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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61화 (61/228)
  • 던전 안의 살림꾼 61화

    “네에?”

    어딜 가도 옆집에 강진현이 살게 됐을 거란 이야기였다. 희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허 웃었다.

    강목현은 차분히 설명했다.

    - 내일 출근하시게 되면 고지해 드리려 했는데, 우리 측 대처가 안일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일하시다 보면 자주 오가게 될 테니, 가까이 있는 편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일을 진행했습니다. 오판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보상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지급하겠다고 말했다.

    뻔뻔하게 굴었다면 더 따지고 들었을 텐데, 상대가 순순히 사과의 말을 내뱉자 희나의 무른 마음은 쉽게 누그러졌다. 좀 어이가 없긴 했지만…….

    “……뭐,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야……. 아무튼, 놀랐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었으면 해요. 앞으로 계속 같이 일할 사이인데 껄끄러운 일이 생기면 안 되잖아요.”

    -예. 길드 측에서 이희나 팀장을 충분히 배려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물질적으로나마 정신적 충격을 배상해 드리고 싶습니다.

    강목현은 황금 만능주의적인 발언을 하며 희나의 마음을 다시 꾀어 보려 하는 것 같았다. 어찌 돈으로 사람 마음을 다시 사겠느냐마는…… 희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금융 치료는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그럼…….”

    희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좋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 * *

    “히히.”

    희나는 검은 카드를 만지며 비식비식 웃었다.

    “내 동생 낯짝이 이렇게 두꺼울 줄이야. 아니, 이렇게 담이 클 줄이야.”

    희원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희나의 뒤를 어슬렁어슬렁 따랐다. 희나는 그런 오빠를 향해 톡 쏘아붙였다.

    “받을 수 있을 때 받아 놔야 하는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일은 정당하다고.”

    희나는 이번 각성자 상태 관리팀장을 맡게 되면서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는 길드와 길드 간부들의 재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희나는 그간 강진현이 커다란 마석을 턱턱 내놓는 걸 봐 놓고도 그 재력을 확실히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석은 일반인들에게는 좀 생소한 개념이었으니까.

    하지만 ‘집’은 달랐다. 내 집 마련이 꿈이던 희나에게, 매일같이 부동산 앱을 들여다보며 한숨짓던 희나에게 집이란 마석보다 훨씬 피부에 와닿는 재화였다.

    그런 집을 아무렇지 않게 세 채나 주고도 엄청나게 많은 계약금을 얹어 줄 정도라니. 희나는 그제야 헌터 세계의 엄청난 금전 감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두 번째 깨달음은 조금 개인적인 것이었다.

    길드에서 한번 집을 받고 나니, 그 외의 것은 모두 별거 아닌 듯이 느껴졌다. 좀 더 배짱 심보가 된 것 같았다.

    ‘이게 바로 화장실 가기 전이랑 후가 다르다는 그건가?’

    희나는 그동안 강진현의 숱한 유혹을 잘 뿌리쳐 왔다. 하지만 이번 계기로 어쩔 수 없이 계약을 치르고 나니,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이미 저지른 일이고 받아 버린 재산이었다. 한 번 받으나 두 번 받으나, 혹은 세 번 받으나 그게 그거라는 의미였다.

    “가구 좀 지르는 것 정도로는 이 카드에 흠집도 안 날걸.”

    희나는 자기 합리화하듯 중얼거렸다.

    그렇다. 남매는 지금 가구 매장을 돌고 있었다. 그것도 길드를 통해 받은 새까만 카드를 들고 말이다.

    희나는 속으로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이건 중요한 사실을 사전 고지해 주지 않은 길드 측이 물어야 할 정당한 비용이었다.

    ‘손해 배상으로 이사 지원금 정도는 받아야지.’

    희나의 요구에 인사팀장 강목현은 결제 한도는 없으니 마음껏 긁어도 된다며 선뜻 카드를 내주었다.

    마침 생각해 둔 인테리어 콘셉트도 있었기에 가구를 선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격을 신경 안 써도 되는 쇼핑이 이렇게 편한 거였구나.’

    더불어 쇼핑의 신세계도 경험했다. 고민할 건 가구의 색깔과 모양, 견고함밖에 없었다.

    테트리스 하듯 예산을 이리저리 조립할 필요가 없으니 이상할 정도의 해방감까지 느껴졌다.

    “결제는 일시불로 해 주세요.”

    희나는 가장 고심했던 거실 소파를 한 방에 긁었다. 가구 매장에서의 마지막 결제였다.

    “다 했다!”

    기지개까지 켜니 이렇게 개운할 데가 없었다.

    아직 자잘한 소품들은 사지 않았지만, 그건 커다란 가구를 배치한 후에 천천히 진행할 예정이었다.

    “이야. 나는 따라다니기만 했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냐?”

    희원이 옆에서 투덜거렸다.

    오래간만에 던전 밖으로 나오니까 서울 공기가 안 좋은 게 확 느껴진다느니, 갑갑하다느니, 땅이 모두 아스팔트로 덮여 있다느니…….

    말하는 것만 들어 보면 어디서 온 자연인인가 싶었다.

    “오빤 너무 집 밖에 안 나와. 시간도 남는데 밖에서 영화라도 보고 좀 놀아 봐.”

    생각해 보니 희원은 필요한 것을 사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홈 스위트 홈’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몹시 적었다.

