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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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다음 날, 공작이 세노윅 영지의 후계를 공표하겠다며 방계들에게 편지를 보내자 저택은 평소보다 더욱 분주해졌다.

    비비안느는 그 소란 속에서 눈을 떴다.

    평소 눈을 뜰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등 뒤에 누군가가 누워 있는 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누가 감히 공작의 객인 제 방 문턱을 넘었을까, 하고 가슴께를 가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익숙한 얼굴을 보고는 숨을 골랐다.

    “일어났어?”

    에드문드가 눈을 뜨고는 물어 오자 비비안느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제 나이트가운이 단정하다는 걸 파악하고는 물었다.

    “…백작님이 왜 여기 계세요?”

    “잠이 안 와서.”

    “여기 침대가 더 폭신한가요?”

    제가 다시 묻자 에드문드는 뭐가 웃긴지 픽 웃었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여기엔 네가 있잖아.”

    그 낯간지러운 말에 비비안느는 얼굴에 열기를 느꼈다. 그녀는 언젠가 에드문드가 백작저에서 저를 끌어안자마자 깜박 잠들었던 걸 기억했다.

    ‘내가 불면에 도움이 되는 모양일까.’

    그가 상체를 일으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자 무방비하게 있던 비비안느는 그대로 그의 옆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단단한 가슴팍이 머리에 닿자 비비안느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오더니 달아오른 그녀의 귓불 쪽에 말을 속삭였다.

    “그래서 왔는데, 오히려 더 잠이 안 오던데.”

    “…….”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자는 네가 얄미워서 깨워서 괴롭혀 줄까 하다가, 네가 그리 좋아하는 절차 지켜 주려고 참았지.”

    그렇게 말한 그가 그녀의 나이트가운 끈을 천천히 끌어 내렸다. 그가 고개를 숙여 드러난 살결에 입을 맞추려는 순간 문 쪽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세숫물을 가져왔습니다. 이때쯤 찾아가면 될 거라고 일러 주셔서요.”

    “두, 두고 가!”

    비비안느가 에드문드의 어깨를 있는 힘껏 밀어내며 소리쳤다.

    “예?”

    듣지 못했는지 시녀가 확인하듯 재차 물어 왔다.

    “들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 가져가라는 말이야.”

    비비안느는 평생을 아가씨로 살아오며 사용인들에게 그렇게 큰 소리를 내어 본 적이 없었다.

    제 목소리에 놀란 비비안느의 얼굴이 붉어졌을 적 심드렁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예에. 부르시면 다시 오겠습니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안도의 한숨이 야릇한 정적 속에 내려앉았다.

    “정말, 왜 그러세요!”

    비비안느가 타박하듯 에드문드를 때리자 그가 그녀의 목덜미 쪽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좋다며. 내가.”

    쇄골 쪽에 가벼운 키스를 남긴 그는 뻔뻔하게도 고개를 물러 흐트러진 그녀를 아래위로 훑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아랫입술을 느리게 핥는 게 어딘가 위험해 보였다.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했다.

    “그래도 공작 각하께서는 저를 못마땅해하는 것 같으신데 제가 공작 부처께 잘 보여서 두 분이 마음을 열어 주실 때까지는….”

    “잘 보이겠다고?”

    “…….”

    “그럴 필요 없어.”

    에드문드가 그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달아오른 손끝으로 비비안느의 볼을 쓸어내렸다. 비비안느의 선홍색 눈이 의문을 담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유창하게 달변을 늘어놓았다.

    “어제 새벽에 공작 각하께서 네가 얼마나 내 아내로 잘 어울릴지 이야기하던데.”

    그녀의 볼을 쓸던 손은 그녀의 입술 쪽으로 향했다.

    “내가 설마 농담을 했으려고. 네가 지난번에 공작저에 있을 때 얼마나 좋은 말벗이었는지, 얼마나 살뜰하게 외숙부님을 챙겨 드렸는지 말씀해 주셨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으응, 그래요?”

    그의 손길을 피해 뒤로 몸을 무르던 비비안느는 고개를 기울였다.

    에드문드는 그녀가 방심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얼결에 베개 속에 파묻힌 비비안느가 허리를 들썩이자 에드문드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의 큰 손이 그녀의 뺨을 쓸어 내려갔다. 감촉은 불에 데는 것처럼 뜨겁고도 거칠었다.

    “그래.”

    그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자 비비안느의 입술이 달싹였다.

    에드문드가 그녀의 흐드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자, 여체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공작이 되길 원하면 나한테도 잘해 줘야지.”

    “…….”

    “그리고 네가 공작 부인이 되고 싶으면….”

    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상체 위에 머리를 파묻은 에드문드가 숨을 깊이 들이켰다.

    비비안느의 손이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이내 손가락이 그의 목 뒤를 스치자 그가 반사적으로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하아, 비비안느.”

    그 저음에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니 밝고도 깨끗한 일광에 눈이 부셨다. 그녀는 그의 목 뒤를 기분대로 손톱으로 살짝 긁어 보았다.

