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20화 (완결) (120/120)

120화. 제 남편이 되어 주세요

찰리의 연극은 인기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한 부부가 맞바람을 피우다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소설은 르니예에게 에드윈이라는 남편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하필이면 읽었던 것이었다.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벨데메르는 심경이 복잡했다. 역시 에드윈을 죽여서 아예 없애 버렸어야 했나.

끝까지 르니예에게 부인이라고 부르던 에드윈이 떠올라 벨데메르는 연극을 보는 내내 부글부글 끓었다.

다행히 연극은 짧았다.

“연극 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주인공이라니, 대단하네.”

르니예는 일어나 손뼉을 치며 중얼거렸다.

“연기 잘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지, 샤피로?”

르니예는 샤피로를 보며 물었다. 그러나 샤피로는 찰리에게 쏟아지는 박수갈채에 완전히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저딴 연기에 이런 찬양이라니.”

샤피로는 눈을 반짝이며 벨데메르를 쳐다보았다.

“주인님께서 저 자리에 계셔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런 찬양은 주인님께서 받으셔야 하는데.”

벨데메르가 연기를? 르니예는 잠시 상상하고 키득키득 웃었다. 그보다 찬양은 샤피로가 더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예전부터 그놈의 찬양, 찬양, 노래를 불렀었지.

“네가 해 봐. 연기도 잘하잖아. 데뷔하자마자 스타 되겠다, 너는.”

“제가 말입니까?”

샤피로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주인님의 시중은 누가 듭니까?”

“하인을 고용해도 되고, 이제 마력도 완전히 돌아왔으니까 사역마를 또 만들어도 되고.”

르니예는 그렇지 않냐는 동의를 담아 벨데메르를 쳐다보았다.

“네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오랜 시간 수고가 많았으니.”

자기가 만든 사역마를 독립시키는 마법사가 있던가?

역시 내가 사역마를 너무 잘 만든 탓이지.

“제가 정말 그래도 된단 말입니까?”

샤피로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말은 하지만, 벌써 좀 들떠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하나 인수인계를 준비했다.

“꿀벌, 잘 들어. 저번에도 르니예 님을 놓쳐서 위험에 처하게 해 놓고, 이번에도 르니예 님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잖아.”

꿀벌은 억울했다. 후작저에서 있었던 일은 그의 잘못이지만, 2왕자 때 꿀벌은 경고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입만 있었다면 충분히 경고를 해 주고도 남았다.

“주인님께서 너를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차후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조치를 취하기로 하셨다.”

그래, 입을 주세요, 주인님, 입을!

제게 목소리를 주시란 말입니다!

“더 빠른 날개와 맹독을 넣어 주기로 하셨다.”

……주인님, 지금 그게 문제 같으세요? 맹독이 무슨 소용입니까!

꿀벌은 소리쳐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없었다. 날개로 윙 소리를 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답답해서 터져 죽기 전에, 그는 글을 배우기로 했다.

“쟤 지금 책 읽는 거야?”

“꽃이랑 꿀 그림 나오니까 쳐다보고 있는 거 아닐까요?”

르니예는 책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꿀벌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꿀벌은 요즘 정원에 나가 노는 시간보다 책에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다.

저러다가 나중에 글도 쓰는 거 아니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르니예는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했다.

곧 있을 작위 수여식에 참여하기 위해 수도로 올라가는 날이었다.

“레 마리스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상단주님.”

“딱 시간 맞춰서 왔네.”

르니예는 마리스를 맞이하기 위해 응접실로 향했다.

“마리스 씨, 오랜만에…….”

응접실에서 르니예는 멈칫했다. 마리스가 둘이었다.

그가 그런 소원을 빌었으니 둘이 되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본 감상은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왜냐면 두 마리스가 서로를 굉장히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애정 어린 손길로 서로를 쓰다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장면은 매우 기이했다.

“마리스 씨, 그리고, 어.”

“아, 우리는 이름을 나눠 쓰기로 했습니다. 나는 마리, 이쪽은 리스라고 불러 줘요.”

별걸 다 나누어 쓴다. 르니예는 정말 많은 노력을 해서 입꼬리를 올릴 수 있었다.

“소원 들어줘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마음속 구멍이 메워진 기분이에요.”

조각상이 말한 대로 하고 잠들었던 마리스는 다음 날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 또한 무언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내 일부가 떨어져 나갔어요.”

“우린 서로 다른 성격을 가졌습니다. 마리는 섬세하고, 다정하죠.”

“리스는, 정력적이랍니다, 하하.”

그들은 장단점도 나눠 가지고, 성격도 나눠 가졌다. 그리고 서로의 단점도 사랑했다.

“지금까지 용서할 수 없었던 내 단점을 끌어안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다행이네요, 마리스. 아니 마리랑 리스 씨가 행복해 보여서.”

솔직히 그런 이상한 소원을 빌어서 걱정하긴 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그럴까 봐.

“자, 이건 약속한 물건입니다. 부디 유용하게 쓰시기를.”

르니예는 진주 목걸이를 확인하고 마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다음 거래도 기대할게요.”

르니예는 리스랑도 똑같이 악수하고는 진주 목걸이를 챙겨서 나왔다. 귀한 물건이라 르니예는 자기가 들고 탔다.

“이상한 소원을 빈 상인에게서 받은 건가?”

