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69)화 (69/292)
  • 69화 

    “제가 요구할 건 단 두 가지. 여기서 빠져나갈 때까지 제 목이 무사히 붙어있을 수 있도록 두 분 마법사께서 절 지켜주시는 것과.”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상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는 루드윅은 서임을 받는 기사처럼 가히 맹목적이었다.

    “케이틀린이 제 질문에 답을 주시는 겁니다.”

    아아, 수없는 시간 여행이 그녀를 이토록 담담하게 만들었을까. 괴담에 휘말려 내일 아침 목이 떨어진다고 해도 이토록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일 거야.

    “…질문을 말씀하세요.”

    루드윅은 케이트린의 한 손을 보물을 잡듯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생동하는 맥박의 감각이 그녀가 허상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존재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루드윅에게 있어 그녀는 황제보다도 귀중한 사람이었다.

    “로렌 허슬러, 아니 레이디 켈튼. 당신의 지갑 안엔 몇 년도의 지폐가 있죠?”

    【 희대의 마녀, 냉혈의 사자 】

    결국 루드윅은 원하는 바를 이루고야 말았다.

    “누님에 대해 허튼소리를 하면 곧바로 죽여버릴 거야.”

    감옥 문턱을 나서며 요르문이 으르렁거렸다.

    “하하, 살벌하시긴. 저 진짜 어디 가서 말 안 할 거라니까요.”

    요르문이 몇 번이고 살해 협박을 건넸지만 이미 기분이 최고조에 달한 루드윅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루드윅의 질문을 들은 시아가 라크시스에게 말을 건네곤 두 사람 사이에 몇 마디가 오고 간 후에 나온 결론은 이거였다.

    저런 유형의 인간은 원하는 걸 알아낼 때까지 집착할 것이다. 차라리 그가 짐작하는 진실까지만 얼른 알려주고 그에게서 봉인에 대한 정보를 얻자.

    한숨을 푹 내쉰 시아가 한참을 말을 골랐다.

    ‘…다양할 거예요. 멀게는 3570년대부터 3587년까지. 이 정도면 답이 됐나요?’

    ‘그럼 당신이 정말 고대 마법사의 연…….’

    ‘거기까지만 해요. 내가 시간 여행자라는 걸 확신하기엔 이 정도 정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정체를 밝힌 레이디 켈튼은 한겨울 서릿바람처럼 쌀쌀맞았다. 어차피 더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고대 마법사가 아까부터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크시스 옌의 연인 여부는 가십에 가까운 정보니까. 아쉽지만 루드윅은 한발 물러났다. 자극적인 가십을 파헤치는 건 때때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가십의 주인공이 위험한 인물일수록 더욱 그랬다.

    루드윅은 끼고 빠지는 타이밍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가 얻은 귀중한 정보(시간 여행자의 실존) 역시 어디에도 발설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정보는 아는 사람이 적을 수록 오래 보존되는 법이다.

    “그나저나 이름은 끝까지 안 알려주실 겁니까, 레이디 켈튼?”

    “알려줬잖아요. 로렌 허슬러 아니면 케이틀린. 편한 대로 부르라니까요.”

    시아는 귀찮다는 듯 대꾸하다가 문득 루드윅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경로를 떠올렸다.

    이 사람, 메이덜린 경찰에 건너 아는 사람이 있다지. 거주민 명부를 통해 레이디 켈튼의 존재를 알았다면 이름은 진작 확인하지 않았을까.

    시아는 앞서가다가 몸을 홱 돌려 루드윅을 붙잡았다.

    “잠깐만, 이미 알고 있으면서 물어보는 거 아녜요?”

    “하지만 당신에게 확답을 듣고 싶었는걸요.”

    레이디 시아 켈튼. 루드윅이 슬그머니 웃으며 덧붙였다.

    어이가 없어서. 뒷골이 확 당겼다. 도대체 언제부터 알아챈 걸까. 애초에 봉인을 찾자고 루드윅 젤마니와 함께한 게 잘못 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차피 난 시간 여행에서 광룡의 봉인을 무조건 만나게 되어있는데 말이야.

