시녀들은 그의 미성만을 듣고도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발자크 에이클레이.

    이자벨라 황녀가 제국에서 데려온 국교회의 사제였으며, 다무스에 국교회의 성당을 세우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제국에선 그를 위대한 선교자라고 칭했다. 국왕 에드먼드는 세속에 물들어 있던 자신에게 새로운 빛을 보여준 목자라며 발자크를 존경했다.

    “아, 발자크 사제님.”

    이자벨라의 시녀, 세머빌 자작 부인이 반색하며 인사했다.

    “왕비 전하께 가시는 길인가요?”

    “그렇습니다.”

    “전하께선 아직 예배당에 계실 거예요. 오늘도 기도를 드리고 계신답니다. 곧 태어나실 귀한 분을 위해 지극정성이세요.”

    이자벨라의 배 속엔 곧 세상 밖으로 나올 아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에드먼드와 결혼하자마자 들어선 귀한 왕손이었다.

    국교회로 개종했다고 하나, 다무스의 사람들은 여전히 갈리프 신화를 관습처럼 믿고 있었다. 다무스의 피를 이은 후손은 현재 국왕 에드먼드와 슈테른베슈테크의 백작인 아스타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왕가와 백작가의 대가 끊기면 어둠의 힘으로부터 왕국을 지켜줄 수호자가 없어질까 두려워했다.

    그런 와중에 이자벨라가 왕손을 가진 것이었다. 세머빌 자작 부인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사제님이 다무스까지 함께 와주셔서 정말 다행이지요. 아는 이 하나 없는 소국이잖아요. 왕비 전하께선 발자크 사제님께 정말로 많이 의지하고 계세요.”

    “제가 왕비 전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신의 종으로서 응당 해야 할 도리를 다한 것뿐인걸요.”

    “어쩜 이리 사제의 귀감이실까. 제국에 발자크 사제님 같은 분만 계셨더라면 왕비 전하께선 그런 고초를 겪지 않아도 되셨을 텐데.”

    사제의 귀감이라니. 발자크는 모든 게 그저 웃길 따름이었다.

    세머빌 자작 부인이 너스레를 떨었다. 왕비가 제국에서 고초를 겪을 때 가장 먼저 입방아를 찧어댄 것이 누구더라?

    “왕비 전하께서 찾으실 듯하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머, 죄송해요. 바쁘신데 제가 붙잡아 버렸네요. 어서 가시어요, 사제님.”

    그럼 이만. 발자크는 묵례하며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난 자리마다 사제를 존경하는 목소리가 구름처럼 내려앉았다.

    어리석은 것들.

    이토록 어리석은 것들이 또 있을까.

    궁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녀 상을 목에 걸고 있었다. 발자크는 제게 인사하는 인간들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그들을 눈으로 훑었다.

    육신에 갇힌 그들의 영혼은 잉크라도 쏟은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발자크는 영혼을 옭아매고 있는 거대한 운명을 보았다. 이 영혼들은 아무리 발버둥 치며 살아보았자 종국에는 어둠에 떨어질 터였다.

    왜냐고?

    그들의 영혼은 모두 나의 것이니까.

    황혼 국교회. 태고의 어둠, 카얄을 숭배하는 신앙.

    모든 것은 발자크 에이클레이의 계획이었다. 국교회의 사제로 시작해 대주교의 신임을 얻었다.

    그 후로부터는 거칠 것이 없었다. 모르간 대교구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교리 속에 교묘하게 저주를 심고 주신의 탄생 이전, 태고의 어둠을 가르쳤다.

    교세가 확장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수확은 상당했다. 발자크가 자리 잡은 곳이 제국의 수도, 모르간이었기 때문이다. 벌써 작은 영지 하나를 가득 채우고 남을 만큼의 영혼이 모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국교회의 신자라고 생각할 테지.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떨까. 자신들이 믿었던 신이 국교회의 주신 디아우스가 아니고, 외워왔던 성서가 이단의 성서였다는 걸 알면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들의 영혼이 실은 나의 부활을 위한 제물이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절망하게 될까.

    농도 짙은 영혼의 냄새가 폐부에 들어찼다. 발자크는 방금 열댓 명에 가까운 제물이 한꺼번에 죽었음을 알아차렸다. 죽음에 다다른 제물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자벨라의 짓일 터다. 아마 저주가 계속 역류하고 있는 모양이지. 저주가 제대로 걸리지 않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계속해서 친위대에게 저주를 걸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왕과 백작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이다.

    “참 멍청하지.”

