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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84)화 (84/292)

84화 

이자벨라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괜찮을 거야. 이단으로 몰아세울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케르딕에게 내가 받은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 줘야 한다고. 이대로 몰락해선 안 돼. 몰락할 수 없단 말이다…….”

케르딕. 나의 오라버니.

한때 누구보다 사랑했던 가족이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증오하는 배신자.

이자벨라는 감옥에 갇혀있는 수많은 다무스 신자를 떠올렸다. 이번 사태를 뒤집어씌울 자로 적합한 인물을 생각했다. 다무스 신전의 대사제가 아직 살아있던가. 그래, 그자에게 죄를 물어야겠다. 감히 왕의 친위대에 저주를 걸어, 개종한 왕에게 해코지를 하려 했다고.

거스러미가 뜯겨 피가 났다. 이자벨라는 하얗게 질렸다가 이내 피가 고여 드는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이자벨라는 더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씹어댔다.

순간 숨통이 옥죄어왔다.

“……!”

저주가 역류한 여파가 이자벨라의 몸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배 속이 요동쳤다. 아이가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배가 미친 듯이 당겼다. 심장이 벌벌 떨리고 호흡이 가빠왔다. 이자벨라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이를 악다물고 비명을 참아냈다.

예배당 바깥엔 호위 기사들이 있었다. 실낱같은 소리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는 정예이니 지하에서 난 비명 소리를 들을지도 몰랐다.

반쯤 이성이 날아간 상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였다.

바깥의 공기가 지하로 밀려들었다.

“……!”

제단이 열렸다.

이자벨라의 몸이 얼어붙었다. 제단의 비밀을 아는 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따각.

따각.

따각.

돌계단을 울리는 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배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마저 서서히 두려움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저절로 타오르던 계단의 횃불이 이내 이자벨라가 있는 지하공간의 벽까지 주르륵 밝혔다. 영혼을 기름 삼아 타오른 불이 어둑한 지하를 붉은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노을을 닮은 빛이었다. 천사가 힘을 잃고 악마가 깨어난다는 황혼의 상징. 바깥은 훤한 대낮이었으나 예배당엔 어스름이 깃들고 있었다.

계단을 집어삼킨 통로의 끝자락에서 검은 실루엣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

찬란한 금발에 오싹하리만치 경이로운 외모. 그러나 제빛을 가리려는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둘러 감싼 남자가 이자벨라에게 다가왔다.

“이자벨라.”

생리적인 공포가 이자벨라를 발끝부터 조금씩 잠식해갔다.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사도여.”

검은 사제복이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의 코트처럼 보였다. 발자크가 섬뜩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자벨라의 턱을 쥐어 올렸다.

“내가 네게 어려운 일을 시켰더냐?”

“…친위대의 저주가 역류했어요. 더는 저주에 걸리지 않더군요.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그들을 통제할 수가 없었어요.”

발자크는 고함을 질렀다.

“누가 친위대에게 그따위 저주를 걸라고 했지? 누가 왕과 백작을 죽이라고 했냐는 말이야!”

이자벨라는 달달 떨었다. 드레스가 쇠약해진 다리를 가려주어서 다행이었다. 이자벨라는 발자크의 눈을 계속해서 피했다. 일종의 변명 같은 행위였다.

“날 봐.”

발자크가 명령했다. 이자벨라는 목에 잔뜩 힘을 주었으나 무형의 힘이 억지로 그녀의 고개를 돌린 것 같았다. 속수무책으로 고개를 돌리곤 발자크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이자벨라는 영혼이 심연 속으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영혼이 육신을 떠나려는 것이었다.

죽는다.

이자벨라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듯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사도 미옌이여……!”

“닥쳐. 날 갈리프가 내린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악! 분노한 남자가 손을 내치자 이자벨라가 나동그라졌다. 이자벨라는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아아, 카얄이여……. 어둠(Kayal)의 사도, 카얄이여.”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아스타를 죽인 검은 마법사.

신룡 갈리프의 사도로서 한때 인간의 영혼을 인도하였던 자.

마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검은 코트의 마법사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존재.

광룡을 부활시켜 다시 한번 대륙을 불태워버린 악으로 시아의 일기장에 기록된 아홉 사도 중 하나.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의 정체는 고대 마법사 카얄이었다.

【 비틀린 운명 】

카얄은 이자벨라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이자벨라는 겁에 질려 납작하게 엎드렸다.

“우린 거래를 했지. 기억나느냐.”

“…당신은 제게 어둠을 모시는 성전을 짓고 어둠의 종복을 늘리라 하셨지요. 당신이 힘을 되찾을 수 있도록 미궁의 문을 열라 하셨습니다.”

“나는 네게 명예의 회복을 약속했다. 네게 황위 계승권을 되찾아주고, 네 어미의 명예를 드높여 주기로 했지.”

명예의 회복. 제국의 황족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명예였다.

카얄은 이자벨라의 턱을 붙잡아 올렸다. 이자벨라는 파르르 눈을 감았다.

‘음탕한 것! 아비 없는 아이를 배다니. 네가 그러고도 제국의 황녀라고 할 수 있느냐. 이자벨라, 아비가 누군지 말해, 어서!’

대노한 아버지가 뺨을 때렸다. 시녀들과 대신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황녀의 명예를 추락시키고 딸을 버렸다. 그러나 이자벨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으니까.

이자벨라는 교수형에 처해질 예정이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밴 죄였다. 이자벨라는 하루아침에 황궁에서 쫓겨나 탑에 갇혔다. 음습하고 더러운 탑의 독방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멸시 가득한 눈빛과 사람들의 손가락질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애를 썼을 뿐이었다.

