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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18화 (118/120)

118화. 저주가 풀리고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그게 제 소원이에요.’

에니는 상단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무역상을 만나러 다니는 과정에서, 예전 은인을 만났다.

고아였던 어린 에니는 노예상에게 잡혀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에니는 팔려 가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에니는 탈출을 감행했고 성공은 했다. 하지만 금방 들켰고 잡히기 직전이었다.

“그때 저를 도와주셨던 게 마리스 아저씨예요.”

에니에게 아저씨라고 불리기에, 마리스는 젊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니를 도와줬던 그때 마리스도 성인이 아니었다.

에니가 나이를 가늠하지 못할 때라 그냥 저보다 큰 남자만 보면 아저씨라고 불렀을 뿐이었다.

“에니의 은인을 만나게 되어 반갑네요. 르니예라고 합니다.”

“에니가 좋은 주인님을 만난 것 같아 기쁘군요.”

그는 끽해야 그들보다 다섯 살이나 여섯 살쯤 많아 보였다. 마리스는 정중했고, 호감 가는 인상의 남자였다.

얼굴만 보면 말이다.

그는 아주 희한한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르니예는 그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시간이 오래 흘렀는데 에니가 용케 저를 알아보더군요.”

“못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에니의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은인이라서 알아보았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예전에도 옷을 그런 식으로 입었단 뜻이었다.

“펠레포네 영지를 올 때마다 저도 에니 생각을 했습니다.”

무역상 수습이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배에 몰래 에니를 태워와 가장 가까운 영지에 내려 주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펠레포네 영지였고, 이제는 어엿한 무역상이 된 마리스는 펠레포네에 올 때마다 어린 소녀를 떠올렸다.

“이렇게 만난 것도 운명이겠지요.”

마리스는 르니예와 에니를 데리고 그의 무역선 가장 안쪽으로 향했다. 그는 이미 에니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때마침 그에게 마땅한 물건이 있었다.

“진주 중에서도 가장 귀하다는 미크릴 펄입니다. 오로지 미크릴 해안에서만 나오죠.”

보석함이 열리며 나타난 오묘한 핑크빛의 진주에 르니예는 탄성을 흘렸다. 진주 중의 진주라 불리는 것이 미크릴 펄이었다.

“주변은 다이아몬드로 장식했고, 목걸이 자체는 백금입니다.”

그래, 한마디로 그 물건은 아주 눈이 부셨다. 그 누구라도 탐낼 만했다.

르니예의 속에서도 그걸 팔지 않고 가지고 싶은 욕망이 피어오를 정도였다.

“이 귀한 것과 바꿀 만한 소원이시겠죠?”

르니예는 진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에니가 그러더군요. 자기 소원은 노력하면 이룰 수 있지만, 마리스 씨 소원은 노력으로는 안 되는 거라고요.”

에니는 은혜도 갚고, 거래도 성사시킬 겸 자신의 소원을 양보했다. 그러면서 르니예에게 그런 말을 했다.

“이쯤 되니 궁금하네요. 마리스 씨 소원은 뭔가요?”

“제 소원은 저를 둘로 쪼개는 겁니다.”

“그래서 그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했습니까?”

“응.”

사람이라면 누구나 짝을 찾고 싶어 한다. 마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찾아 헤맨 짝이 자기 자신이란 말입니까?”

“그렇대.”

그 말을 하는 마리스는 너무나도 간절해 보였다.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나, 뭐라나.”

그는 자신을 가장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며,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아무튼 에니는 은혜를 갚고, 나는 귀한 매물을 얻고, 벨데메르는 소원 개수를 채우고, 서로에게 이득이지.”

“완전히 장사꾼이 다 되셨군요, 르니예 님.”

“응, 그러니까 조심해. 언젠가 너도 팔아 버릴지 몰라.”

샤피로는 흠칫했다.

“농담이야.”

“눈빛은 진심이었는데요.”

아주 살짝 진심이 있긴 했다. 샤피로야말로 귀한 매물 중에서도 희귀한 것이었다.

아마 샤피로를 판다고 하면 세사르는 공작가의 모든 재산을 다 가지고 오겠지.

그게 탐나서 샤피로를 팔겠단 뜻은 아니었다. 만약 판다면 그렇겠다는 뜻이었다.

“팔지 않을 테니까 준비나 해.”

르니예는 아련한 눈빛으로 벨데메르의 조각상을 쳐다보았다.

이게 마지막 소원이다. 이 소원을 들어주고 나면, 벨데메르는 조각상 밖으로 나온다.

봉인이 풀린 벨데메르는 내가 알던 벨데메르일까?

두려움과 그리움이 공존했다. 하지만 소원은 이루어져야 한다.

르니예는 마리스를 기다렸다.

“마리스 씨, 어서 오세요.”

마리스를 본 르니예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마리스가 너무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분명 이목을 끌지 않는 옷을 입고 오라고 했는데, 그는 휘황찬란한 금빛 천을 휘감고 왔다.

“이게 그나마 가장 얌전한 옷입니다.”

“아.”

마리스의 옷장에는 대체 어떤 옷이 있는 걸까. 하여간 특이한 사람이다. 르니예는 그를 직접 조각상까지 안내했다.

그는 조각상을 보자마자 감탄하며 말했다.

“이 조각상을 경매에 올리면, 왕국을 내놓는다는 사람도 있겠는데요.”

