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해답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은 어디에 있지?”
“네? 그게 무슨…….”
르니예는 일단 모른 척을 해 보았다.
“몸져누운 아버지라도 살리고 싶다면, 거짓말은 자제하도록 해.”
긴장한 채 눈치를 보고 있는 르니예를 놓아주고서 레브론은 뒤를 돌았다.
“어쩜 아버지와 딸의 대답이 이리 똑같을 수가 있나.”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콜론에게 칼을 겨누며 물었을 때도 같은 대답을 들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이라니, 그런 건 처음 들어 봅니다, 나리.’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불대는 거짓말에 레브론은 르니예를 데려오라 시켰다. 제 목숨은 아깝지 않아도 제 딸 목숨은 아깝겠지.
아직 살날이 창창하지 않은가.
역시 딸을 데려오자 콜론의 눈동자는 동요로 파르르 떨렸다.
“자, 누가 대답할 거지?”
레브론은 나란히 목에 칼이 겨눠진 아버지와 딸을 보며 물었다.
“소원에 욕심이 나 그러는 거라면, 내가 소원을 이룬 후에 그대들 소원을 들어주지.”
왕이 되면 못 해 줄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대들 소원은 뭐지? 돈은 이미 많으니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겠고, 귀족이 되는 것?”
돈 많은 평민의 소원이야 뻔하지 않은가. 레브론은 저 혼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왕이 되면 귀족 작위를 얼마든지 내려 주지. 아, 아니지.”
르니예는 레브론이 제 쪽으로 더 다가오자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그런 르니예를 아래위로 훑었다.
“내 너를 비로 맞이하마.”
“……예?”
“내가 왕이 되면 너는 왕비가 되는 것이야.”
아주 뜻밖의 제안에, 르니예는 할 말을 잃었다. 목에 칼을 겨누고 하는 청혼이라, 아주 신선한걸.
“구미가 당기는 얼굴이구나.”
아니다, 그냥 황당했을 뿐이다. 르니예가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콜론이 순서를 채갔다.
“크흠, 르니예, 조각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드려라.”
“아, 아버지!”
왕비에 넘어갔네, 왕비에 넘어갔어. 르니예는 콜론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너 어차피 남자를 내려 달라고 소원 빈 거 아니냐.”
“그래서 받았잖아!”
“또 받는다고 생각해.”
르니예는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두려움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아니,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랑 대뜸 결혼해? 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잘생겼으면 된 거 아니냐?”
르니예는 레브론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래, 왕자는 왕자인지라 때깔이 좀 남들과 달랐다.
하지만 벨데메르보다는 훨씬 못하다고. 물론 그가 벨데메르보다 잘생겼다고 해서, 벨데메르를 버리고 홀랑 넘어간단 말은 아니었다.
“그럼 됐군.”
레브론은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르니예에게 손을 내밀었다. 보석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손을 청하는 그런 손짓이었다.
“그럼 보석이 어디 있는지 안내를 부탁하오, 비.”
비는 무슨! 르니예는 곤란해 눈을 깜빡였다.
“상단 안에 없어요. 다른 데에 숨겨 놨어요.”
왕비라는 말에 홀랑 넘어간 콜론 때문에 모르쇠는 글렀고, 르니예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 방 밖으로 나가면서 인원을 분산시킬 수 있다면, 꿀벌로도 승산이 있다.
“그럼 가져와. 난 여기서 기다리지. 하지만 늦을 때마다 네 아비의 손가락이 하나씩 잘려 나갈 거다.”
“……저랑 같이 안 가시고요?”
“굳이 그래야 하나? 데이트할 시간은 내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충분해.”
얕은수는 먹히지도 않았다. 르니예는 심히 곤란해졌다.
“……어?”
궁지에 몰린 순간, 르니예는 맞은편에 보이는 창문으로 아주 익숙한 파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샤피로?”
“저건 웬 놈이지?”
르니예가 샤피로를 발견한 것과 동시에, 레브론과 수하들 역시 샤피로를 발견했다.
샤피로도 딱히 기척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저, 저 사람은……!”
콜론도 샤피로를 발견했다. 콜론은 단번에 샤피로를 알아보았다.
“계속 이 근처에 있었던 건가.”
얼른 소원을 빌라고 재촉하려고 나타난 줄 알았는데, 르니예가 소원을 빌고 난 후에도 여전히 이 근처에 있었던 건가.
“문을 좀 열어 주시겠습니까?”
샤피로는 창가에 서서 예의 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르니예와 콜론에게 겨눠진 칼날은 그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목소리는 평온했다.
“문을 열어 주어라.”
레브론 역시 샤피로를 알아보았다. 본 적은 없지만, 노르딕 백작이 설명한 그대로였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 보석을 가져다주었다는 그 남자.
창밖에 서 있는 저 금발 머리가 바로 그 남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왕자 저하.”
문이 열리자 샤피로는 너무나도 능숙하게 예를 갖췄다.
“아, 오랜만입니다.”
그러고는 침대에 누워 있는 콜론에게도 인사를 잊지 않았다.
“르니예 님, 주인님께서는 오지 못하셨으니 그만 흘긋거리십시오.”
“너 혼자 왔어?”
“혼자 왔지만, 아주 혼자는 아닙니다.”
샤피로는 품속에서 핏방울처럼 붉은 보석을 꺼냈다.
“거래를 제안합니다, 저하.”
레브론은 샤피로를 따라 광장을 가로질렀다. 그의 주머니에는 블러디 사파이어가, 한 손에는 르니예의 팔뚝이 잡혀 있었다.
샤피로는 르니예의 목숨과 소원을 바꾸자 제안했다.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까지 저와 함께 가는 대신, 보석은 미리 내주었다.
