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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비를 마친 뒤, 비비안느는 전달받은 시간보다 조금 일찍 만찬장으로 내려갔다.
세노윅 방계들은 귀족 혈통이니 저를 면전에다 두고 도를 넘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에드문드의 후계 적합성에 대한 불필요한 여론이 형성되는 걸 저지할 수 있으리라.
킹슬리를 포함한 셸던 일가와 그 외 방계들이 도착해 있었다더니, 역시 공작저의 만찬장은 소란스러웠다.
‘무슨 말을 듣더라도 상처받지 말자.’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서자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그녀는 마주하게 된 얼굴들이 (셸던 일가를 제외하고) 무엇 하나 빠짐없이 굉장히 호의적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상석에서 멀리 떨어져서 앉은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비안느 쪽으로 걸어왔다.
“…내 저번에는 미처 인사를 못 드렸구려. 존 세노윅이요. 세노윅 공작가의 삼남이요.”
“난 달리아예요. 어니스트 세노윅, 그러니까 세노윅가 차남의 아내인 셈이죠.”
“네. 인사드리게 되어서 제가 더 영광이에요.”
비비안느가 공손하게 미소 짓자 두 사람의 표정이 확연히 밝아졌다.
달리아가 손을 내저으며 비비안느를 상석 가까이로 안내하며 말했다.
“아뇨. 에드문드 백작이 영애를 이 자리까지 데려온 걸 보면, 두 사람, 장래가 약속된 것일 텐데 차기 공작 부인에게 듣기에는 너무 과분한 말이지요.”
비비안느가 안도하며 자리에 앉았을 때, 맞은편 인근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께서는 언제나 앞서가기를 좋아하시는군요.”
못마땅한 표정의 셸던 백작 부인이었다. 세노윅 공작의 누이이며, 킹슬리의 모친이기도 했다.
“공작 부인께서 내 아들 킹슬리를 얼마나 많이 아껴 주셨는데, 차기 공작 부인이라니. 그렇게 말하는 건 실례이지요.”
“하지만 공작께서는 콜트 백작을 늘 비호하지 않으셨소?”
아까 비비안느에게 인사를 건넸던 존이 대신 받아쳤다.
“차기 공작에게만 허용되는 예우 경칭 ‘백작’을 쓰고 있는 것도 콜트 백작이고 말이요. 킹슬리 남작은 부친인 셸던 자작의 예우 경칭인 ‘남작’을 쓰고 있지 않소?”
그 말을 들으니 상황이 파악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사람들은 오늘 공작의 상속자가 정해진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저들 나름대로 승자를 결정짓고 경쟁이라도 하듯 더 일찍 줄을 대려는 모양이었다.
세노윅 방계들이 귀족답게 고상 떨며 노동을 경시하고 살았다면, 심지어 저들이 모든 걸 상속받은 장남이 아닌 차남, 삼남 일가라면 경제 사정은 메르고빌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권력이 옮겨 가면 잘 보일 상대도 그에 따라 마땅히 바뀐다.
제 생각이 맞았는지 백작의 위세를 등에 업은 존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거기다 통찰력의 차이란 게 있지 않소. 요즘 엠머하임 공화국이 한창 뒤숭숭해서 말들 오가는 것 보면 전쟁에 대해서는 콜트 백작의 짐작이 옳은 것 같소.”
그는 손가락을 접으며 잠자코 엠머하임 공화국의 현주소를 열거했다.
“그때 백작이 그랬었지. 은행 위기. 산업 쇠퇴, 불안정한 내각. 민심. 자긍심. …그런 것들이 장작들같이 차곡차곡 쌓이면….”
그 말에 킹슬리는 손을 말아 쥐며 이를 까득 갈았다.
존의 목소리가 잠잠한 만찬장 속에 이어졌다.
“작은 불꽃 하나로도 불씨를 만들 수 있겠다고. 반면 셸던 남작은 소형 화기 연합장으로서, 연합에 속한 군수 기업 대표들에게 기업을 매각하는 걸 주선하지 않으셨소? 그것도 암흑가 세력을 상대로 말이오.”
