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68)화 (68/292)
  • 68화 

    “아, 깜짝이야.”

    잔뜩 충혈된 눈이 창살과 가장 가깝던 요르문에게 광적으로 달라붙었다. 도대체 며칠을 갇혀있었던 건지 머리카락은 썩은 밧줄처럼 변해있었고 넝마가 된 옷에선 악취가 심하게 났다. 남자가 갇혀있는 창살에도 희미한 마력이 흘렀다.

    요르문은 심드렁하게 한 번 쳐다보곤 무시했다.

    “누님, 제가 이쪽에 있어서 다행이었네요. 이런 걸 누님이 보게 할 순 없죠. 우리 여기서 얼른 나가요.”

    “자, 잠깐만 기다려! 도대체 거기서 어떻게 나온 거지? 백작의 마법을 어떻게 푼 거냐?”

    “별거 아니던데.”

    저 멀리 그들이 걸어 들어왔던 지하 감옥의 계단이 보였다. 아까 파티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던데, 모두 거기에 간 모양인지 지하 감옥을 지키는 기척도 몇 없었다. 라크시스의 손에 다시금 지팡이가 생겨났다. 일행이 계단을 올라가려 했을 때였다.

    “여긴 지옥이야! 백작은 악마라고! 나, 나도 여기서 내보내주으아아아악!”

    다급하게 창살에 매달린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전깃줄이 터질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나면서 위험한 빛무리가 창살에서 일렁이다 사그라들었다.

    남자가 목구멍이 찢어져라 악을 쓰며 바닥을 굴렀다. 그의 손바닥은 지옥 불에 담갔다 뺀 것처럼 시뻘겋게 벗겨져 있었다. 뜨거워, 뜨거워!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고통으로 남자가 미치광이처럼 신음을 토했다.

    익숙하고도 끔찍한 소리였다. 그녀가 의술사로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마주했던 광경. 남자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의술사는 환자의 고통을 외면해선 안 된다.

    결국 시아의 직업적 본능이 그녀의 발길을 낯선 남자에게로 돌리고 말았다.

    “잠시만요!”

    그녀가 계단을 뛰어 내려가자 라크시스가 곧장 뒤따라갔다. 라크시스의 손 끝에서 자물쇠가 부서지고 이내 창살이 열렸다.

    “이것도 필요하죠?”

    “아, 네. 고마워요.”

    그가 내민 건 아까 감옥에 들어오면서 뺏겼던 시아의 가방이었다. 시아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물을 꺼내 환부에 부었다.

    “라크. 이 사람 손목에 있는 밧줄 좀 풀어줘요. 곧 손이 부어오를 거라.”

    “알았어요.”

    “으, 아으으, 흐윽…….”

    “조금만 참아요. 열감도 가라앉히고 상처도 세척해야 되니까.”

    요르문, 물 만들어줄 수 있어? 물론이죠. 시아가 붓고 있던 병이 비어갈 즈음 요르문이 때맞춰 물을 만들어냈다. 미지근한 물이 환부 위로 끊임없이 흘렀다.

    그렇게 수십 분이 흐르는 사이 시아는 거즈와 바늘, 의술 기구들을 소독했다. 피부가 밀려 벗겨진 남자의 양손엔 크고 작은 물집이 곤충의 알처럼 다닥다닥 올라와 있었다. 시아는 본인의 손까지 소독한 후에 물집을 조심스레 터뜨리곤 치유 마정석에 수식을 걸었다.

    “우, 우아으, 뜨거워, 아으…….”

    “원래 화상 치료가 고통스러운 편에 속해요. 안됐지만 여기선 이런 응급처치밖에 못 해주네요. 상처는 만지지 말고, 물도 닿게 하지 말고. 이런 시궁창에서 그게 가능할진 모르겠지만요.”

