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안의 살림꾼-222화 (222/228)
  • 던전 안의 살림꾼 외전 8화

    너울은 입을 쩍 벌렸다.

    “너는 일이 그렇게 좋냐? 인간들도 거의 안 만나고 온종일 농사만 지을 정도로?”

    매일같이 시퍼렇기만 한 그 풀때기들이 뭐가 좋단 말인가? 그놈들은 말도 못 하고, 생긴 것도 지루했다.

    하지만 희원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손 닿으면 닿는 대로 쑥쑥 자라는 게 얼마나 대견한데. 노력한 만큼 보상이 찾아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너는 잘 모르려나?”

    “내 알 바는 아닌 것 같다.”

    “그래. 그리고…… 흠, 이건 비밀인데.”

    희원이 목소리를 낮췄다. 너울의 귀가 쫑긋 솟았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튀어나올 조짐이 보였다.

    “뭔데, 뭔데?”

    “그리고…… 내가 언제까지 희나네 집에 얹혀살 수는 없잖아. 나도 독립해야지.”

    “네 말은, 저기 반대 세상의 집으로 분가할 거란 소리야?”

    “맞아.”

    “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거기 달팽이는 성격도 더럽고, 곧바로 너희 진짜 세상이랑 이어지지도 않는데? 거기다 너, 희나랑 사이 나쁜 것도 아니잖아.”

    그러자 희원이 눈을 찡긋했다.

    “언젠간 희나도 결혼하고 따로 가정을 꾸릴 테니까. 신혼을 방해하면 쓰나?”

    희원도 희나와 강진현의 연애 행각에 질색하는 것처럼 굴더니,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 여기서 더 염병이 심해지면 견디기 힘들 테니까 미리 대피하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너울은 희원의 혜안에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그렇지?”

    희원은 씨익 웃으며 너울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럼 난 정말로 가 본다. 요즘 개간 중인 땅이 있는데, 어찌나 해야 할 일이 많은지……. 어이구. 허리가 휜다, 휘어.”

    희원은 새 장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손을 흔들었다.

    “바둑아! 아빠랑 놀러 가자!”

    챱챱챱챱!

    커다란 식물 몬스터가 그런 희원의 등 뒤를 따랐다.

    너울은 희원의 뒷모습을 찰칵 찍었다.

    물론 이 또한 SNS에 올릴 사진이니 바둑이는 피해서 찍었다. 언뜻 보면 그저 커다란 달팽이인 오색이와 다르게, 바둑이는 누가 보아도 몬스터였기 때문이다.

    ‘역시 나는 생각이 깊다니까.’

    너울은 짧은 감상과 함께 게시글을 업로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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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일하는 게 재미있을 수 있나? #일개미 #농부 #미친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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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집 인간들은 참 특이하다니깐.’

    하긴, 그러니 자길 그 지긋지긋한 던전에서 빼내 자기 집에 들여앉힐 생각을 했겠지.

    너울은 단상을 스쳐 보내곤 으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오늘은 사진 열 개 찍어서 글 열 개 올리고 만다!”

    인간은 인간의 목표가 있듯, 악마도 악마의 목표가 있다.

    그리고 한동안 악마의 장래 희망은 ‘SNS 스타’가 될 예정이었다.

    외전 3. 연애의 진수

    앳킨스 남매의 불화 소식을 전한 건 한 통의 이메일이었다.

    [희나.

    서론은 생략하고 본론부터 이야기할게요.

    릴리가 가출했어요.

    한국행 비행기를 탄 걸 봐서 희나에게 간 것 같아요. 그 애가 한국에 알 만한 사람은 희나뿐이니까요.]

    내용은 구구절절 이어졌다.

    길디긴 이메일을 요약하자면, 내용은 대충 이랬다.

    파비안 앳킨스의 동생인 릴리 앳킨스가 가출했다. 까닭은 오빠인 파비안이 릴리의 연애 사업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릴리의 연애 상대가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쓰레기라서……란 점은 좀 사감이 들어간 것 같으니까, 판단을 보류해 둬야겠지.’

    솔직히 ‘파비안 앳킨스’를 검색하면 나오는 연애 치정 기사가 얼마나 많던가?

    희나는 릴리의 남자 친구가 좀 덜떨어졌어도 파비안만큼 전적이 화려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뭐, 어쨌든.’

    파비안이 보기에 릴리의 연인은 형편없었고, 남매는 며칠 전 이 주제로 대판 말싸움을 벌였다.

    남매 싸움의 결말은, 보다시피 릴리의 가출이었다.

    Rrrr…….

    때맞춰 희나의 휴대전화가 띠링띠링 울리기 시작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발신인이 누구인지 예상이 갔다.

    “여보세요.”

    - 희나! 저 릴리예요. 릴리 앳킨스. 내가 지금 어디게요?

    희나는 아무 사정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음, 글쎄요. 릴리가 있을 곳이라면 미국 아닐까요?”

    - 아니에요! 한국이에요! 서프라이즈! 놀랐죠? 지금 방금 도착해서 호텔 체크인하자마자 연락했어요.

    “한국에 왔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 봐요?”

    - 그, 그건 아니고, 그냥 심심해서요. 무작정 외국으로 떠나고 싶었는데, 희나가 떠오르지 뭐예요? 그래서 한국을 택했죠.

    릴리는 전혀 하나뿐인 가족과 싸우고 가출한 사람 같지 않았다. 조잘거리며 희나가 보고 싶었다고 애정 표현을 했다.

