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안의 살림꾼-223화 (223/228)
  • 던전 안의 살림꾼 외전 9화

    “그 의견엔 나도 동감이야.”

    그러면서 희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말해 봤자 릴리의 사랑은 절대 식지 않을 거란 문제가 있지.”

    로미오와 줄리엣이 어째서 죽음을 뛰어넘는 절절한 사랑을 했는지 아는가? 집안에서 반대하는 금지된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반대하면 괜히 반발심에 오기만 생겨.”

    심지어 마이크의 사진을 보니, 그는 로미오만큼 잘생기지도 않았다.

    「답답! 답답! 고구마 답답!」

    ……그래. 마이크는 뭉개진 고구마처럼 생겼다.

    「갑갑! 이 연애 허락 못 함!」

    아마 달팽이에게 손이 있었다면 오색이는 가슴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희나의 질문에 오색이가 안테나를 팟 세웠다. 그러고는 희나를 마구 가리켰다.

    「집주인!」

    「본때를 보여 줘야 함!」

    “본때라니, 다짜고짜 무슨 소리야?”

    「집주인 + 하숙인1 = 염병의 진수」

    「진짜 앞에선 진한 현타!」

    「인생도 현타 오니 연애도 현타 올 것!」

    「분명! 100% 확신!」

    흥분해서 내뱉는 말들을 해석해 보니 그 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릴리는 제대로 된 대우도 못 받으면서 연애하고 있다. 하지만 남의 연애를 보면 조금 정신이 들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희나의 연애 같은?’

    오색이의 ‘염병, 현타’ 파트는 완전히 무시해 버린 채 낸 결론이다.

    어쨌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오색이가 말하려고 했던 바와 뜻은 일맥상통하니 문제는 없는 셈이다.

    “맞아. 네 말이 맞아. 옆에서 말리는 것보다, 보여 주면서 깨닫게 하는 편이 낫겠지.”

    희나는 릴리에게 참된 연애의 진수를 보여 주리라, 다짐했다.

    * * *

    “……그러니까 협조해 줘야 해요?”

    “알겠습니다. 아주 쉽군요.”

    강진현은 희나의 부탁을 냉큼 수락했다.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대해 달라니, 희나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태도를 자제하고 있던 그에게는 굉장히 반가운 소리였다.

    ‘오늘은 마음껏 행동할 수 있겠군.’

    강진현은 오늘 하루가 굉장히 즐거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사이, 저 멀리서 릴리 앳킨스가 등장했다.

    “희나! 오늘도 시간 내주어서 고마워요. 진현도요.”

    “릴리랑 함께 노는 일인데요, 뭘. 오늘은 우리 청룡 길드 소개해 줄게요.”

    “신난다. 파브는…… 알다시피 프리 헌터라서 길드가 어떤 곳일지 늘 궁금했어요.”

    “이런. 어쩌면 실망할 수도 있어요. 청룡은 보통 회사랑 별반 다를 바 없거든요. 물론 헌터들이야…… 꽤 특이하긴 하지만요.”

    희나는 릴리의 목에 게스트 출입증을 걸어 주었다. 릴리는 신기해하며 출입증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소개해 줄게요, 청룡.”

    희나는 그런 릴리의 손을 끌어당겼다.

    근사하게 꾸며진 청룡 로비를 보여 주고, 파티션 너머의 일반인 직원 근무처도 슬쩍 보여 주었다.

    다음 행선지는 헌터 휴게실이었다.

    팀장급이나 조장급이 아닌 이상, 헌터들은 딱히 사무실이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헌터들은 만나 봤어요?”

    “파브 크루 정도만 만나 본 게 다예요. 어디 길드에 소속된 사람들은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파비안이 릴리를 애지중지한 게 사실이긴 한지, 릴리는 의외로 헌터와 인연이 없었다.

    ‘하긴. 헌터들은 좀 거칠고 제멋대로인 면이 있으니까. 릴리가 걱정됐나 보지.’

    희나가 강진현, 릴리와 함께 휴게실로 들어가자 시선이 확 쏠렸다.

    일단 희나는 밥 주는 사람이었고, 강진현은 길드 유일의 S급 헌터였으며, 마지막으로 릴리는…… 예뻤다.

    “우와. 누구지? 외국 모델인가?”

    “강 헌터랑은 아무 사이도 아닐 게 뻔하고, 희나 팀장님이랑 무슨 사이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얼굴이 익숙해.”

    “연예인이니까 어딘가에서 봤겠지.”

    “아니야. 누구랑 닮았어.”

    헌터들은 웅성거렸다. 아니, 웅성이라기엔 좀 목소리가 컸지만, 어쨌든 웅성거렸다.

    이내 시선은 희나에게로 다시 몰렸다. 모두의 눈이 반짝거렸다. 눈빛이 ‘소개해 주세요!’ 하고 외치고 있었다.

    “우선 릴리, 이쪽은 우리 청룡 길드 헌터들이에요. 인사 나누고 싶으면 따로 소개해 줄 수 있어요. 식탐이 좀 많은 게 문제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없으니까 걱정 마요.”

    가벼운 농담을 던지자 헌터들이 가짜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니, 희나 팀장님 너무해요.”

    “우리를 고작 먹보 정도로 소개하다니!”

    “팀장님이 직접 한 음식을 앞에 두고 욕심을 안 부리는 놈이야말로 미친놈인 거죠.”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릴리도 헌터들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안녕하세요? 나는 릴리 앳킨스예요. 희나랑은…… 오빠 통해서 알게 되었고, 굉장히 친한 사이랍니다! 이번에 한국 처음 와 봤는데, 굉장히 재밌는 곳이네요.”

