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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82)화 (82/292)
  • 82화 

    에드먼드의 눈동자에 뾰족한 촉이 비쳤다. 바지를 적신 두려움의 산물이 의자의 다리를 타고 뚝뚝 떨어졌다.

    죽는다.

    그러나 화살은 에드먼드의 관자놀이 바로 직전에서 멈춰 섰다.

    “…실례하겠습니다. 국왕 전하.”

    검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에드먼드는 제 앞을 가로막고 선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백작의 손님으로 있던 자였다. 자신이 아스타에게 준 목걸이를 보란 듯이 걸고 있던 여자. 감히 백작의 등 뒤에 숨어 일국의 왕을 조롱하였던 사람.

    “괜찮으세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햇빛을 등진 여자의 머리카락이 일순 새하얀 은발로 보였다.

    ‘……!’

    여자는 인간의 모습으로 대지 위에 현신하였다는 고대의 신을 꼭 닮아있었다.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외로움이 에드먼드의 정신을 압도했다.

    “넌, 너는…….”

    “아, 죄송해요. 괜찮냐는 말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한테 해야 하는 건데…….”

    레이디 시아 켈튼.

    눈을 깜빡인 사이에 레이디 켈튼은 검붉은 머리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지나치게 평범한 여인이었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그녀가 소매로 손을 꽁꽁 감싸 매고 제 무릎 위의 미라 머리를 툭툭 쳐서 바닥으로 굴려버렸다.

    으, 징그러워. 시아가 몸서리를 쳤다.

    “국왕 전하. 일단 저랑 같이 몸을 피하시는 건 어떠실까요?”

    에드먼드는 덜덜 떨리는 다리로 일어나 시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엔 알 수 없는 단단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은발의 마법사가 있었다.

    저주에 눈이 돌아 에드먼드에게 달려드는 수백의 친위대가 그의 손짓 한 번에 사정없이 밀려났다. 성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오로지 왕만을 따를 것처럼 굴던 기사들은 더 이상 에드먼드를 알아보지 못했다.

    친위대 없이 버려진 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력함이 밀려들었다. 왕관을 빼앗기고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어젯밤 슈테른베슈테크 영지를 찾았을까. 백작은 내게 화가 나있었지. 내가 보낸 선물을 보란 듯이 다른 이에게 줘버리고는. 축객령이라도 내리듯 다무스를 위해 제를 올리겠다고 했었다.

    국교회에선 주신 디아우스를 제외하곤 그 어떤 신도 믿어선 안 되니까.

    그런데 내가 왜 개종을 하였던가?

    이자벨라. 그래 이자벨라 때문이었지. 나의 사랑하는 이자벨라.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하는 나의 아내. 당신을 위해선 심장이라도 꺼내 바칠 수가 있소.

    사랑하는 이자벨라.

    사랑하는, 나의.

    사랑하는…….

    누구를?

    황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제게 검을 내밀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함께 흙바닥에서 뒹굴고, 너른 들판을 쏘다니며 들꽃을 꺾어 귀에 꽂아주던.

    태양을 닮은 사람.

    ‘이건 이자벨라가 아니야.’

    내가 정말로 이자벨라를 사랑했던가?

    의문이 드는 순간, 눈앞이 어질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들과 이자벨라와 행복했던 순간들이 한데 엉켜 얇은 막이 되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에드먼드 전하.’

    ‘내게 구애하는 건가요? 난 나보다 잘난 남자가 아니면 만날 생각이 없는데. 하하, 농담이에요.’

    ‘정말 나를 사랑하나요, 에드먼드?’

    ‘내게 심장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다니. 왕국을 주겠다는 말보다 더 감동인걸요.’

    ‘당신의 청혼을 받아들이겠어요. 에드먼드.’

    에드먼드는 그 얇은 막이 지금껏 자신의 뇌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에드먼드. 이 아이가 공주였으면 좋겠나요, 왕자였으면 좋겠나요?’

    공주든 왕자든 모두 왕비를 닮아 아름답고 영특할 거요. 사랑하는 이자벨라.