    화답하듯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꼭 제가 숭배하는 무언가를 바라본 것 같기도, 아니면 오랫동안 갈망했던 것 앞에서 이성을 잃은 이의 것 같기도 했다.

    “난 장난만 치려 했는데 네가 이러면 안 되지.”

    그의 탁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비비안느는 후작저의 방에서 물 한 모금 먹지 못했을 때의 갈증에 대해 생각했다.

    그걸 어떻게 해갈할 수 있는지를 되새기는 순간 낯선 자극이 밀려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동화 속 왕자님들은 키스로 공주의 긴 잠을 깨웠지만, 악당은 다른 방식으로 레이디의 아침잠을 깨게 했다.

    ‘침대가 부서진 건 아닐까.’

    에드문드가 돌아간 뒤, 비비안느는 걱정스레 침대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네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아름다운 침대는 다행스럽게도 휘장이 조금 흐트러졌을 뿐 건재해 보였다.

    한참 손부채질을 하던 비비안느는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백작은 틀림없이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세노윅 공작은 조카의 부재에 심심해하며 저를 말벗으로 쓰긴 했으나, 그게 제 조카의 옆자리를 내주겠다는 관대함으로 해석되지는 않으니 말이다.

    아마 에드문드가 제 기분을 달래 주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한 모양이라 결론지은 비비안느는 사용인들을 부르지 않고 혼자 몸단장을 했다.

    지난번 방문 때 에드문드가 채워 준 드레스룸이 아직 그대로 있어, 어제 입었던 옷을 또 입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단장을 마무리하며 조용한 하루를 보내야겠다고 다짐하던 차에 공작이 오늘 당장 만찬회를 열어 후계를 공표하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자 에드문드와 저와의 관계를 넌지시 떠보던 공작 부인의 눈초리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난 내 화랑에 물이 묻는 걸 안 좋아해서요.”

    공작 부인이 설마 무언가를 전해 들은 걸까?

    왠지 이번 만찬회가 미술관에서 있었던 일의 연속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속이 더부룩해져 왔다.

    공작 부인의 뒤틀린 미소가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이어졌다.

    “몸에서 내 조카 향수 냄새가 나는 건 아나요? 지우려 해도 희미하게 남아 사라지지 않는 게 있답니다.”

    비비안느는 입고 있던 데이 드레스의 팔 부근에 코를 묻고는 괜히 향기를 한번 맡아 보았다.

    이미 목욕을 했다지만 목욕마저도 그와 함께한 것이라 씻어 내지 못한 그의 흔적이 어딘가엔 배어 있을 것 같았다.

    ‘신경 쓰여.’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는 어떠한 흠도 잡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왜 하필이면 오늘 당장인 걸까. 만찬회에서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그러다 에드문드가 저 때문에 부정적인 여론에 못 이겨 공작 후계 자리에서 밀려나면….

    비비안느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에드문드한테 가서 이야기해 봐야 할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녀는 다시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았다.

    저번 방문 때처럼 몸이 한참 민감해져 있을 때라 그의 체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자극적일 것 같았다. 대책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다시 한번 불이 붙을까 봐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힐 셈 빗을 집어 들고는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은 마침 그때였다.

    “아가씨,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응.”

    비비안느가 목 부근을 가리지 못했다는 걸 떠올린 것과 문이 열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시녀장 루이제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은 잘 주무셨나요? 오늘 마님을 모시느라 다른 시녀를 보냈는데, 아가씨가 그 애의 시중을 받지 않겠다고 하신 게 조금 신경 쓰여서… 어머!”

    루이제의 시선이 비비안느가 채 가리지 못한 목 주변과 쇄골, 가슴께를 훑었다. 붉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걸 알아 그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방금 네가 본 걸, 네가 모시고 계신 공작 부인께는 말하지 않아 줄 수 있겠니?”

    비비안느는 조심스레 말했다. 루이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았다.

    “그럼요. 저는 마님을 모시기도 하지만 에드문드 백작님을 도련님으로서 존경하기도 하니까요. 자, 기력이 없으실 테니 제가 계절에 맞으면서 흔적을 가려서 단정해 보일 수 있는 옷을 대신 찾아 드릴게요.”

    “고마워.”

    “피임을 돕는 차를 가져올까요, 아가씨?”

    “응. 그래 줄래?”

    “네. 절 믿으셔도 돼요. 편히 기다리고 계세요.”

    루이제가 걸어 나가자 비비안느는 물끄러미 문 쪽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거울 속에 담긴 상을 바라보았다.

    올해 겨울, 메르고빌 후작저에서 시녀 마사가 제 시중을 들었을 때 제 몸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인 건 계단을 굴러 생긴 멍이었다.

    이제는 다른 이유로 몸이 색색으로 물든 것이 참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 같았다.

    꼭 봄이 공작저의 드넓은 정원만 물들인 건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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