“그럴 수는 없어요. 제 남편이거든요.”

“……이 조각상이?”

“예.”

마리스는 이런 특이한 사람을 보았나, 하는 눈으로 르니예를 보다가 애써 수긍하는 척 웃었다.

그들은 서로가 참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의미 없는 웃음을 주고받았다.

“마리스 씨,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소원을 바꿔도 돼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난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서 온 바다를 헤매고 다녔어요.”

그는 미크릴 펄 목걸이를 내주고서 블러디 사파이어를 받았다. 그러고는 망설이지 않고 소원을 빌었다.

“저를 둘로 만들어 주십시오.”

“네 머리칼과 손톱을 잘라 고운 진흙과 섞고, 피를 아홉 방울 뿌린 뒤 화로에 넣고 재로 덮어라.”

마리스는 조각상에서 흘러나온 말을 되뇌며 돌아갔다.

르니예는 대문까지 그를 배웅하고 얼른 방으로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조각상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르니예는 그대로 뛰어 들어갔다.

“벨데메르, 괜찮아요?”

“주인님, 어떠십니까?”

조각상에서 나온 벨데메르는 잠시 숨을 고르고, 팔뚝을 들어 바라보았다. 남은 소원의 개수가 쓰여 있던 곳은 아주 말끔해졌다.

“마법을 써 보십시오, 주인님.”

“그럴까.”

벨데메르는 핏줄을 타고 흐르는 마력을 온전히 느꼈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자 저주인 그의 능력.

그의 가장 유용한 무기였으나, 그를 찌른 칼이기도 했던 그 힘.

그리고 셀 수 없는 수많은 밤이 지나, 이제야 어떻게 써야 할지 알게 된 능력이었다.

“마법을, 쓴 거예요?”

주변에 아무 변화가 없자 르니예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리 와.”

벨데메르는 르니예에게 손을 뻗었다. 르니예가 그의 손을 잡자, 그는 르니예를 끌어서 창가로 데려갔다.

“와.”

커튼이 걷히는 순간 르니예는 탄성을 질렀다.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 느껴지는 쌀쌀한 공기 속에, 새빨간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마치 이 공간만 다른 계절인 것처럼.

“예뻐요.”

창문을 살짝 열자 차가운 바람 사이로 꽃향기가 스며들었다.

르니예는 황홀한 얼굴로 벨데메르를 올려다보았다.

“…….”

“……?”

그렇게 마주친 눈, 그는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키스를 해 줬던 것 같은데, 그새 마음이 식었나?”

“아……!”

르니예는 순간 휘몰아치는 감정에 못 이겨 벨데메르에게 입을 맞췄던 순간을 떠올리곤, 얼굴을 붉혔다.

“아니면 그대는 아직도 의심하는 건가, 내 마음이 소원 때문이라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허리를 끌어당겨 제 품에 가뒀다.

“이번엔 내가 그대에게 확신을 줄 차례인가 보군.”

“벨데메르…….”

“다른 사람이 날 만지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지? 하지만 그대는 마음껏 만져도 좋아.”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손을 가져다가 자신의 나신 위에 올리,

“이미 마음껏 만지고 계셨습니다.”

올리지 못했다. 그들은 샤피로를 잠시 잊고 있었다. 하지만 순순히 잊힐 샤피로가 아니었다.

“조각상을 어찌나 하루 종일 쓰다듬으시는지 복근이 닳아서 희미해졌습니다.”

만지긴 했지만 닳지는 않았거든? 르니예는 샤피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샤피로는 그 정도 눈치에 기죽을 사역마가 아니었다.

“진짜 복근은 만져도 닳지 않을 테니, 좋으시겠군요, 르니예 님.”

그는 뻔뻔하게도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담요를 치우지 않길 잘했습니다. 아니면 아예 침실을 이리 옮길까요?”

침실을 옮길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직접 침실로 올라가면 되었으니까.

당장이라도 방 안에서 일을 치를 것 같던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번쩍 안아 들고 침실로 이동했다.

그는 저번처럼 한 번으로 끝낼 마음이 전혀 없었고, 가능하다면 낮이고 밤이고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르니예와 할 일이 많았다.

“식을 올리고 나면, 신혼여행은, 어디가 좋겠어?”

남들이 하는 건 다 해 보고 싶었다. 늘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

“신혼집은, 그대 상단과 가까운 곳이 좋겠지?”

그런데 그걸 르니예랑 하고 싶어졌다. 같이 잠들고, 손잡고 나란히 걷고, 얼굴을 마주하며 늙어가는 것.

다 해 보고 싶었다.

“왜, 대답이, 없어?”

“흣…….”

르니예는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때렸다. 그나마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주르륵 미끄러졌다.

상의하고 싶은 게 있다더니, 앞으로 인생 계획을 상의하자는 거였나?

하지만, 하지만,

“아흐…….”

몸을 겹치고 있는 상황에서 상의가 되겠냐고요!

숨 쉬고 신음하기도 모자라 르니예는 불평도 어려웠다.

적어도 대답을 원하면, 속도라도 늦춰 줘야 하지 않나?

대답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벌이라도 주듯이 그는 르니예를 더 끝까지 몰아세웠다.

“벨데메르, 으응, 제발…….”

르니예는 애원했다.

“제발? 제발 더 세게 해 달란 뜻인가?”

애원은, 안타깝게도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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