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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10화 (10/110)
  • 02.

    말을 들을수록 황녀 밀리아의 눈은 점점 커졌고 당황한 듯 눈동자 흔들렸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나도 말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아요. 그러니 비밀이지.”

    “레녹스 공작님께서 재밌는 물건을 숨기고 계셨네. 펠릭스 영식에 대한 소문이라면 나도 들어봤어. 하필이면….”

    어이없이 웃다가 갑자기 밀리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제 일처럼 걱정하기에 그녀도 바람둥이 펠릭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언니라면 누구를 택할 것 같아요?”

    “어렵네. 그런데 네가 나를 찾아와 부탁한다는 건, 넌… 카일 사제님 쪽이 조금 더 끌린다는 말이네?”

    “일단은요. 게다가 아직 견습이니 그가 정식 사제가 되기 전에 일단 친분을 쌓아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그에게 진짜 끌릴지 궁금하지 않아요?”

    사제들은 신께 순결을 바쳐야 했지만 그러기 쉽지 않기에 신전에서는 미리 견습 사제들을 뽑아놓곤 그들을 시험대에 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강한 신념과 함께 순결을 지켜낸 자만이 사제로서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러니 견습 사제들은 일반 사제들보다 조금 더 자유로웠고 언제든 그만둘 수 있었다.

    “하긴. 많은 여성들이 요염한 눈빛으로 카일 사제님을 바라보고 있긴 하지. 하지만 들리는 소문으론 그렇게나 철벽을 친다던데? 내가 직접 본 것도 있으니 맞을 거야.”

    “…사제를 꿈꾸고 있으니 당연하겠죠.”

    리첼의 대답이 반 박자 늦게 흘러나왔다. 목걸이 색이 변했다는 사실 하나만 믿고 괜히 사제의 길을 걷는 사람을 꼬시려는 것 같아서 양심이 찔러서였다.

    “괜찮아. 괜찮아. 네 인연이면 그도 네게 이끌리겠지. 그리고 너뿐만이 아니라 다들 그를 노리는 걸? 확실히 평생 혼자 늙기엔 아까운 외모야.”

    리첼을 위로하듯 밀리아는 괜찮다는 말을 두 번 연속 언급했다.

    “그리고 말이야….”

    빙그레 웃던 밀리아가 갑자기 목소리를 줄인 후 잠시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수상한 태도를 의아하게 여긴 리첼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가자 밀리아는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자고로 바람둥이들은 여러 여자들을 만족시킬 정도로 그게 크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

    “네? 그게 크다니요?”

    밀리아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자 리첼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대물일 것 같다고!”

    “!”

    말귀를 못 알아듣자 밀리아가 답답하다는 듯 조금 크게 말했다. 그 순간 리첼은 온몸이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둘 다 색이 변했다는 건 그 모양이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는 거 아냐. 그럼 둘 다 대물일 거 같은데? 꼬시는 거 성공하면 알려줘! 너무 궁금하단 말이야.”

    “아, 알았어요.”

    밀리아의 엉뚱한 소리에 얼떨결에 리첼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같은 핏줄 아니랄까 봐 밀리아 역시 호기심이 많았다. 다만 리첼과 달리 그녀는 유독 성과 관련된 관심이 많았지만 말이다.

    “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밀리아는 앞으로 벌어질 재밌는 일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 * *

    며칠 후 황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음 수업 선생님으로 카일 사제를 지목했으니 같이 듣자고.

    밀리아가 일러준 날이 오자 리첼은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황궁으로 향했다. 시녀의 안내를 받아 밀리아에게 가던 중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카일 사제였다.

    아….

    리첼은 잠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엔 얼굴에 눈길이 가는 바람에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카일 사제보다 사제복이 더 잘 어울리는 남자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살짝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황녀 혼자만 가르칠 생각으로 왔는데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 같이 있으니 놀랄 모양이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카일이 정중한 말투로 리첼에게 권했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밀리아가 환한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

    “사제님은 오늘이 두 번째죠? 잘 부탁드려요.”

    밀리아는 리첼에게 곁눈질을 하며 말했다.

    그녀의 행동이 괜히 리첼이 그에게 관심 있다는 것을 티 내는 것 같아 민망했지만 일단 모르는 척했다.

    “오늘은 건국 신화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솔레아 신께서….”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수업이 시작되었다.

    사제는 얼핏 보면 다정한 눈빛으로 수업하는 듯 보였지만 리첼을 바라보는 시선엔 가끔 경멸의 눈빛이 들어 있었다.

    불순한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의 눈빛 속엔 가슴 찌를 것 같은 날카로운 칼날이 숨어 있었다.

    아직 연애의 ‘연’자도 꺼내지 않았지만 드문드문 마주치는 눈빛만으로도 이미 그에게 거절당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황녀에게 부탁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상대방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건 좀….’

    황녀의 개인 수업에 갑자기 리첼이 꼈다는 건 누가 봐도 불순한 목적이 있어 보이긴 했다.

    그녀와 같은 여성들이 꽤 많았는지 사제의 눈빛은 수업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냉랭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찬 사이 수업이 끝나버렸다.

    애써 밀리아에게 그와 만날 수 있게 부탁했건만 이래선 부탁한 의미가 없었다.

    몸을 깊숙이 굽혀 인사를 한 후 카일이 나가자, 황녀가 리첼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치를 줬다.

    “가서 말이라도 걸어봐. 내가 만든 기회를 이대로 날릴 셈이야?”

    “….”

    하지만 차마 카일 사제를 붙잡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의 기에 눌려서 그런지 눈이 마주치면 입이 굳어졌다.

    “도와준다고 했는데 싱겁게 끝나버렸네.”

    리첼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자 밀리아는 실망한 표정이었고,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눈빛에서 벽을 치고 있던데요?”

    리첼은 수업 시간에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밀리아에게 말했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던데? 수업이 지루해서 졸아서 그런가?”

    하지만 그녀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자 자신이 착각했나 싶다가도 그의 냉랭한 시선을 떠올리니 착각이 아닌 것도 같았다.

    “어쨌든 약속은 지켜. 목걸이 일주일만 나 빌려줘야 해.”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밀리아에게 목걸이를 빌려주기로 약속했었다.

    결과야 어쨌든 밀리아는 리첼의 부탁을 들어주긴 했으니 자신이 내걸었던 조건을 확인했다.

    “알았어요. 그런데 목걸이를 어디다 쓰려고 그러세요? 설마….”

    “그런 건 묻는 거 아니야.”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밀리아의 뺨이 살며시 붉어졌다.

    “저와 같은 일이 생기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사제는 물 건너갔다고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진 마. 아직 한 명 더 남았잖아. 천하의 바람둥이라도 사랑을 알고 난 후 지고지순한 남자로 바뀔지 어떻게 알아? 루이스처럼 말이야.”

    “설마요. 내가 본 것이 있는데요?”

    리첼은 자신이 봤던 그 날을 떠올리며 도리질했다.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도 마음이 간다는 건 정말 말이 되질 않았다.

    “그렇게 장담하지 마. 앞으로의 일은 신만 알지 그 누구도 몰라. 그 남자가 어느 순간 네 마음에 들어올지 어떻게 알아?”

    리첼은 밀리아의 말을 믿진 않았다. 순식간에 감정이 바뀔 거란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네 생각이 맞다고 확신하진 마. 어찌 알아, 펠릭스 영식이 네 매력에 빠져 너에게만 정착할지?”

    표정이 밝지 않자 황녀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 후 목걸이를 받아 자신의 목에 걸었다.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흐뭇한 미소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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