    릴리가 이름을 밝히자마자 눈치 좋은 헌터 몇이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혹시 파비안 앳킨스와 무슨 사이예요? 성도 같고, 얼굴도 비슷한데…….”

    “파브요? 친오빠예요.”

    릴리는 뽀로통하게 대답했다. 아직 파비안에 대한 앙심이 남은 모양이었다.

    “헉. 어쩐지, 얼굴이 익숙하더라니. 파비안이랑 닮아서였어.”

    “대박. 그런데 파비안 앳킨스한테도 친혈육이 있었던가?”

    “알 게 뭐야? 감추고 있었나 보지.”

    헌터들은 속삭이면서도 릴리에게 와르르 몰려들었다.

    “사인 좀 해 줄 수 있어요?”

    “없는데……. 그냥 이름 써 줘도 돼요?”

    “나랑 사진 같이 찍어 줄래요?”

    “안 될 것도 없죠. 나 사진 찍는 거 좋아해요.”

    “그나저나 같이 찍은 사진 SNS에 올려도 돼요? 파비안 동생이랑 만났다고?”

    “파비안 동생이라고 하는 건 싫고, 그냥 릴리 앳킨스랑 만났다고 써 주세요.”

    “파비안 앳킨스는 스포츠카만 스무 대도 넘게 가지고 있다는데, 그거 사실이에요?”

    “많긴 해요. 요새는 요트에 관심이 있어 보이던데.”

    릴리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차근차근 답했다. 그러면서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하고, 서로 SNS 팔로잉도 했다.

    그 익숙한 대응에 희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강진현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아. 앳킨스 남매는 유명인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군요.”

    “둘 다 얼굴도 예쁘고 잘생겼고, 성격도 외향적이고. 관심 받는 것도…… 좋아하는 것 같고.”

    “공통점이 많은 남매군요. 희나 씨와 희원 형님처럼요.”

    “저 남매가 셀럽이라면 우리 남매는 뭐…… 소시민 남매, 이런 건가?”

    그럴싸했으므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강진현은 조금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소박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건 다른 얘기고요. 두 분 다 마음이 곧고 따뜻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소리였습니다.”

    “어머. 칭찬 고마워요.”

    “거기다 희나 씨는 사랑스럽기까지 하고요.”

    “……별 얘기를 다.”

    “저는 언제나 진심만 말합니다. 희나 씨는 누구보다 완벽한 사람입니다. 정말로요.”

    도란도란 염병…… 아니, 이야기하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음?”

    고개를 들어 보니 릴리였다. 왁자지껄, 사람들 틈에서 이야기하던 와중에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희나는 방긋 웃으며 입 모양으로 물었다.

    ‘더 이야기하다 갈래요?’

    그러자 릴리 앳킨스는 한쪽 눈을 찡긋하곤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다음에 봐요!”

    “내가 얘기해 준 곳, 꼭 가 봐요. 진짜 좋은 데니까!”

    몇 분 얘기한 것 같지 않은데, 헌터들은 마치 절친이라도 된 듯 릴리를 배웅했다.

    왁자지껄한 헌터 휴게실을 나와, 희나는 일행을 이끌고 자기 사무실로 올라갔다.

    희나는 특제 믹스 커피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땠어요? 정신없었죠?”

    “재밌었어요! 사람들 성격도 엄청 좋았고, 파티 온 것 같던데요?”

    릴리는 종이컵에 담긴 믹스 커피를 한 잔 홀짝 마셨다가 놀란 표정을 했다.

    “이게 바로 그거구나! 오빠한테 들었어요. 한때 섬을 주름잡았던…… 그거!”

    “맞아요. 그냥 타 먹어도 맛있는데, 이건 내 손맛이 들어가서 좀 더 맛있어졌을걸요.”

    다른 건 겸손해도 손맛 앞에서는 어깨가 절로 으쓱했다.

    ‘내가 바로 S급 살림꾼이란 말이지.’

    희나의 자기 자랑에 릴리가 까르르 웃었다.

    “멋있어요 희나! 그나저나 아까 무슨 얘길 그렇게 하고 있었어요?”

    “아까요?”

    “휴게실에서 희나랑 진현, 둘만 밀담을 나누고 있었잖아요. 되게 즐거워 보여서.”

    “별말은 안 했는데…… 앳킨스 남매는 태생부터 셀러브리티 같다는 얘기?”

    “그리고 희나 씨는 마음씨도, 외모도 무엇 하나 빠질 것 없이 사랑스럽고 완벽하다는 이야기요.”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진현이 대화에 쏙 끼어들었다. 그의 말은 줄줄이 이어졌다.

    “보시다시피 희나 씨는 못 하는 게 없습니다. 음료 하나를 타도 완벽하게 타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 주고, 행복을 전파합니다. 세상에 희나 씨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런 희나 씨가 제 앞에 나타나 연인이 되어 주었다는 것은 제게는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읍!”

    희나는 강진현의 입을 막았다. 밑도 끝도 없는 주접에 얼굴이 새빨개진 채였다.

    “진현 씨! 민망하게 왜 이래요!”

    그러자 강진현은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연인은 시선으로 재빠르게 대화했다.

    ‘릴리 앳킨스 앞에서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건 다정한 게 아니라 민망한 거잖아요!’

    ‘왜 민망합니까?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인데.’

    매번 그래 왔지만, 강진현의 뻔뻔함엔 답이 없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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