그 말에 킹슬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리에서 잠자코 앉아 있던 그의 부친이 그를 흘긋 바라보았는데, 표정은 애써 실망감을 감추려는 듯 보였다.
“암흑가에 고작 기업 팔라고 한 게 대수겠습니까?”
킹슬리가 실소하며 비비안느를 쳐다보았다.
그는 비비안느를 턱짓하며 비열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저 여자는 더한 것도 팔았을 텐데.”
“저 저열한!”
아까 제게 말을 걸었던 달리아가 나서 주었지만, 정작 비비안느는 반박하지 못했다.
남녀 관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그녀가 암흑가 보스와 수어 차례 관계를 가진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것도 혼전에 말이다.
그 애정의 대가로 제 약혼자는 지금 사형을 선고받은 채 감옥에 있지 않나.
킹슬리는 이곳이 마치 재판정이라도 되듯 훌륭히 반론하는 자신의 모습에 취한 투로 말을 이었다.
“친애하는 외숙모께서 말하길 저 여자가 여기 있는 한 공작께서 에드문드를 고를 일은 없다던데. 저 여자는 백작의 유일무이한 약점이자 결점이라는 그분의 말이 꼭 맞습니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 보니, 존과 달리아를 비롯한 방계들의 시선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저는….”
비비안느가 애써 입을 열었지만, 때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모두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아….’
비비안느는 공작 부인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둥근 쟁반 위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상황이 얼마나 더 나빠질지, 어제 응접실에서 나눴던 대화가 이어진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그런데 아까 마주했던 공작 부인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았어.’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들었을 때, 비비안느는 제가 잘못 본 것임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왜일까?’
때마침 그녀의 옆자리 의자가 뒤로 밀리고 누군가 자리에 앉았다. 무심코 옆을 돌아봤던 그녀는 시선만으로 피부가 데기라도 한 듯 재빠르게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옆에 앉은 이는 이곳에 있던 모두가 기다린 인물이었다.
그들의 대화 주제이자, 곧 이 저택의 가주가 되어 모든 일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를 사내.
에드문드 콜트 백작.
“누가 그런답니까?”
그는 모든 대화를 문 뒤에서 듣고 있었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킹슬리에게 물었다. 그리고 어느새 상석을 메운 공작 쪽으로 고개를 돌려 질문했다.
“공작 각하, 어제 제게 비비안느가 정말 훌륭한 며느릿감이 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 말에 킹슬리는 당치도 않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모친인 셸던 부인은 어제 이야기한 것과는 다르다는 눈빛을 공작 부인에게 보냈지만, 곧 외면당했다.
“다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군그래.”
공작이 식전주를 들이켜며 방계들을 아울러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공작위 승계밖에 관심이 없는 듯하니, 본론부터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킹슬리. 너도 앉거라.”
공작의 말에 킹슬리는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상석의 공작은 목청을 고르고는 말했다.
“내 뒤를 이어 차기 세노윅 공작이 될 사람은….”
비비안느는 공작이 지명한 이름이 킹슬리의 것일까 봐 숨을 죽인 채 이변이 일어나기만을 바랐다.
‘이렇게나 빨리 차기 공작이 될 사람을 발표하겠다고?’
더 생각해 볼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확고한 태도였다. 평생과도 같은 정적 속에서, 비비안느는 테이블 건너편의 킹슬리의 얼굴을 흘긋 살폈다. 그는 불쾌해 보였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옆에 앉은 셸던 자작 부인은 그런 감정을 더더욱 숨기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당장이라도 차기 공작의 모친이 된 것 같은 당당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셸던 자작가 힘의 기반이 영지에 있는 소형 화기 연합에서 나온다고 들었는데, 그 연합도 이제 대부분 암흑가의 손에 들어갔으니 공작위가 더욱 간절하겠지.’
다시 한번 킹슬리를 훑던 비비안느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고는 움찔했다. 킹슬리의 비틀린 안광에 열기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문드에 대한 열등감을 나를 공격하면서 풀고, 그러면서도 나를 노리고 있다니.’