“숲 속 버려진 신전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랬는데 어떤 분께서 이상한 소원을 비시는 바람에,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르니예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상한 소원은 맞지만, 결혼선물이라고 조각상을 광장에 가져다 놓는 기행은 자기가 벌인 거면서.
“네가 이상한 소원을 빌었나 보지?”
“예.”
“무슨 소원을 빌었나?”
이제 와 소원을 숨길 것 있나. 르니예는 그의 억센 손아귀에 이끌려 걸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제 남편이 되어 달라고요.”
“조각상한테?”
“예.”
레브론과 그 이야기를 같이 듣던 그의 수하들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독특한 취향을 가졌군.”
돌려 말했지만, 변태란 뜻이었다.
“여깁니다, 저하.”
샤피로가 대문을 열었다. 레브론은 그를 따라 집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소원은 한 번만 빌 수 있습니다. 중간에 바꿀 수 없으며, 명료하고 간결하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명료하고 간결하게? 그런 조항은 없었는데? 샤피로는 규칙을 다르게 말해 주고 있었다.
“소원은 정하셨습니까?”
샤피로는 조각상이 있는 방문 앞에 섰다.
“그렇다.”
“부디 규칙을 잊지 마시기를.”
문이 열렸고, 레브론은 석양을 등진 조각상을 보고 순간 르니예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조각상이라면, 소유하고 싶을 법하군.
레브론은 감탄하며 사파이어를 조각상의 입술에 올렸다.
단단하던 보석이 액체처럼 스며드는 것을 보며 레브론은 환희에 몸을 떨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제 소원은,”
그의 소원은 능력이라고는 쥐뿔도 없으면서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왕위에 오른 형님을 없애고, 그 자리를 차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길었다.
“왕이 되는 겁니다.”
간결하고 명료하게, 그는 소원을 빌었다. 형님을 없애는 건, 왕위에 오른 다음에 제 손으로 하면 그만이었다.
“남쪽으로 가라. 가면 배 한 척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너를 왕위로 인도하리라.”
남쪽이라. 펠레포네 영지 남쪽은 항구였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남쪽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도였다.
“지금 당장 남쪽으로 간다.”
망설일 시간도, 필요도 없었다.
“아, 네게는 곧 사람을 보내지. 왕비가 될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그는 터지는 기쁨에 피식거리며 르니예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제 수하들을 데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으.”
르니예는 잠시 몸서리치다가, 조각상이 깨지는 소리에 방으로 쏜살같이 뛰었다.
“벨데메르!”
르니예는 그대로 벨데메르를 향해 뛰어들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참았던 그리움이 울컥 쏟아졌다.
“다친 데는 없나?”
“없어요.”
그는 르니예를 그대로 품속에 끌어안았다. 막상 얼굴을 보니, 르니예가 연기를 했든 아니든 다 상관없을 것 같았다.
서운함에 진 응어리가 봄볕에 놓인 얼음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런데 2왕자를 정말 왕으로 만들어 준 거예요?”
“소원은 이뤄 줘야 하니까 왕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게 비록 이 왕국을 다스릴 왕은 아니지만.”
벨데메르는 꿀벌을 통해서 레브론의 소원을 듣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2왕자가 ‘왕이 되게 해 주세요.’라는 애매한 소원을 빌도록 유도했다.
“작은 부족이 사는 섬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왕 노릇 하며 살게 되겠지.”
그 부족은 비가 오지 않거나, 고기가 잡히지 않으면 왕을 제물로 바치는 전통이 있었지만, 그건 벨데메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어디 작은 공국의 왕이라도 시켜 주려고 했지만, 그 녀석이 아주 헛소리를 지껄이더군.”
르니예를 비로 맞이하겠네! 어쩌네 하는 말만 안 했어도, 섬으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뱉은 말을 되돌릴 수 없는 법. 벨데메르는 이미 기분이 팍 상해 버렸다.
“혹시 그 녀석에게 흔들린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내가 그랬잖아요. 벨데메르가 내 마지막 남자가 될 거라고. 그거 진심이었어요.”
“증명이 필요해. 그대 또한 증명이 필요하겠지. 내 마음이 소원 때문인지 아닌지.”
르니예의 걱정을 벨데메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게 얼마나 쓸모없는 걱정이었는지 알려 주려고 한다.
“신을 만났다.”
“네?”
“만난 김에 그대의 소원을 이뤄 줄 방법을 물었지.”
신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이런 것까지 알려 주어야 하느냐는 티를 팍팍 냈다.
‘내가 널 아이라고 부른다 해서, 네가 진짜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으냐.’
이래도 벨데메르가 알아듣지 못하자, 신은 혀를 쯧쯧 차기에 이르렀다.
‘혼인을 하였으면 마땅히 초야를 보내야 진정한 부부가 되는 것인데, 네놈은 숙맥인지 뭔지 입술만 비벼대고 있더구나. 그런 것을 보고 항간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
‘……뭐라고 합니까?’
‘남편 노릇 못 한다고, 하지.’
그러니까 벨데메르는 지금까지 남편 노릇을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렇지.”
벨데메르의 이야기를 들은 르니예는 무릎을 쳤다. 하긴, 따지고 보면 같이 잠을 잘 때도 정말 나란히 누워서 잠만 잤었다.
벨데메르라서, 특수한 경우라서, 그게 이상하단 생각을 르니예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
“초야를 치러야겠지.”
르니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큼큼 헛기침을 하는 벨데메르의 귓가도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샤피로는 사역마이기 때문에, 그딴 건 관심 없었다.
“그럼 옷 벗으신 김에, 지금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