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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11화 (11/110)
  • 02.

    레녹스가로 돌아온 리첼은 카일 사제와 있던 일을 떠올렸다.

    어떡해. 난 뭔 짓을 한 거야!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아드리안도 그녀의 마음을 모를 만큼 티를 낸 적이 없는데 사제에겐 들키고 말았다.

    차라리 정말 좋아하면 그나마 낫겠지만 아직 관심을 가질까? 정도의 작은 마음이었으니 민망함은 더 했다.

    수치스러운 마음을 숨기려 애써 소파 위에 있는 쿠션만 검지로 콕콕 찔렀다.

    “황궁에 갔다 돌아오시더니 거기서 안 좋은 일 있었어요?”

    리첼에 대해 잘 아는 비아가 그녀의 이상 행동을 보며 걱정되는 듯 물었다.

    “아냐. 아무 일 없었어.”

    “전 아가씨께서 아드리안 님께서 약혼할 거라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괜찮아진 기분이 또다시 우울해진 줄 알았죠.”

    비아가 다행이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엘시아에게 초청장이 날아왔었다. 두 사람은 곧 약혼할 거라고.

    당연히 그 소식을 보며 마음이 심란할 줄 알았건만 예상외로 편지를 읽고 난 후 리첼의 마음은 담담했다.

    “난 괜찮아.”

    “펑펑 울 줄 알았는데 애써 참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더 아프네요.”

    “그 정도로 힘들진 않아. 실연의 상처가 아문 거 아닐까?”

    그러자 비아가 대견하다는 듯 리첼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다독였다.

    비아의 걱정만큼이나 아직 그녀의 마음속에선 아드리안에 대한 짝사랑의 감정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지만 눈물이 나지 않은 건 그 스스로도 놀랄 일이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아드리안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첼의 머릿속은 아드리안보단 두 남자로 채워지고 있었다.

    목걸이가 변하는 걸 확인한 순간 두 남자에게 없던 관심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몇 년 동안 해온 짝사랑인데 이렇게 쉽게 정리될 리 없었다.

    본능적으로 새로운 두 남자에게 몸이 끌리는 걸까.

    모든 건 보석 색이 붉게 변한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였다. 그때부터 리첼의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럼 뭐해….’

    리첼은 작은 숨을 내쉬었다.

    일단 황궁을 갔다 오고 나니 한 사람과의 관계는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나머지도 딱히….

    펠릭스가 무시했으니 뭐,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제아무리 끌리면 뭘 하나. 상대방이 응하지 않으면 말짱 꽝인데.’

    앞으로는 마음속에서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을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리첼은 당분간 신전에 가지 말자고 결심을 했다.

    그랬건만….

    주변 상황이 도와주지 않았다. 눈치 없는 그녀의 아버지가 문제였다.

    “신전으로 가자꾸나.”

    레녹스 공작이 아침부터 리첼을 불렀다. 그녀는 2주에 한 번씩 여동생 둘과 함께 신전으로 가야 했다.

    ‘오늘이 하필 그 날이라니….’

    요새 정신이 없던 리첼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불 속에 납작하게 누워서 방에 없는 척을 했건만, 공작이 직접 방으로 찾아와 이불을 거두며 그녀를 이불 밖으로 끌어냈다.

    “왜 침대 위에서 빈둥거리고 있지? 얼른 준비하고 가자꾸나.”

    “안 가면 안 될까요?”

    리첼은 신전에 가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카일 사제와 마주친다면 그의 냉랭한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매번 같이 갔으면서 갑자기 또 무슨 꿍꿍인 게냐?”

    올해 성인이 된 레이나와 8살인 동생 리리스도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둘 다 리첼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안 가겠다는 핑계를 댈 만한 것이 없었다.

    에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리첼은 마차에 올라야만 했다.

    * * *

    “신전에 이렇게 젊은 여인들이 많았던가?”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레이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자 그녀의 말대로 신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엔 올 때마다 엄숙하고 고요한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달랐다.

    알록달록한 드레스들과 함께 화기애애한 이야기 소리, 웃음소리 덕에 신전은 부드러운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우리가 방문하지 않은 2주 사이에 무언가 바뀌기라도 했나?”

    “글쎄?”

    그리고 그들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설마 마주치겠어? 라는 마음으로 레녹스 공작의 뒤를 따라 대신관님을 만나러 가던 중 멀리서 걸어오는 카일 사제의 모습을 보았다.

    ‘얼굴 보기 어렵다더니 난 왜 올 때마다 마주치는 거야!’

    리첼이 한숨을 쉬며 레이나의 뒤로 이동했다.

    “꺄아아!”

    그 순간 작은 비명소리와 함께 주변 여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다들 카일 사제님 보러 온 거였어?”

    레이나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영애들을 바라보았다. 카일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주변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와 아는 사이였던지 레녹스 공작을 보자마자 카일 사제가 가까이 걸어오더니 미소를 머금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리첼은 애써 레이나의 뒤로 가서 몸을 숨기려 했지만 아버지와 카일이 인사하는 바람에 숨을 수 없었다.

    “내게 사제가 되고 싶다고 부탁한 날 이후 처음 보는군요.”

    “?”

    레녹스 공작의 입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카일을 사제로 추천한 사람이 아버지라니? 그간 전혀 내색하지 않았기에 몰랐던 사실이었다.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전에 해마다 많은 기부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신전을 대신해서 이 또한 감사 인사드립니다.”

    “황실의 대변인으로서 당연합니다.”

    리첼은 레녹스 공작과 웃는 얼굴로 대화하고 있는 카일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아버지 앞이라서 그런지 그의 입가엔 지난번의 냉소를 머금진 않았다. 잠시 카일과 눈이 마주쳤지만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이쪽은 제 딸들입니다. 순서대로 리첼, 레이나, 리리스입니다.”

    레녹스 공작은 차례로 자신의 딸들을 카일에게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리첼 님과는 또 뵙는군요.”

    그 순간 레녹스 공작과 동생들의 시선이 리첼에게로 향했다.

    ‘그냥 모른 척해 줄 것이지.’

    카일 사제는 예의상 말했겠지만 그 배려가 달갑지 않았다.

    특히나 레이나가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리첼은 그녀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모른 척했다.

    “제 딸아이와는 아는 사이인가 봅니다.”

    “황실에서 한 번 뵈었습니다. 황녀님과 함께요.”

    그러자 레녹스 공작이 잠시 의아한 눈빛으로 리첼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부담스러운 붉은 시선을 느끼자 몸이 움찔거렸다.

    “그럼 이만.”

    사제와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이동하려는데 갑자기 카일의 몸이 약간 흔들렸다. 누군가 그의 등을 살짝 민 것 같았다.

    “사제님!”

    곧이어 귓가를 울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일의 등 뒤에 있던 여인이 얼굴을 빼꼼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눈처럼 하얀 피부,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주황빛 머리카락, 짙은 갈색 눈동자, 오목조목 어우러진 이목구비가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툭 치면 쓰러질 것만 같은 가녀린 그녀는 드레스가 아니라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신전에는 남자 사제만 머무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있다는 건.

    “성녀님. 제가 예의를 지키라 했습니다.”

    카일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었다.

    역시나 그녀는 성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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