    발자크는 한낮의 태양을 등지고 걸었다. 역광에 잠식된 얼굴은 마치 자정의 악마처럼 어둡고도 섬뜩했다. 그가 밟고 지나간 자리마다 잔디가 힘없이 시들었다.

    사제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는 어느덧 왕비궁의 정원에 도착했다. 이국적인 꽃이 흐드러지게 핀 가운데 너른 튤립밭 부지를 밀어버리고 들어선 이자벨라의 예배당이 이물질처럼 끼어있었다.

    예배당 입구를 지키던 왕비의 호위 기사가 발자크를 발견하곤 가볍게 인사했다.

    “왕비 전하께선 안에 계십니까.”

    “예. 들어가신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오늘따라 기도가 길어지시는 모양입니다.”

    왕비가 타인의 출입을 금지한 곳이었다. 신께 기도를 드릴 때 방해받는 것이 싫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호위 기사들은 발자크에게 예배당의 입구를 열어주었다. 왕비가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만큼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 하라 명했기 때문이었다.

    발자크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통로를 지나자 성녀 상이 굽어살피는 안락한 기도실이 보였다.

    기울어진 해와 달이 알록달록한 색유리를 입고 어둑한 예배당에 원색적인 자국을 남겼다. 낙인처럼 찍힌 황혼 국교회의 상징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마포가 깔린 제단, 그 위로 은촛대가 은은한 빛을 발했다.

    이자벨라는 없었다.

    오래된 가구 냄새가 났다. 발자크는 베일을 쓴 성녀 상을 향해 다가갔다. 성녀 상의 검지손가락을 쥐고 돌리자 성녀 상의 눈알이 끼기긱 옆으로 돌아갔다.

    그저 대리석일 뿐이었던 눈자위에 붉은 눈동자가 들어섰다. 황혼을 닮은 핏기 어린 눈동자였다. 이윽고 예배당의 밑바닥에서부터 묵직한 진동이 시작됐다.

    제단이 움직였다.

    돌과 돌이 맞물리는 소리가 바닥을 거칠게 긁으며 예배당을 울렸다. 바닥에 파인 가느다란 홈을 따라 제단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뽀얀 돌가루가 훅 풍겼다.

    제단이 사라진 자리에 시커먼 구멍이 뚫려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돌계단 양옆으로 횃불 한 쌍이 확 타올랐다.

    지하로 통하는 비밀 공간이었다.

    발자크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벽을 따라 걸린 횃불이 발자크를 맞이하듯 그의 걸음을 따라 연달아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방이 고요했으나 발자크의 귓가엔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렸다. 횃불 끝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은 기름 적신 천 뭉치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상과 단절될 정도로 한참을 내려갔을 때, 마침내 발자크는 바닥에 닿았다.

    피로 그린 저주의 진이 넓은 지하공간에 펼쳐져 있었다. 별 모양 진의 뾰족한 모서리마다 불 켜진 초가 놓였다. 저주의 제물로 사용되었을 수많은 미라가 곳곳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혼절하기 직전의 이자벨라가 부른 배를 움켜잡고 쓰러져 있었다.

    * * *

    시야가 가물가물했다.

    “욱, 우욱…….”

    이자벨라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코피가 터진 탓이었다. 이자벨라는 소맷부리로 코피를 문질러 닦았다.

    저주가 역류했다.

    “어째서 저주가 제대로 통하지 않은 것이냐. 무엇이 잘못된 거야, 대체 무엇이…….”

    실패할 리 없는 저주였다. 필요한 제물도 모두 준비했고 저주의 진도, 주문도 완벽했을 텐데.

    [레이디 켈튼을 죽여라.]

    에드먼드가 레이디 켈튼이라는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걸어둔 저주였다.

    그러나 저주는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다.

    “에드먼드가 죽을 뻔했다. 백작 또한 죽을 뻔했어. 아직 붉은 심장을 손에 넣지 못했단 말이다. 미궁의 문을 열어야만 하는데, 이렇게 일을 그르치다니. …하, 하하하. 둘 다 목숨은 붙어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해야 할까. 중요한 건 저주가 역류하는 걸 본 자들이 많다는 거야. 한두 명이 아니라고. 분명 소문이 퍼질 거야. 누가 저주를 부렸는지 캐내려고 하겠지. …아냐, 아니야. 제아무리 날고 기는 마법사라도 날 찾아낼 순 없어. 내 머릿속을 헤집어 기억이라도 훔쳐보지 않는 이상 저주를 부린 이가 누구인지 알 순 없지. 하하, 아하하…….”

    이자벨라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손끝이 극도의 불안감으로 달달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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