뤼드빅보다도 더 추잡했다.
‘물론 정말 킹슬리가 공작위를 승계받고, 그 많은 자산을 내세우며 부모님께 청혼 의사를 밝히면 두 분은 결국 승낙하겠지만….’
킹슬리와 결혼할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며 비비안느는 고개를 돌렸다.
공작이 말을 이은 것은 그때였다.
“…차기 세노윅 공작이 될 사람은, 에드문드다.”
“예?”
물론 멍청하게 ‘예?’ 하며 또다시 자리에서 박차듯 일어난 것은 킹슬리였다.
동시에 셸던 자작 부인과 비비안느의 희비가 교차했다. 정작 에드문드는 어떤 감상도 내비치지 않았다. 대신 멀끔한 표정으로 식전주를 들어 올리며 ‘감사합니다, 외숙부.’ 하고 공작에게 형식적인 말을 건넬 뿐이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킹슬리에게 설명했다.
“들은 대로다. 이미 서류상의 절차는 다 끝내 놓았으니 이제부터 에드문드가 세노윅의 공작이고. …네가 아버지의 콜트 성씨는 그대로 쓰고 싶다고 했었나?”
“예, 외숙.”
두 사람은 철저히 킹슬리를 배제한 채 저들끼리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에드문드가 총리 관저에서 했던 말이 새삼스레 기억났다.
“메르고빌 영애를 공작 부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제 입으로 직접 말했으니, 그 말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그가 그 말을 지켜 주었다는 기쁨보다는 안도감이 앞섰다. 킹슬리가 공작가의 상속자가 되지 않아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주위에 싸고도는 여자들이 저렇게나 많은 데다가, 지독할 정도의 여성 편력에, 주당이라니. 뤼드빅은 유능하기라도 했지만 킹슬리는 부친께 상속받은 권력마저 헐값에 처분했다.
그런 이는 공작가의 재산마저 흥청망청 낭비하고 저 막돼먹은 성격으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할 게 뻔했다.
비비안느가 사교계에서 지겹도록 봐 왔던 것이 사람이었기에, 그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부류라는 게 더 명백하게 보였다. 킹슬리가 씩씩거릴 동안 선대 공작이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러면 네 공식적인 이름은 제10대 세노윅 공작, 에드문드 콜트가 되겠구나. 다시 한번, 세노윅 영지와 이곳 저택의 사용인들을 잘 부탁하마. 좋은 사람들이야. 이미 너를 잘 따르고 있으니 너와 네 아내 될 여자를 훌륭하게 모실 테지.”
“예.”
“너라면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한다. 암, 그렇고 말고.”
비비안느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을 때 선대 공작이 상석 바로 옆에 앉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선대 공작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에드문드가 먼저 입을 열어 대화의 주도권을 가로채 갔다.
“그러고 보니 어제 외숙께서 저를 불러서 공작위 승계에 대한 견해를 내비치셨을 때 레이디 메르고빌이 얼마나 좋은 말벗이었는지, 외숙을 얼마나 살뜰히 챙겼는지 말씀해 주셨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에드문드의 외숙, 선대 세노윅 공작은 식전주로 목을 축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답은 짧은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나왔다.
“…그래, 이런 좋은 며느리를 가문에 들이는 건 행운이고말고.”
그 순간 비비안느는 꿈을 꾸고 있나 싶어서 제 볼을 꼬집어 보고 싶었다. 대신, 그녀는 선대 공작을 바라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는 걸 애써 숨긴, 수줍은 목소리였다.
선대 공작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감사는 네 남편이 될 공작에게 하게나.”
그 말에 비비안느는 고개를 돌려 에드문드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때 선대 공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지몽매했던 내게 네 소중함에 대해서 일깨워 준 사람 아니냐.”
말에는 가시가 담겨 있었으나 그걸 파악하기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에드문드의 눈빛이 너무 다정해, 비비안느는 그 말에 고개만 두어 번 끄덕이고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