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공녀님.”
의자에 앉자마자 리첼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신관님께서 잠시 시간이 나신다고 합니다. 들어오십시오.”
때마침 대신관에게 잠깐의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리첼과 비아는 그를 찾아뵙기 위해 사제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갔다.
“공녀님 오셨습니까? 갑자기 저를 뵙고 싶다고 하시니 놀랐습니다.”
대신관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두 사람을 맞이해주었다.
“급하게 말씀드릴 일이 있어 바쁘실 텐데 갑자기 뵙자고 한 점 죄송합니다.”
“어떤 일이기에 갑자기 뵙자고 하신 건가요?”
잠시 놀란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대신관이 물었다.
“앞으로 레녹스가에서는 신전에 기부하는 금액을 일체 끊기로 결정했습니다.”
대화 시간이 짧으니 리첼은 생각한 바를 바로 전했다.
“네?”
갑작스러운 선언에 놀란 대신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잠시 당황하는 듯 보였다.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 가문이 끊었다간 예산 확보에 차질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갑… 갑자기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대체 왜?”
말까지 버벅거릴 정도로 대신관은 당황하며 횡설수설했다. 그의 그런 모습은 리첼도 처음 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협박으로 들릴지도 모를지언정 일단 하고 싶은 말은 모두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게서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나와서 불길하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만 발길을 끊으려고 합니다.”
“네?”
황당한 소리에 대신관은 또다시 놀랐지만 리첼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어릴 적부터 신전을 얼마나 자주 다녔는데 제 안에서 어두운 기운이 있다니…. 신전에 다녀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아버지께도 직접 말씀드리려고요.”
“대…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하셨습니까? 누가 그런 불경한 말을!”
리첼의 말을 들은 대신관의 얼굴은 노랗다 못해 파래졌다.
“대신관님이 보시기에도 제 몸에서 어두운 기운이 보이시나요? 성력을 지닌 사람은 보인다던데요. 아! 어둡다 못해 사악하다고 했어요. 그 말은 즉 제 몸에 악령이라도 씌었단 말인가요?”
리첼은 너무나도 억울하다는 눈빛을 발사했다.
“그… 그럴 리가요. 리첼 님께선 격주로 신전에 오셔서 축복을 받으시니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랬다면 이미 저희가 조치를 취했겠지요.”
“그래요? 성녀님께서 저보고 불길하다고 오지 말라고 하시던데요 뭘. 그래서 앞으로 발길도 끊고 기부금도 끊으려고요. 제가 올 수가 없는 곳에 어찌 기부를 하겠어요.”
리첼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고,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대신관의 얼굴은 더더욱 하얘졌다.
“성녀님께서 시… 실수하신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제가 상황을 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러세요.”
리첼은 배려하는 척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신관은 다른 사제를 부르더니 그대로 같이 방을 나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대신관과 두 명의 사제, 그리고 성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제 중 한 명은 카일이었고, 뒤따라 들어오는 성녀의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마를 찌푸린 성녀의 표정을 보니 쌓였던 화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공녀님, 제가 알아보니 성녀님께서 뭔가 착각을 하신 듯합니다. 아직 성녀로서 신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계속 교육하고 있으니 이번 일은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글쎄요?”
리첼은 대신관의 사과를 모른 척하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잘못한 사람이 직접 사과를 하지 않으니 너그러이 봐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리첼은 일부러 그들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바라보았다.
“교육 담당으로서 아직 제 교육이 부족한 점 사과드립니다.”
그러자 이번엔 카일이 사과했다.
“글쎄요?”
그의 사과에도 그녀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성녀님! 어서 잘못했다고 말씀하십시오. 제가 잘 모를 땐 입 밖으로 꺼내지 말라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리첼이 계속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나머지 금발의 사제가 답답하다는 듯 성녀에게 사과하라고 재촉했다.
성녀는 주변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어휴. 저를 바라보는 표정이 무서운데요?”
성녀의 말을 끊으며 리첼은 몸서리를 쳤다. 언뜻언뜻 보이는 그녀의 눈빛이 여전히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성녀님!”
또다시 금발 머리 사제가 성녀를 다그치자 성녀의 시선이 곧바로 아래로 향했다.
“제가 자… 잘못했습니다.”
곧이어 작은 숨소리와 함께 그녀는 리첼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어찌나 싫었는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하는 게 티가 났다.
‘오늘은 이 정도로 봐줄까?’
리첼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대신관의 굳어있던 표정이 풀어졌다.
다른 두 사람의 표정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카일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어라?
그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카일을 바라보았지만, 착각이었는지 그는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알았어요. 오늘 일은 성녀님의 실수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도록 할게요. 하지만 성녀님! 다음부턴 말조심하길 바랄게요.”
성녀의 실수를 강조하며 리첼은 일단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공녀님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대신관은 감사 인사를 한 후 두 명의 사제와 성녀에 대한 처벌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대신관과 사제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성녀와 리첼의 눈이 마주쳤다.
성녀는 또다시 리첼을 노려봤고, 리첼은 보란 듯이 혀를 살짝 내밀었다 넣으며 그녀를 약 올렸다.
성녀는 인상을 구기다가 대신관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제법 재밌었다.
“저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재밌는 구경도 했겠다, 리첼은 자신을 계속 힐끔힐끔 노려보는 성녀의 시선을 무시한 채 대신관에게 인사하며 방을 나왔다.
좋은 구경을 한 것 같아 속은 후련했지만 한편으론 카일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진 못한 것 같아 방에서 나오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성녀라고 대접받아 기고만장하더니 꼴좋네요.”
비아가 뒤따라 나오며 속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성녀님 말이야. 사과하고 나서도 나를 노려보는 것 보니 반성의 기미가 없던데?”
“제가 봐도 그래요.”
비아도 리첼의 의견에 동의했다.
역시 사람은 금방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두 사람이 걱정한 대로 그 사건 이후에 성녀의 무례한 행동은 여전했다.
신전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성녀는 리첼에게 고개만 까딱하며 지나갔다. 그리고 성녀의 시선 끝엔 고깝지 않은 눈빛이 있었다.
“말이라도 섞지 않는 게 어디야.”
다행히 시비를 걸지 않았기에 리첼은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성녀와의 일을 일단락된 것 같았지만 대신 카일 사제의 시선을 끌고자 한 작전은 실패했다.
너무 티나게 신전을 들락날락했는지 리첼에게 인사를 하는 그의 눈빛이 점차 쌀쌀맞아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씁쓸했다. 그래서 신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점점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