    마정석에서 냉기가 흘러나와 생고기처럼 변해버린 붉은 환부를 감쌌다. 시아는 항생제와 진통제, 파상풍 주사를 차례로 놓았다. 메이슨 비렌체와는 달리 남자는 주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주사에 관심을 갖기에는 고통이 더 컸던 탓이었다.

    진물이 올라오는 부위를 닦아내고, 깨끗한 거즈를 붙였다. 갇혀있는 내내 먹은 것도 없었는지, 남자는 울부짖다 이내 지쳐 잠들어 버렸다.

    한참을 남자를 돌보던 시아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라크시스와 요르문이 그녀의 곁에 줄곧 있었다.

    창살 밖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루드윅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케이틀린, 당신은 의사인가요?”

    “정확히는……. 의술, 아녜요. 뭐, 비슷한 거라고 해두죠.”

    이젠 설명하기도 귀찮네. 시아는 감옥 벽에 사슬로 매달아 놓은 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앉자 요르문과 라크시스도 따라 앉았다. 기껏 빠져나온 감옥에 다시 들어갈까 갈등하던 루드윅도 결국 그들의 맞은 편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문이 열린 감옥이었으나 그 누구도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들 지치기도 했거니와, 라크시스의 마법을 보고 난 이후로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시아는 벌려놓은 의술 도구를 정리했다.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석상처럼 우두커니 앉은 라크시스를 바라보았다.

    “라크.”

    “예.”

    “아까 알렉스란 사람이 말했던 현자의 별 말이에요.”

    “광룡의 봉인 같다는 말씀이시죠.”

    시아의 시간 여행은 광룡의 봉인을 위주로 벌어진다. 봉인이 불안정해져서 마류 이상 현상이 나타나면 그녀가 과거로 끌려오는 식이었다.

    지금의 시아는 시간 여행 도중에 또 시간 여행을 하게 된, 말하자면 액자식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인 셈이었다. 일기장에도 적혀있지 않은 이런 현상을 만들어낼 만한 건 광룡의 봉인밖에 없었다.

    뉘앙스를 보건대 현자의 별이라는 물건을 탐내 제국에서 첩자를 계속해서 보내온 듯했다.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이 살아있던 시기엔 제국이 끊임없이 씨즐턴을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현자의 별이란 아마도 그런 제국에게 방해가 되는 물건이었을 터. 광룡의 봉인은 광룡의 심장에 담긴 힘을 봉인한 물건이었다. 봉인의 마법 자체는 미미해도, 그 안에 담긴 마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할 것이다. 백작은 마류 이상 현상을 통제할 수 있는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였으니, 현자의 별이라 불리던 봉인 속 마력을 이용하는 것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백골이 들고 있던 상자에 아무것도 없었던 이유가 있었네요.”

    “3518년에는 봉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겁니다.”

    “파괴되거나 유실되거나… 카얄이 가져간 게 아니었어요.”

    “봉인이 스스로를 감춰둔 모양입니다.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이 살아있던 시기에 말이죠.”

    요르문이 중얼거리며 끼어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봉인이 정말로 살아있는 존재 같단 말이야.”

    오토마톤의 심장을 만져보았던 시아와 라크시스, 요르문은 공감하는 이야기였다. 광룡의 심장을 봉인한 아홉 명의 사도. 그들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성공시킨 봉인이 실제 사도들의 신체를 매개로 한 봉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세 사람은 진작 하고 있었던 터였다.

    “아까부터 광룡의 봉인이니 하시던 건 갈리프 신화를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로드 젤마니.”

    “이래 봬도 저 신화학자입니다. 고대 마법사께선 살아있는 신화 그 자체이시니 같잖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요.”

    감옥에 갇혀 사형 선고를 받았던 순간부터, 적나라한 치료 현장을 보기까지. 단시간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루드윅의 몸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루드윅은 어느새 학자이자 괴담을 찾아다니던 수집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괴담을 찾으러 전쟁터까지 불사하던 그는 어지간한 사람 저리 가라 하는 평정심과 담력, 상황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목격한 모든 것은 무엇의 단서가 되는가?

