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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15화 (115/120)

115화. 봉인의 이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벨데메르는 익숙한 인영을 보고 다가갔다.

“아니면 여기에 늘 계셨습니까.”

눈을 꼭 감고 기도를 하고 있던 어린아이가 씩 웃으며 눈을 떴다.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걸렸구나.”

어린아이의 얼굴에 저와 똑같은 목소리. 두 번째 보는 것이지만 역시나 소름이 끼쳤다.

신전 천장에 그려진 벽화처럼, 광채를 내뿜으며 지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려올 수는 없는 것인가.

꼭 이리 소름 끼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인지, 새삼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기다리는 게 지루하셔서 친히 단서를 내리셨습니까?”

그 남자를 벨데메르에게 보냈다. 벨데메르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도록.

“그래서 답은 찾았느냐?”

“제가 마력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니, 가둬 버리신 겁니다. 폭주했다면 그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을 테니.”

벨데메르의 마력은 양날의 검이었다. 잘 다스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단이었으나, 통제를 잃는 순간 그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를 해할 무기가 되었다.

“정답이다.”

벨데메르는 하나의 재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 일로 수많은 생명이 스러지고, 네 성 주변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었다. 마법이 금지되고 마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게 갓난아이라 할지라도 모두 죽임을 당했지.”

당했다? ‘당할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당했다’라니.

“그런 일이 이미 일어났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일어나지 않은 일일 수도 있고.”

모호한 답변에 벨데메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직도 내 특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냐? 생각보다 아둔하구나, 아이야.”

벨데메르는 그제야 르니예 역시 시간을 되돌아왔단 사실을 떠올렸다. 신은 또다시 시간을 돌렸던 것이다.

“시간을 돌리는 것이 특기가 아니라 취미처럼 보입니다. 르니예는 왜 다시 살리신 겁니까?”

“그 아이도, 에드윈도 아직 때가 아니었다. 그 아이들은 할 일이 있거든.”

“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르니예와 에드윈은 해야 할 일이 있어 살렸다. 그렇다면 저는 왜 살린 걸까?

봉인을 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죽여 버렸으면 편할 일이 아닌가.

“어째서 죽이지 않고 봉인을 시키신 겁니까?”

“그랬다면 쉬웠겠지만, 재미가 없지 않으냐.”

“순전히 재미 때문에 저를 봉인했단 말씀이십니까?”

벨데메르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조각상에 갇혔던 그 수많은 날이 오로지 그의 재미를 위해서였다니.

“네가 이리 반응하니 재미가 있어 자꾸 놀리고 싶구나.”

“…….”

신이 아니었다면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

“죽음은 내 권한이 아니다. 내가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미안하군. 하지만 나 또한 큰 뜻 위에 올려진 말일 뿐이니, 너무 억울해할 것은 없다.”

벨데메르의 눈동자에 이글거리던 이채가 걷혔다. 제 목소리와 대화하는 것도 썩 유쾌하지 않을뿐더러, 전능하다 믿었던 이조차 그렇지 않다니 김이 빠졌다.

“그럼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 드리죠. 샤피로는 왜 살리신 겁니까?”

“그건 내가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다. 내 뜻을 나보다 더 잘 헤아리는 이가 있었을 뿐.”

신관 헤스티아는 제가 모시는 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들은 가끔 신 자신보다 더 그 뜻을 잘 풀어내는 경우가 있었다.

“신기한 일이지. 나도 여전히 신기해.”

“그렇다면 그 남자는 왜 보내신 겁니까? 이번에는 그 점술가가 당신의 뜻을 잘 헤아린 겁니까?”

“아니, 이번엔 내가 보냈다. 네가 너무 헤매는 것 같아서 말이야.”

헤맨 것은 사실이니 그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왜 보냈느냐’에 대한 대답은 되지 않았다.

“제가 벌은 받을 만큼 받은 모양입니다. 단서를 보내 주시는 것을 보니.”

“아둔하구나, 아이야. 그게 어디 벌이더냐? 네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지. 네가 기른 힘이니, 그것을 다스리는 것도 너의 일이지.”

벨데메르는 짧게 탄식했다. 해서 살려둔 것이로군.

주술에 실패했을 때, 벨데메르는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날뛰는 힘과 함께 벨데메르는 조각상에 봉인되었다.

조각상 속에서 그는 본능적으로 제힘을 조절하고, 통제하며, 다스리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깨어 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고,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조각상 안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몸 상태가 호전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원은 뭡니까? 그것 또한 제힘을 다스리기 위한 장치입니까?”

“아니, 그건 벌.”

벨데메르의 얼굴이 구겨지자 신은 소리 내어 웃었다. 아이의 얼굴로, 제 목소리를 해서 경박스럽게 깔깔 웃는 모습이 좋진 않았다.

벨데메르는 애를 써서 욕지거리를 뱉지 않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금지를 어긴 대가를 죽음으로 치렀다. 한데 너는 이리 살아 있지 않으냐. 그러니 대가를 치러야지.”

순진무구한 아이의 얼굴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벨데메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제 정말 궁금한 것을 묻거라.”

“지금까지 한 질문도 정말 궁금한 것이었습니다.”

“내게 거짓말을 하는구나.”

벨데메르는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전지전능하지는 않아도 신은 신이라는 건가.

“르니예가 회귀한 것을 알고서 네가 가장 많이 한 말이 무엇인지 내가 직접 말해 주어야 하느냐.”