    ‘아냐, 루드윅과 함께하든 말든 로렌 허슬러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있었겠지.’

    시아는 한숨을 쉬었다. 루드윅에게서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의 괴담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봉인의 단서를 찾았다며 좋아했던 기억을 까맣게 잊은 그녀였다.

    “이 사람은 두고 갈까요?”

    마지막으로 감옥을 빠져나온 루드윅이 발치에 엎드려 애원하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화상을 입은 손바닥을 쓸 수 없어 불편한 팔로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온 것이다.

    “누님, 두고 가요.”

    “당신들도 제국민이잖아. 응? 이 야만의 땅에 동향인을 버려두고 갈 셈인가?”

    언제 봤다고 동향인이람. 요르문이 투덜거렸다.

    남자는 자신을 제국에서 온 사제라 했다. 감옥이 어둡고 남자의 몰골이 엉망이라 검은 수도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남자가 깨어나서 말해주기 전까진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최근 들어 씨즐턴에 입항하는 상선이 백작에 의해 무작위로 공격받고 있다고 했다.

    ‘도대체 왜요?’

    ‘왜냐니, 이게 다 백작 때문이라니까! 그 여자가 제국과의 교역을 거부하고 있거든. 웃기는 일이지. 다무스 같은 조그만 나라에서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제국을 상대로 배짱을 부리는지. 찻잎만 아니었어도 별 볼 일 없는 섬 주제에.’

    모든 교역을 거부하는데 상선은 무작위로 공격한다고? 그나저나 다무스라니. 시아는 새삼 그녀가 이백 년 전으로 끌려왔음을 실감했다. 다무스는 갈리프 신화에 등장하는 사도의 이름이자, 씨즐턴의 옛 지명이었다.

    ‘사람이 덩달아 죽는 건 예삿일도 아니야. 다무스 땅을 밟은 나 같은 사제들도 죄다 끌고 가서 감옥에 가두지. 어젠 옆 방의 둘이 죽었어.’

    이젠 내 차례야.

    남자의 흐느낌 속에서 라크시스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에 이런 일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무슨 일인데요?’

    ‘다무스산 홍차의 가격이 지나치게 급등한 적이 있었죠. 동대륙산 찻잎이 급히 시중에 풀리긴 했지만, 다무스산 홍차가 더 고급품이라 귀족들이 한동안 티 파티를 여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동대륙산 찻잎이요? 남대륙 가멜산이 아니라요?’

    ‘이 시기의 가멜은 프리드실 공국의 식민지였습니다. 3300년 말경이면 제국도 한창 가멜을 차지하려 애쓸 시기였겠군요.’

    라크가 오래 살긴 했구나. 시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역사 속 사건들을 기억에서 꺼내 읊는 라크시스가 문득 신기하게 느껴졌다.

    ‘당시엔 찻잎을 실은 제국행 상선이 해적에게 공격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와, 라크는 그 당시 상황들을 다 기억하고 있나 보네요.’

    ‘덕분에 조그만 섬의 위력을 알게 되었죠. 홍차며 다기며 고급품들의 물가가 상당히 올랐으니까.’

    다무스의 사제들이 깊은 산속에서 속세와 연을 끊고 고행을 하며 일궈낸 차밭은 다무스, 그러니까 현 씨즐턴을 차의 본고장으로 이름나게 했다. 아침을 차 한 잔으로 깨우고, 저녁을 차로 마무리하는 제국의 관습 역시 씨즐턴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니까.

    찻잎이 유명한 다무스에서 다기가 유명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뜨거운 찻물을 부어도 쉬이 깨지지 않는 씨즐턴(시아에겐 씨즐턴이 더 익숙했다)산 덩굴무늬 다기는 제국 귀족들이 가장 사랑하는 물건이었다.