    그건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의 괴담과는 차원이 다른, 그가 오랫동안 추적해 온 또 다른 괴담의 실체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봐, 루드윅. 그 얘기 들었는가?’

    ‘왜 그 메이덜린 쪽에서 일어났던 연쇄 살인 사건 말이야. 우리가 한참 로렌 허슬러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했었잖나.’

    ‘그 여자가 사실 요르문 켈튼의 누이라더군.’

    ‘뭐?’

    ‘해밀턴 경감이라고 내가 아는 경찰이 거기에 있는데 말이야. 로렌 허슬러가 켈튼의 마차를 타고 다녔다는 거야. 그래서 거주민 명부를 살펴보니 글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친척 동거인이 켈튼 저택 앞으로 등록되어 있었다지 뭔가?’

    ‘보통 수상한 게 아니야. 해밀턴 말로는 그 여잔 귀족답지 않게 옷차림도 이상하고, 웬 이상한 치료를 하기도 했다는데.’

    ‘의사인가? 레이디가 선택하기엔 어려운 길인데.’

    ‘그냥 의사면 차라리 다행이지. 본인을 웬 의술사라고 했다더군. 듣도 보도 못한 치료를 하면서 말이네.’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야. 그때 그 위폐 사건의 주인공이 정말로 로렌 허슬러 같지 않나? 칠십 년 후의 미래라면 그런 여인이 있을 법도 하잖나.’

    공포로 억눌렸던 탐구 의욕이 다시금 꿈틀거린다. 지금껏 루드윅을 온갖 오지로 밀어 넣은 원동력이자, 수많은 괴담의 실체를 밝혀낸 직감이 그의 뇌를 강하게 흔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세 분은 괴담이 아니라 현자의 별이라는 유물을 찾으러 오신 거군요.”

    루드윅은 천천히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광룡의 봉인일지도 모르는 유물을 찾기 위해 절 이용하신 거란 말씀이시고요.”

    두 마법사를 차례로 배회하던 시선이 이윽고 본인을 케이틀린이라 명명한 여인에게 고정되었다.

    “로드, 젤마니. 저희는 당신을 이용한 게 아니라…….”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가 일렁이는 횃불처럼 잘게 떨리고 있었다. 루드윅은 알아챘다. 그 떨림이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에서 겪은 작금의 괴담과는 관련이 없음을.

    “다들 이런 상황이 와도 별로 당황하지도 않으시고.”

    아, 이런 상황이라는 건 난데없는 시간 여행이나 내일 아침에 목이 뎅겅 잘려나갈지도 모르는 그런 걸 말하는 겁니다.

    루드윅은 천천히 일어나 케이틀린을 향해 걸어갔다. 바닥에 누운 환자를 넘어서는 구둣발이 찰박 하고 시궁창을 밟았다.

    “마침 제가 현자의 별에 얽힌 신화와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르카나 중앙역에 갑자기 나타난 여자. 의사를 연상시키는 흰 가운. 원인을 알 수 없었던 괴담 수집기의 반응. 3587년 발행 비스크화를 보고 유독 소스라치게 놀라던 사람.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녀를 애타게 찾던 라크시스 옌과 그녀를 누님이라 부르던 요르문 켈튼. 루드윅은 그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찔러 죽일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라크시스를 주시했다.

    고대 마법사가 저렇게 반응할 정도면 확실하다.

    ‘라크시스 옌이 숨기려 한 연인!’

    루드윅은 희열에 젖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괴담의 실체가 눈앞에 있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조건을 건다는 건지. 로드 젤마니께선 상황 판단이 잘 안 되나 보군.”

    라크시스의 악다문 잇새로 살벌한 위협이 흘러나왔다.

    “오, 고대 마법사님.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침내 루드윅은 케이틀린의 앞에 도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