    ‘그리 말해주는 건가요? 상냥하기도 하지.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네요.’

    무슨 선택?

    ‘…당신이요. 에드먼드 당신을 선택한 것을요.’

    에드먼드의 정신은 얇은 막을 떼어내려 애썼다. 뇌에 본래부터 붙어있던 껍질처럼, 얇은 막은 떨어져 나가며 극한의 고통을 유발했다.

    에드먼드는 머리를 움켜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국왕 전하!”

    시아는 화들짝 놀라 에드먼드를 부축했다.

    시야는 여전히 캄캄했다. 들풀을 짚고 바닥에 쓰러진 채, 에드먼드는 빛바래 너덜거리는 얇은 막을 돌이켜 보았다.

    그 막은 에드먼드가 깊은 곳에 묻어둔 진짜 기억을 덮고 있었던, 저주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거짓 포장지였다.

    땅에서 물이 샘솟듯 억눌렸던 기억들이 터져 나왔다. 온통 검기만 하던 눈앞이 찬란한 태양 빛으로 물들어 갔다.

    아스타.

    아아, 아스타…….

    그간 보고 듣고 느껴왔던 세상이 모두 거짓이었다니. 어째서, 왜 지금껏 알아채지 못했을까.

    그리고 왜 지금껏 알아채지 못했던 걸, 방금 전까지 아스타를 바라보면서도 알아채지 못했던 걸 하필 이 순간에 깨달았을까.

    에드먼드는 눈물을 흘리며 시아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은발처럼 보였는데. 레이디 켈튼이 내민 손에선 기묘한 믿음이 느껴졌다. 저주에서 벗어난 후 무엇도 함부로 믿어선 안 된다고 방금 전까지 다짐하던 터였다.

    에드먼드는 시아의 손을 다시 한번 잡았다.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레이디 켈튼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에드먼드는 결심하듯 대답했다.

    “…그래. 날 일으켜다오.”

    * * *

    “젠장, 이게 다 뭐야!”

    “으아아악! 로드 켈튼! 미, 미라예요!”

    루드윅은 요르문이 제게 던진 기사를 얼떨결에 받아안았다가 기겁하며 내던졌다. 투구 안의 머리가 바싹 말라붙어 건어물처럼 변해있었다.

    저주에 걸린 건 한 명이 아니었다.

    첫 번째 기사가 피거품을 물고 죽어버린 이후 남아있던 친위대가 모조리 눈을 뒤집으며 사람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요르문! 나머지를 부탁해!’

    목이 떨어진 첫 번째 기사 뒤로 검을 빼어 들고 기다리던 기사가 있었다. 친위대 맨 뒤편에서 기사 하나가 에드먼드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누님!’

    ‘라크, 어서요!’

    시아의 재촉에 라크시스가 그녀를 잡고 에드먼드 앞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라크시스가 도착한 동시에 화살이 멈췄다. 왕의 머리를 꿰뚫기 직전이었다. 루드윅은 당황한 나머지 얼이 빠졌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이야…….’

    친위대의 목표는 현장에 있는 모든 생명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주군도, 이 영지의 주인도 알아보지 못했다. 성의 사용인들과 제례 의식을 구경하러 온 영지민들은 물론, 에드먼드와 아스타 그리고 같은 친위대 기사까지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스타가 친위대에게서 영지민을 보호하며 검을 빼 들었다. 아스타가 전방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녀의 뒤에 있던 기사 하나가 흙을 헤치고 깨어난 시체처럼 사지를 뒤틀며 아스타에게 달려들었다.

    ‘주군!’

    그 광경을 보자마자 알렉스가 아스타에게 달려갔다. 아스타의 양옆엔 거대한 불의 정령이 시뻘건 불길을 뿜어대고 있었다. 지하 감옥에서 자그마한 불티인 척 날아다니던 정령들이었다.

    순식간에 요르문과 루드윅만 덩그러니 남아버렸다. 요르문은 루드윅의 뒷덜미를 잡고 날아드는 화살을 피하며 생각했다.