‘이럴 순 없어요! 혼인 무효라니, 난 절대 순순히 이혼해 주지 않을 거라고요!’

‘그대가 이런 여자인 줄 몰랐어. 옛날엔 아름답고 총명했는데. 이젠 경박하다 못해 자식마저 제대로 기르지 못하는군. 이번엔 이자벨라의 핑계를 대고 로만슨 남작을 만났다지? 다음엔 누굴 만날 거지? 랜돌프 후작? 이자벨라가 제 어미를 닮아 사내를 그리 꼬시고 다니는 것인가, 응?’

‘그건 다 모함이에요. 폐하, 아시잖아요. 제가 폐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듣기 싫다. 그대가 정부가 되기 싫다 하여 난 황자까지 낳아준 황비를 내쫓았는데. 그대야말로 나를 배신하는군. 여봐라, 황비를 데리고 가거라.’

‘폐하, 내게 이러지 말아요! 이걸 놔라!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리 대하는 것이냐. 폐하, 폐하!’

끌려가며 절규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하다. 그 후로 어머니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이자벨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올려다본 시야에 카얄이 들어왔다.

카얄은 자신이 가장 절박할 때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탑에 갇혀 목이 매달리기만을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던 때에, 그는 거부할 수 없는 거래를 제안하러 왔다.

달이 뜨지 않아 유독 어두운 밤이었다. 빈 창가에 불현듯 아름다운 사내가 내려앉았다.

‘억울하지 않나?’

‘…어떻게 이 꼭대기까지 온 건진 모르겠지만, 날 동정하러 온 거면 그대로 나가주시오.’

‘오, 난 널 동정하러 온 게 아냐. 거래를 하러 온 거지.’

그는 순진한 소년처럼 창틀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고대에나 입었을 법한 하얀 튜닉 차림은 그의 존재를 짐작조차 힘들게 하고 있었다.

‘누가 널 이리 만들었는지 아나?’

‘…다 내가 잘못한 것이오. 그러니 그냥 떠나주시오.’

‘케르딕. 네 오라비 말이야.’

익숙한 이름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남자는 즐거이 웃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복권되었을 텐데. 이제 유일한 황자가 되었으니 황위 계승권도 되찾았겠지.’

뭐?

‘네 오라비가 널 모함하고, 네 어미를 끌어내리고, 제 어미를 복권시켰다. 아, 그러고 보니 황제가 지금 위독하다더군.’

‘아버지가……?’

‘아무도 네게 소식을 전해주지 않은 모양이지? 영혼을 보아하니 곧 세상을 뜰 것 같았는데.’

그때 아득히 먼 곳에서 종이 울렸다. 깊은 밤에 시작된 모르간 대성당의 종소리였다. 묵직하고 구슬픈 울림이 죄인이 갇힌 탑까지 파도처럼 밀려와 부서졌다.

황제가 죽었다.

이자벨라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었다.

‘네 아비는 네 어미와 널 내친 자인데. 그래도 아비는 아비라고 네 오라비에게 죽은 황제를 동정하는 것이냐.’

‘케르딕, 오라버니가…….’

배다른 남매였으나 케르딕은 친남매 이상으로 이자벨라와 돈독한 사이였다. 주변에선 황자 신분을 박탈당한 전 황비 소생의 케르딕을 멀리하라 일렀지만, 삭막한 황궁에서 이자벨라는 제게 유일하게 가족의 정을 주었던 케르딕에게 진심으로 의지했고 그를 혈육처럼 사랑했다.

난 오라버니를 믿었는데.

케르딕, 네가 나의 가족이라고 믿었는데.

남자는 창틀에서 내려와 이자벨라에게 다가왔다.

‘네 오라비는 곧 황제가 될 거다. 아마 눈엣가시 같은 황녀의 처형을 서두르겠지.’

그는 이자벨라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내었다.

‘케르딕이 일을 꾸몄다는 증거가 내 손에 있는데. 어때, 나와 손을 잡아보지 않겠나?’

외따로 버려진 탑엔 그녀와 종소리뿐이었다. 눈물을 닦아내던 남자의 손이 이내 이자벨라의 뺨을 감싸 안았다.

이자벨라의 눈엔 체념 따윈 없었다. 눈물로 핏발 선 흰자위가 독기를 품었다. 이자벨라는 남자의 손에 기댄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결심이 빨라서 좋군. 거래만 지켜준다면 서로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야, 황녀.’

턱을 붙잡아 올렸던 카얄의 손이 어느새 그날처럼 이자벨라의 얼굴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편히 기댈 수가 없었다.

그와의 거래가 틀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부터 미묘한 균열이 생겨 계획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카얄이 말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짓이지? 미궁의 문을 열기는커녕 미궁의 열쇠조차 얻질 못했는데 열쇠의 주인을 죽이려 했단 말이야?”

“…저는 거래를 이행하려 했을 뿐입니다.”

카얄이 비릿하게 웃었다. 역광을 받아 그림자 진 얼굴에 하얗게 찢어진 입매는 포식자의 웃음처럼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열쇠는 주인이 죽으면 그대로 사라진다고. 에드먼드가 네게 붉은 심장을 주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왕을 죽이려 해?”

카얄은 왕과 사제가 죽어버리면 그들의 영혼을 시신에 도로 처넣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사도를 목격한 두 사람이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로 분한 자신의 정체를 알아채 계획이 틀어진다고 해도, 열쇠의 주인이 사라져 미궁을 열지 못하는 일만은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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