    “오늘은 비행기 때문에 피곤할 테니까 푹 쉬고, 내일 만날까요? 내가 한국 관광시켜 줄게요.”

    - 희나가 바쁘지 않다면야, 난 당연히 좋죠!

    희나는 릴리와 만날 약속을 잡고는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내리자마자 옆자리에 있던 강진현이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음. 일단 상황을 알아보긴 해야겠죠?”

    * * *

    “희나! 오래간만이에요!”

    릴리 앳킨스가 희나를 꽉 껴안았다. 거의 10년을 병상에 누워 있었던 사람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힘이 셌다.

    ‘각성자는 아니라고 했는데.’

    오빠인 파비안 앳킨스가 매일같이 좋은 것만 먹여서 그럴지도 몰랐다.

    “반가워요.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건강해진 것 같아요, 릴리.”

    릴리는 얇은 실타래 같은 금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예쁜 아가씨였다. 올해로 스물세 살이니, 한참 싱그러울 나이였다.

    “오래간만인데, 어디 가서 근황이라도 좀 나눠요. 일단 릴리가 갑자기 여기에 왜 왔는지부터 얘기해 줘요. 엄청 궁금하니까요.”

    파비안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건 모른 척, 시치미까지 뗐다.

    “좋아요! 희나가 좋은 곳으로 안내해 줘요!”

    희나와 릴리는 근처 예쁜 카페에 들어갔다.

    음료를 앞에 놓자마자 릴리가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할게요. 나 오빠랑 싸우고 가출했어요.”

    “그, 그렇구나아…….”

    솔직한 고백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희나는 놀랍다는 듯 마저 말을 이었다.

    “그런데 파비안은 꽤 좋은 오빠잖아요? 릴리도 좋은 동생이고요. 둘이 싸울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래요! 파브가 좋은 오빠인 건 맞아요. 하지만 오빠는 나를 너무 과잉보호해요.”

    “10년 만에 깨어난 동생이잖아요. 소중할 수밖에요.”

    릴리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하지만 요즘 파브는 오빠가 아니라 아빠처럼 군다고요. 그것도 아주 엄격하고 고리타분한 아빠!”

    에둘러 물을 필요도 없었다. 릴리는 미주알고주알 파비안과 있었던 일을 일러바쳤다.

    한 달 전이었던가? 릴리는 쇼핑을 나갔다가 우연히 모르는 남자와 부딪쳐 밀크셰이크를 쏟았다.

    그게 인연이 되어 이러쿵저러쿵…… 어쩌고저쩌고…… 마침내 그 남자는 릴리의 연인이 되었다.

    “그런데 오빠가 그를 너무 맘에 안 들어 해요! 처음 그를 보았을 땐 얼마나 무례하게 굴던지!”

    릴리는 오빠 때문에 연인인 마이크의 마음이 몹시 상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수백 번쯤 해야 했다고 투덜거렸다.

    “파비안이 왜 그랬는지는 몰라요?”

    “그건 몰라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둘이 만나서 멱살잡이를 하고 있더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오빠가 일방적으로 마이크를 쥐고 흔들어 대고 있는 거였지만…….”

    “흐음.”

    희나는 턱을 괸 채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쪼르륵 마셨다.

    ‘파비안은 아무런 의미 없이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닌데.’

    물론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는 오빠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남자든 동생의 짝으로 마음에 들 리 없겠지만…….

    ‘하지만 동생의 행복을 축복해 주진 못할망정 방해하다니, 이건 진짜 파비안답지 않아.’

    의구심이 피어났다.

    ‘일단 릴리의 남자 친구가 어떤 인간인지부터 알아봐야겠어.’

    희나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부터 유도 신문을 시작할 시간이다.

    * * *

    희나는 주먹으로 식탁을 쾅 내리쳤다.

    “……그런 쓰레기 같은 새끼한테 걸리다니!”

    느껴지는 진동에 오색이가 안테나를 파르르 떨었다.

    「ㄷㄷㄷ」

    하지만 희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속이 탔기 때문이다.

    “아니 순진한 릴리에게 그딴 놈팡이가 말이 돼? 방울뱀 자식!”

    릴리에게 전해 들은바, 이 ‘마이크’라는 놈은 답 없는 놈팡이였다.

    ‘심지어 릴리 눈엔 콩깍지가 씌어 미화해서 말했을 텐데, 그 수준이라니!’

    이리 듣고, 저리 들어도 마이크는 릴리의 돈을 노리고 붙은 거머리였다.

    거기다 돈만 빨아먹는 것도 아니었다. 릴리의 자존감까지 빨아먹는 거머리이기까지 했다!

    ‘아니! 릴리한테 잘해 주기라도 하면 몰라!’

    릴리의 돈으로 놀고먹는 건 예사.

    예술을 한다는 이유로 변덕스럽게 굴었고, 서운해하는 릴리의 이해심이 부족하다며 타박했다.

    ‘확실히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서 그런지 난 현실 감각도 떨어지고 좀 어린애처럼 구는 면이 있나 봐요.’

    ……릴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하다니!

    희나는 파비안이 왜 그놈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턱주가리를 날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파비안은 성자 칭호를 받아 마땅했다.

    ‘나였다면…….’

    희나는 마음속으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만큼 잔혹한 상상을 했다.

    「ㅎㄷㄷ」

    「집주인 눈빛 살벌;」

    「끼요오오옷」

    옆에서 호들갑을 떨어 대기에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 주었더니, 오색이도 태도를 싹 바꾸었다.

    「죽여!」

    「잘라!」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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