    남자가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백작은 불신자야! 신을 배반하고 악마를 숭배하는 자들의 틈바구니에 신실한 신의 종을 두고 가선 안 되네. 제발, 제발 살려주게. 응?”

    바짓단을 붙잡힌 루드윅이 어쩔 줄을 모르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요르문이 천천히 일행을 거슬러 다시 감옥으로 들어갔다. 요르문이 남자의 앞에 삐딱하게 쭈그려 앉자, 남자의 눈에 일말의 희망이 서렸다.

    “그, 그래! 당신도 마법사지! 아까 보니 보통 고위급 마법사가 아니던데. 제발 항구까지만 데려다주게. 거기에 모르간 대교구 선교사단이 탄 배가 있어. 당신이라면 날 데리고 나갈 능력이 되잖나, 응?”

    “이봐.”

    일렁이는 횃불이 소년미가 남은 얼굴 위로 기묘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시아를 누님이라 부르며 풋풋하게 웃던 인상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함부로 건드릴 만한 사람이 아니다. 정녕 저 남자가 열차에서 제게 친구라 부르라던 마류학자가 맞는가? 루드윅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

    요르문은 남자의 목에 걸린 성녀 상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읊조렸다.

    “사제가 죽음을 두려워하면 쓰나. 육신은 껍데기요, 죽고 나면 신의 곁에서 영생을 누릴 영혼이 이렇게 삶을 구걸해도 되는 거야?”

    “이, 이익! 본래 삶이란 신이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네! 그걸 함부로 버려두는 것도 죄악이란 말이야!”

    “그래? 내가 아는 국교회의 사제들은 좀 다르던데.”

    성녀 상을 바라보는 요르문의 시선이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가 유심히 보고 있던 건 성녀 상의 밑부분이었다.

    남자가 걸고 있던 성녀 상의 밑은 시멘트로 바른 것처럼 아무 표식도 없이 매끈했다.

    ‘사제라는 말은 거짓이군.’

    국교회에서 서품받은 사제들은 대주교의 인장이 찍힌 성녀 상을 하사받는다. 이단이 아니라는 증거이자 국교회의 신학 교육을 끝까지 수료했다는 증명이 되는 것이다.

    하얀 성직 칼라의 틈으로 기괴한 문신이 슬쩍 보인다. 남자는 단순한 사제 사칭범이 아니었다. 갱단에서나 할 법한 문신이 목 끝까지 올라와 있는 걸 수도복으로 가린 것이다. 일부만 드러난 문신은 기울어져 반씩 섞인 태양과 달처럼 보이기도 했다. 남자는 생각보다 위험한 인물일지도 몰랐다.

    “흐응. 어떡할까.”

    “신이 자네를 축복할걸세! 날 살리는 건 그분의 종을 살리는 셈이야!”

    요르문이 별 반응 없이 계속 바라만 보고 있자, 남자는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시아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살펴본바, 창살을 무자비하게 끊어버린 두 마법사가 자신을 치료했던 여자의 의견을 가장 우선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발 나도 구해달라고 말 좀 해주게. 레이디라면 응당 자비를 베풀고 낮은 자를 보살피라 배웠을 테지. 내 돌아가면 천국으로 가는 명부 가장 윗줄에 레이디의 이름을 적어주겠네, 응?”

    천국으로 가는 명부라니. 내가 역사책에서만 보던 헛소리를 실제로 듣는 날이 올 줄이야. 시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남자는 요르문에게 목덜미를 잡혀있으면서도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어, 잠깐. 방금 요르문이 뭘 한 거 같은데.

    요르문의 소맷자락에서 조그마한 딱정벌레가 기어 나왔다. 재키 레이븐을 속일 때 사용했던 태엽 장치였다. 요르문의 팔목에서 손가락, 손끝을 넘어서 태엽 벌레가 남자의 피부 위에 안착했다. 여섯 개의 날카로운 황동 다리가 어둠 속에서 찰칵 열렸다. 남자가 뒷목이 따끔한지 눈살을 찌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