그딴 건 사절이었다. 그는 신을 원망하고, 제 처지에 분노했다. 르니예 생각을 하다가 틈이 나면 간간이.

그는 거의 많은 시간을 ‘르니예가 나를 진짜로 좋아했는가, 아닌가.’ 혹은 ‘소원 때문에 억지로 내게 입을 맞춘 건가.’ 따위를 생각하며 보냈다.

“해 주지.”

“됐습니다.”

벨데메르는 빠르고 단호하게 대답했고, 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르니예의 감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게 궁금하겠지.”

됐다고 했지만, 벨데메르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건 직접 물어보렴. 내 너를 그리 겁 많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겁쟁이가 된 것이냐?”

신은 혀를 찼고 벨데메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대화는 영양가가 전혀 없었다.

“가기 전에, 한 가지 더. 네가 소원을 이루도록 도운 건, 르니예에게 주는 상이다. 만나면 말해 주거라.”

“르니예가 신전에 기부를 많이 했다던데, 그것에 대한 상입니까?”

“아니, 자신의 다짐을 잘 지킨 것에 대한 상. 난 그 애에게 착한 일을 하라 시킨 적이 없는데, 알아서 하더구나.”

“그야 당신의 존재를 알아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럼 너는 어떠냐. 내 존재를 아주 예전부터 알았지만.”

신은 말을 다 하는 대신 벨데메르를 아래위로 훑었다. 뭐, 그렇다면 할 말은 없었다.

벨데메르는 그의 존재를 뛰어넘고 싶었지, 그의 비위를 맞출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지금도 그랬다. 벨데메르는 인사도 없이 신전을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벨데메르, 내 아이야.”

그의 등 뒤로 신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르니예의 소원을 이뤄 줄 방법을 듣고 가야지.”

그래, 그건 확실히 벨데메르의 흥미를 끌었다.

“방법이 뭡니까?”

벨데메르는 돌아섰다.

“그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해 넌 밖으로 나왔지. 조각상인 채로는 그 소원을 이뤄 줄 수 없으니.”

“그건 저도 압니다. 그래서 대체 방법이 뭡니까?”

신은 살짝 한숨을 쉬는 것도 같았다.

“내가 널 아이라고 부른다 해서, 네가 진짜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으냐?”

꿀벌은 가장 먼저 르니예를 찾았다. 그러나 벨데메르의 얼굴을 보러 간 르니예는 방 안에 없었다.

꿀벌은 방향을 틀어 에니를 찾아갔다.

“내가 지금 놀아 줄 시간이 없어. 혼자 좀 놀아.”

놀아 달라는 게 아니라고!

꿀벌은 답답했다. 사안이 시급한데, 이 인간은 눈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르니예가 상단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왜 이렇게 일찍 오세요?”

“벨데메르가 집에 없더라구.”

허탕을 친 르니예는 터덜터덜 들어와 앉았다. 꿀벌은 이번엔 르니예 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적어도 르니예는 제 뜻을 알아주리라. 같이 붙어 다닌 시간이 있으니 분명,

“지금 놀아줄 기분이 아니야. 정원에 가서 놀고 있어.”

……그냥 쏴 버릴까?

꿀벌은 답답했다.

“그건 뭐예요?”

“펙한테 온 편지. 샤피로도 없는지 편지가 그냥 대문 아래 놓여 있더라고. 2왕자가 궁에서 탈출했대.”

그래, 그리고 그놈이 지금 네 상단이 있다니까?

답답함에 날갯짓할 기분도 나지 않은 꿀벌은 의자 등받이에 내려앉았다.

이러다가 곧 그놈들이 이 방까지 쳐들어,

“당신이 르니예인가?”

왔네, 왔어. 쳐들어왔어.

꿀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 누구세요?”

문을 박차고 들어온 남자의 손에 들린 검을 보고 르니예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섰다.

“당신 이름이 르니예냐고 물었는데.”

“맞아요, 내가 르니예예요.”

“그래? 그렇담 잠깐 나랑 같이 가 줘야겠어.”

남자는 칼을 든 것치고 교양 있는 몸짓으로 문을 잡으며 손짓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한 명이라면 꿀벌로 처치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창문을 통해 도망치면 된다.

“당신 아버지를 살리고 싶으면 그래야겠지.”

“아버지?”

꿀벌은 여기서 매우 답답해졌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왜, 어째서 주인님은 내게 입을 주지 않으셨을까.

“아버지!”

남자를 따라 콜론의 방에 간 르니예는, 목에 칼이 겨눠진 채 누워 있는 콜론을 보고 당장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 앞을 한 사내가 막아섰다.

“저하께 예를 갖추시오.”

“저하? 2왕자 저하?”

예를 갖춰야 하는 건지 뭔지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아쉬운 쪽은 르니예였다. 르니예는 인사를 하면서 인원수를 눈으로 훑었다.

꿀벌이 현재 가진 독으로 중독시킬 수 있는 숫자를 넘었다. 하긴 다 중독시킬 수 있다고 해도, 꿀벌이 한 명 한 명 다 쏘기 전에 콜론과 르니예의 목이 날아갈 것이다.

“한때 귀부인으로 살았다더니, 예의를 갖출 줄 아는군. 말도 쉽게 통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레브론은 손가락 끝으로 르니예의 턱을 들어 올려, 저를 똑바로 보게 했다.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은 어디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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