“네. 자기 반쪽을 만나서 하나도 외롭지 않대요. 이상하긴 해도, 다들 자기 짝이라는 게 있나 봐요.”

운명의 상대, 그런 걸 믿진 않았는데 오늘 마리스를 보니 믿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 같군. 나도 그대를 만나기 전에는 당장 사제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순결한 사람이었지.”

“그런 사람을 내가 망가트렸다?”

“그대는 부정하면 안 돼. 그대가 가져간 내 모든 처음을 잊진 않았겠지?”

그렇게 말한다면, 또 할 말은 없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네. 내가 평생 벨데메르 데리고 살아야겠다.”

르니예가 선심 쓰듯 말하자 벨데메르는 피식 웃었다. 그는 요즘 자주 웃었다.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나올 때가 있었다.

이렇게 편안했던 적이 있었나? 마차가 덜컹거려 몸은 불편해도 마음은 편했다.

“……르니예.”

평온했던 마음에 르니예가 또 돌을 던졌다.

“아니, 이건, 실수. 실수예요!”

마차가 크게 덜컹거리는 바람에, 르니예는 중심을 잡으려 벨데메르의 허벅지를 짚었다.

그런데 너무 안쪽을 짚어 버린 것이다. 르니예는 당황하여 손을 떼려고 했지만,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손등을 지그시 눌러 잡으며 떼지 못하게 했다.

“샤피로는 그대가 내 복근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더군. 하지만 그대가 좋아하는 건 다른 부위인데 말이야.”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래? 그럼 그때 그 옷가게 주인이 내 조각상을 떼어 갔을 때 왜 그렇게 화를 냈지?”

벨데메르는 기어코 아이를 가지고 싶었던 클로에가 조각상의 남근을 떼어 갔던 걸 상기시켰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성적으로 행동했어야 했는데.

르니예는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벨데메르의 가슴에 파묻었다.

그런데 왜 점점 몸이 뒤로 기울어지는 걸까?

“벨데메르? 여기, 마차 안인데.”

“그대가 먼저 시작했어.”

“그건 실수였다니까요.”

“그래서 싫어? 수도에 올라가면 그대는 바쁠 테고, 내가 그대를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인데, 그것도 허락을 안 해 주는 건가?”

그는 제법 서운해 보였다. 샤피로랑 같이 연기를 시킬 걸 그랬나. 그가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걸 알지만,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차 안이고 길거리고, 벨데메르를 거부할 수 있을 리가.

르니예는 자유로운 팔로 벨데메르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얼마든지 허락하죠, 벨데메르.”

날이 추워서 참 다행이었다. 덕분에 목 끝까지 올라오는 드레스를 입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만일 여름이었다면, 목덜미의 그 흔적들을 숨기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작위식에 그런 흔적을 달고 갔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하지만 다행히 날이 추웠고 르니예는 작위 수여식을 무사히 마쳤다. 르니예는 준 남작의 작위와 함께 성을 하사받았다.

“짠, 이건 제 선물이에요, 아가씨.”

작위를 받고 돌아온 르니예를 위해 에니는 작은 파티를 열었다.

손님이라고는 펙과 세사르밖에 없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건 제 선물입니다, 르니예 님.”

“오, 샤피로.”

샤피로가 선물로 건넨 건 손수건이었다. 르니예가 새로 하사받은 성이 새겨진 손수건.

르니예 어니스트.

르니예는 성이 수놓인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작위를 받을 때는 실감이 나질 않았는데, 이제야 실감이 났다.

“나 이제 귀족이야.”

“그래, 이제 그대는 귀족이야.”

결국 참지 못하고 벌어지는 입매를 보면서 벨데메르도 같이 웃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르니예가 웃으면 따라 웃고 있었다.

앞으로도 늘 오늘만 같기를.

벨데메르는 사소한 순간에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가고 있었다.

“르니예 어니스트.”

에니가 파티를 준비하는 동안, 벨데메르도 준비한 것이 있었다.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연구하던 때, 읽었던 책의 내용을 그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한 시작은 ‘좋은 프러포즈’에 있다고 했다.

“나에게 그대 성을 따를 기회를 주겠나?”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미리 준비했던 반지 상자를 열었다.

“내 성을, 따르겠다고요? 라인허트는 이제 백작 가문이 되었는데요?”

그렇다. 펙은 무려 백작 작위를 하사받았다.

“후작이 아니라서 그래요?”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펙에게 후작 작위를 받아 오지 못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한 사람이 누구더라?

르니예는 펙을 슬쩍 쳐다보았다. 펙은 뒤통수라도 맞은 사람처럼 황망한 표정이었다.

“난 그대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르니예가 없는 세상이 그에게 의미가 없었으니, 르니예만 있다면 어떤 세상이든 의미가 있었다.

“벨데메르…….”

르니예는 반지와 벨데메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소원이 이뤄지고 난 다음, 그의 마음이 변할까 봐 두려워했던 나날은 이제 지나고 없었다.

그의 마음이 곧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했다.

“내 소원 하나 들어주면 얼마든지 내 성 쓰게 해 줄게요.”

“소원? 말해 봐.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지. 그래서 그대의 소원이 뭐지?”

이제 더는 바랄 게 없었다. 그 어떤 소원도 빌 필요가 없었다.

“제 남편이 되어 주세요.”

소원은 이미 이뤄졌으니까.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 본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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