    이걸 어쩌지.

    시아는 놀랍도록 친위대의 공격을 잘 피해 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친위대가 일부러 시아만 빼고 공격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시아는 라크시스의 등 뒤에 숨어서 성의 사용인들을 대피시키는 중이었다.

    누님이 부탁했으니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요르문은 결국 재앙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을 지키러 뛰어들었다. 그의 손이 쉼 없이 움직여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을 밟은 영지민들이 공간을 이동해 안전한 곳으로 사라졌다.

    저주에 걸린 기사는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공격을 해댔다. 요르문은 끊임없이 주문을 외워대며 버럭 소리 질렀다.

    “자네 고고학자에 괴담 수집가라며! 미라를 보고 겁을 먹으면 어쩌자는 거야!”

    “무방비한 상태에서 무서운 걸 보면 저도 겁먹는다고요!”

    “로드 젤마니, 자네 군인 출신이지?”

    “예? 예에.”

    “받아! 지금은 자네 지켜줄 정신이 없어!”

    요르문은 루드윅을 돌아보지도 않고 시커먼 물건을 품에서 꺼내 냅다 던졌다. 루드윅은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요르문이 던진 건 리볼버 권총 한 자루였다.

    “사, 사람을 죽이라고요?”

    “그럼 자네 눈엔 저게 사람으로 보이나?”

    로드 젤마니, 가멜에서 전쟁도 해봤다며! 요르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기사 하나를 들판에 처박았다.

    “하지만 군인이라고 해서 살인에 익숙한 건…….”

    루드윅이 중얼거렸다. 트라우마를 가지고 퇴역하는 군인이 왜 생기겠는가. 당장 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야 일단 적을 죽이고 보지만.

    식민 전쟁이 한창이던 때, 가멜의 부족 마을을 샅샅이 훑고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제발, 제발 아이만은 살려주세요…….’

    ‘뭐라는 거야? 이 검둥이들 말 아는 사람 있어?’

    ‘…아이만은 살려달랍니다.’

    ‘그래? 아아, 자네가 그 책상머리 학자 출신이라던 사람이었지. 그럼 젤마니 소위. 자네가 방아쇠를 당기게.’

    ‘…예?’

    ‘우린 대 세페란테 제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 위대한 붉은 군대다. 소위는 황제 폐하의 명에 불복할 셈인가?’

    대위의 총구가 뒤통수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둥근 금속의 감촉은 차갑고도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루드윅은 깨달았다. 그 어떤 귀신보다도, 괴담보다도 무서운 건 바로 인간이었다.

    ‘불복한다면 소위부터 머리에 구멍을 뚫어주지.’

    루드윅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무고한 자를 죽여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살인에 익숙해지지 못한다.

    마법진에 부딪혀 기절한 기사를 내팽개치던 요르문이 루드윅에게 다가와 어깨를 잡아챘다.

    요르문은 루드윅을 마구 흔들었다. 소년 같은 외형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루드윅의 거대한 덩치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정신 차려, 루드윅! 어차피 이 총은 누군갈 죽이지 못해. 그러니까 안심하고 갈기라고!”

    죽이지 못한다고? 루드윅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건 누님을 위해 만든 거니까.”

    총신을 거머쥔 루드윅의 손에 힘줄이 섰다. 요르문은 저주에 걸린 기사들을 상대하러 자리를 떠버렸다.

    평범한 농부들이 잘 훈련받은 기사들에게서 도망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흐릿한 시선 너머로 난데없이 닥친 재앙에 절규하는 사람들이 점점 또렷하게 보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 위로 거대한 갑옷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리볼버 안쪽에서 태엽이 철컥철컥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총알이 담겨있어야 할 자리엔 초록빛 마력이 가득 찬 실린더가 달려있었다. 마치 치유사의 마력 같은 색이었다.

    루드윅은 양손으로 리볼버를 꼭 쥐고 눈앞을 겨냥했다.

    “로드 케에엘트으으은! 믿겠습니다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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