    “맨날 집 앞 텃밭만 가꾸고 있고……. 이제 사정도 넉넉해졌는데 사람도 좀 만나고 그래.”

    희나는 희원이 뒤늦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자기를 제외하면 사람과 교류를 거의 하지 않는 셈 아닌가? 사회성 결여가 의심됐다.

    “괜찮아. 오색이도 있고 바둑이도 있는데 뭘. 지금은 혼자서 땅 파고 흙 만지는 일이 더 즐겁다. 요새는 바둑이의 황금 가루 덕분인가? 예전보다 식물도 좀 더 잘 자라는 것 같아.”

    희원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간 희나를 먹여 살리느라 사람들이랑 잔뜩 부대끼며 지내는 게 넌덜머리 났다며 너스레도 떨었다.

    “내가 뭐 식충이인 줄 알아? 나도 내 밥값은 했거든!”

    삐죽거리며 옆구리를 툭 치자, 희원이 으악 소리를 과장해서 질렀다. 살짝 무거워질 뻔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아무튼. 내 말뜻은 일만 하지 말라는 거야. 그간 고생 많이 했으니까 이제 내가 책임질게.”

    “든든하다, 든든해. 잘 키운 동생 하나 로또 당첨 안 부럽지. 암, 그렇고말고.”

    “오빤 가끔 별소리를 다 한다니까.”

    남매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하는 오래간만의 외출을 즐겼다. 길었던 휴가의 마지막 날이니만큼, 오빠와 좋은 추억을 쌓고 갈 예정이었다.

    희나와 희원은 값비싼 식당에서 외식을 하고 돌아왔다. 희나가 사는 밥이었다.

    한 사람당 10만 원이 넘는 가격을 본 희원이 회사에서 받은 블랙 카드를 쓰자고 희나를 꼬드겼으나, 희나는 끝끝내 자기 카드를 긁었다.

    “이건 내 진급 턱이야.”

    비록 회사 카드를 사적인 용도로 뜯어먹고 있다지만, 희나는 지킬 건 지키는 사람이었다. 블랙 카드는 집을 꾸미는 용도로만 긁을 생각이었다.

    대범한 척하는 소심한 사람의 한계였다. 그 이상 돈을 쓰는 건 양심에 찔렸다.

    “비싼 밥 사 줘서 고맙다. 그런데 네가 쓱쓱 해 주는 밥이 더 맛있으니까 다음에는 이렇게 큰돈 쓸 필요 없어.”

    식당을 나온 희원이 작게 툴툴거렸다.

    그는 삼시 세끼 희나가 만들어 주는 집밥을 먹으며 입맛이 몹시 까탈스러워진 상태였다. 어지간한 손맛은 성에 안 찰 법도 했다.

    “나는 그래도 오빠랑 외식해서 좋았어. 되게 오래간만이잖아.”

    남매는 늘 사는 게 바빴다. 던전을 드나드느라, 밤새 야근을 하느라 이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건 그래. 부모님이랑 같이 외식 다닐 때 생각나고 좋네.”

    희원이 먼 과거를 회상하며 빙그레 웃음 지었다.

    희나 또한 몽글몽글 피어나는 옛 추억에 빠져들며 ‘홈 스위트 홈’ 현관문을 열었다.

    이 문을 열면 남매의 새로운 식구인 오색이와 바둑이가 그들을 열렬히 맞아 주리라.

    ‘부모님을 잃고 한없이 절망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랬던 희원과 희나가 이제는 새 가족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괜히 가슴이 벅찼다.

    희나는 평소보다 밝은 목소리로 오색이와 바둑이를 불렀다.

    “얘들아, 우리 왔어. 오래 기다렸지?”

    “바둑아, 아빠 왔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스스슥, 사삭.

    검은 잔상이 따뜻해진 마음을 안고 현관에 들어온 남매를 반겼다.

    “꺄악!”

    희나는 눈앞으로 돌진하는 시커먼 무엇인가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제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뒤따라 들어오던 희원은 채 피하지 못하고 이마를 따콩, 하고 두들겨 맞았다.

    “으악! 이게 뭐야!”

    희원은 손을 들어 얼굴에 붙은 것을 탈탈 털어 냈다. 그러자 시꺼멓고 꿈틀거리는 무엇인가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현관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본 희나가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벌레잖아!”

    그것은 투명한 날개를 퍼덕이는 벌레였다. 날파리처럼 생겼는데, 크기가 거의 손가락 한 마디만 했다. 그리고 날파리보다 크기가 커진 만큼 더 징그러웠다.

    “으아아!”

    충격적인 광경에 넋 놓은 탄식을 내지르고 있는데 오색이의 메시지가 눈앞에 떴다.

    「♨비상♨ ♨비상♨ ♨핫뜨거워♨ ♨HOT뜨거♨」

    주먹만 한 달팽이가 고물고물 기어오며 ‘비상’을 외치고 있었다. 붙어 있는 온갖 특수 문자는 덤이었다.

    “……오색아?”

    엄청나게 흥분한 오색이를 보니 오히려 이성을 찾게 됐다. 희나는 현관문에 놓인 슬리퍼로 날파리를 탁 때려 죽였다.

    “뭐야, 오색아? 무슨 일이야?”

    대답은 시스템 창이 대신 해 줬다.

    해충 방제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는 문구였다. 보아하니 지난번 정전 사태와 비슷한 이벤트인 것 같았다.

    “이 집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어?”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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