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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14화 (14/110)
  • 03.

    “저, 정화할 수 없을 정도로 사, 사악한 기운이라 아, 안 돼요. 그러니 이만 신전을 떠나주시죠? 당신의 기운이 신전을 뒤덮기 전에 얼른요!”

    리첼이 재촉하자 성녀는 바로 받아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말을 버벅댔다.

    불길한 기운이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젠 할 말 없으니 사악하다고 하는지….

    대화할수록 성녀의 무례함은 더욱 심해졌다.

    “일단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어요.”

    이 이상 성녀와 대화할 가치도 없다고 느껴진 리첼은 일단 성녀와의 대화를 끝냈다.

    한발 물러서자 성녀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까딱거리며 그들을 지나갔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실 거예요? 어쩜 성녀님이라는 사람이 저리 무례할 수 있나요?”

    성녀의 모습이 멀어지자 비아는 분하다는 듯이 불평했다.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어. 엮이기도 싫고. 싸워봤자 내 수준만 우스워지니 그냥 참아야지 뭐.”

    흥분한 비아를 진정시킨 후 리첼도 진정하려고 애썼다.

    ‘일단 참아보자.’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화가 났지만 성녀와 같은 사람이 되긴 싫었기에 다른 영애들처럼 참아보려 했다. 같이 화내봤자 같은 수준이 될 것만 같았고, 그게 더 싫었다.

    “저기 보세요. 진짜 골때리네요.”

    비아의 시선을 따라가자 성녀가 다른 영애에게도 접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리첼과 달리 마음이 약한 여성이었는지 영애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옆에 하녀가 대신 화를 내려 했지만 일이 커지는 걸 원치 않았던지 영애가 그녀를 막았다.

    역시나 다들 신전 내에서 분란을 일으켜봤자 안 좋은 소문이 돌 수 있기에 참는 것 같았다.

    “지난번엔 참았어도 오늘은 못 참을 것 같아.”

    성녀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참고 참았던 리첼의 참을성이 바닥나 버렸다.

    자신만 당했으면 참겠는데 보는 영애마다 시비를 걸고 다니는 성녀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성녀는 만만하게 보이는 상대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인상이 조금이라도 센 영애에게는 인사만 하고 지나가는 모습이 아니꼬웠다.

    “얼굴로만 사람은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줘야겠어. 성녀란 사람이 귀족 가문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내가 알려줘야 할 것 같네.”

    리첼은 주먹을 쥐며 말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비아가 답답한 속이 뻥 뚫리는 듯한 표정으로 리첼의 의견에 찬성하며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리첼은 대신관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아무나 그를 바로 만날 순 없었지만 리첼은 레녹스 공작가 사람이기에 요청만 하면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대기 시간이 있지만 말이다.

    “여기에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리첼은 사제에게 안내받은 의자에 비아와 나란히 앉았다.

    비아가 옆에서 재잘거렸지만 귀엔 잘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 지나가려나?’

    시간이 남다 보니 리첼의 시선은 창가를 향했다.

    원래 목표물인 카일 사제가 지나가는지 살펴보느라 그녀의 눈은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쫓고 있었다.

    그런데 카일 사제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예상외의 인물이 리첼의 시야에 들어왔다.

    ‘펠릭스 메리오너스?’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비빈 후 다시 확인했으나 붉은 머리 펠릭스가 맞았다.

    신전에서 보니 비밀 클럽에서 경박해 보이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표정이 어딘가 진지했다.

    사연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주변 여성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는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전과는 너무나 다른 펠릭스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긴 리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와 그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신전 안은 워낙 넓기에 빠른 걸음으로 가는 그를 따라가기란 쉽지 않았다.

    풍성한 치마는 불편했기에 치마를 들어 올리곤 성큼성큼 그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품위를 지켜야지요!”

    어느새 그녀를 따라온 비아가 놀란 얼굴로 소리치며 따라왔다.

    “쉿!”

    혹시라도 펠릭스가 뒤돌아볼까 봐 리첼은 비아의 입을 다물도록 했다.

    다행히 그는 묵묵히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어휴.”

    비아는 한숨을 내쉬며 뒤를 따라왔다.

    “치마까지 올리고 대체 어디를 가시는 거예요?”

    리첼의 옆에 따라붙은 비아가 조곤조곤 속삭이며 물었다. 숨을 죽이며 따라오는 것이 답답한 듯 보였다.

    “편하게 앉아있으면 될 것을. 신전 안에서 위험한 일이 뭐가 있다고 굳이 나를 따라왔어?”

    가뜩이나 따라가기도 힘든데 자꾸 귀찮게 구는 비아에게 짜증이 났다. 그래서 리첼은 목소리를 낮추며 투덜거렸다.

    “가서 나 대신 대신관님 기다리고 있어!”

    비아를 떼어놓고 가리라 마음먹은 후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펠릭스를 찾는 순간 그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리첼은 그 자리에 선 채 두리번거리며 그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펠릭스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 머리가 튀기에 멀리서나마 쫓아올 수 있었는데 이젠 신전에 그 어떤 곳에서도 붉은색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지?’

    리첼은 그가 갈 만한 곳이 있는지 둘러보았고, 때마침 그녀의 눈앞에 계단이 보였다.

    계단 위로 올라가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계단 앞까지 달려가 다리를 한 발 올리려던 그때였다.

    “일반 신도분들은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뒤에서 그녀의 행동을 막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카일 사제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만나기 힘들더니 이상하게 마주치기 껄끄러울 때만 그와 마주치는 것만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리첼은 올리려던 발과 들고 있던 치마를 얼른 내려놓곤 고개를 숙였다.

    ‘사제님과 얼굴이 마주친 건 일단 운이 좋았다고 할 순 있지만 하필이면 지금 마주칠 줄이야.’

    리첼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작은 탄식이 나왔다.

    “기도실은 저쪽에 있습니다.”

    카일은 기도실 방향을 향해 두 손으로 정중히 가리켰다.

    원래대로라면 대기실로 돌아가야 했지만 어쩐지 펠릭스가 계속 신경 쓰였다.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마음이었다.

    몸이 끌리면 마음도 끌리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평소와 다른 그의 진중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던 걸까.

    “잠깐만 올라갔다 내려오면 안 될까요? 들어가진 않을게요.”

    그래서 리첼은 카일의 말을 어기고 계단 위로 가려 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하지만 카일의 손이 그녀를 저지했다.

    “잠시…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방금 봤는데 그만 놓쳐버려서….”

    그 순간 사제의 가식적인 미소 속에 숨겨진 냉랭한 시선이 느껴졌다.

    마음속 깊은 곳까지 찌를 것 같은 찰나의 차가운 눈빛에 리첼의 몸은 굳어버렸다. 그에게서 이런 눈빛을 받는 것이 두 번째였다.

    “안 됩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카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알겠어요.”

    아무리 우겨도 들어줄 것 같지 않자 리첼은 계단 위로 올라가는 걸 포기하고 신도들 전용 기도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싸늘한 시선은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그 미소는 기품은 있지만 상냥하지 않았다.

    온순하고 부드럽다는 소문이 대체 왜 난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냥 얼굴에 취해 그가 착하다고 다들 지레짐작했던 걸까.

    “혹시 방금 사제님의 쌀쌀맞은 시선을 느꼈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첼은 비아에게 물었다.

    “아뇨?”

    하지만 비아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추기경 후보로 언급되는 사람이 그런 눈빛을 보일 리 없지.’

    리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번에도 착각이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아와 함께 대신관님을 기다리기 위한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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