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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02화 (102/120)

102화. 끝

“이야.”

손가락 걸고 약속한 게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벨데메르는 벌써 르니예의 약속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찰리, 와.”

르니예는 찰리의 얼굴을 보며 연신 감탄을 했다.

잘생겨질 줄은 알았지만 이건 완전히 다시 태어난 급이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목소리도 멋있어진 거 같은데?”

“그런가요?”

자신감 없던 찰리는 이제 없었다. 그는 벨데메르와 샤피로 앞에서도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냈다.

“소원을 후회한다고 해도 이젠 되돌릴 수 없다.”

“되돌리다뇨.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찰리의 행복 지수는 지금 천장을 뚫고 치솟는 중이었다.

“전 새 인생을 살 겁니다. 모쪼록 건강히 지내십시오.”

찰리는 자기 소원을 들어준 벨데메르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르니예와 샤피로에게도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얼굴이 인성을 만드는 건가?”

나가는 찰리를 배웅하며 무심코 중얼거리던 르니예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선 샤피로를 쳐다보았다.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은데.”

“왜 저를 보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죠? 저는 사역마라 인성이 없습니다만.”

저거, 자신이 사역마라는 걸 아주 적재적소에 써먹잖아?

그러나 맞는 말이었기에 르니예는 할 말이 없었다.

“인성을 가진 분들은 참으로 별짓을 다 하십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저기 보십시오.”

르니예는 샤피로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쳐다보았다.

“쟤 바딜 아니야?”

“보아하니 바딜 님이 맞는 것 같군요. 에드윈 님이라고 하기에, 셔츠부터 매우 하인스럽습니다.”

“그런데 쟤 얼굴이 왜 저래?”

바딜은, 그러니까 여전히 에드윈의 얼굴을 한 채로, 왼쪽 볼에 커다란 거즈를 붙이고 벨데메르의 집으로 걸어왔다.

“바딜, 너 얼굴이 왜 그래? 누구랑 싸웠어?”

거즈 위로 비치는 붉은 피에 르니예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닙니다. 도련님과 얼굴로 헷갈릴 일이 혹여나 생길까 봐 미리 방지한 겁니다.”

바딜은 프리야만 안전하다면 에드윈으로 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프리야가 안전한 것을 확인했으니, 에드윈의 얼굴은 이제 필요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상처를 냈다.

이러면 에드윈과는 확실하게 구분될 테니까.

“너, 정말, 프리야한테 진심이구나.”

프리야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잊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니 곧 바딜은 프리야를 잊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남는 것은 에드윈의 꽤, 아니 많이 괜찮은 겉껍데기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버리겠다니.

“어휴, 들어가 봐.”

르니예는 입구에서 길을 비켜 줬다. 바딜은 그런 르니예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들어가려다가 멈췄다.

“작은 마님.”

“왜?”

“도련님과는 이대로 끝내실 겁니까?”

바딜은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마지막 인사, 안 하실 건지 궁금해서요. 저는 먼저 하고 왔습니다.”

“에드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어?”

“이분이 알려 주시던데요.”

이분이라 함은, 샤피로를 말했다. 샤피로는 스텐을 보러 갔다가 에드윈을 발견했고, 그걸 바딜에게 말해 주었다.

바딜이 비참해진 에드윈을 보고 싶어 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하지만 막상 에드윈을 보고 온 바딜은 착잡할 뿐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긴 해야겠지.”

끝. 끝을 내고 싶었다. 에드윈 모습을 한 바딜이 아니라, 진짜 에드윈과.

“에드윈이 있는 데가 어디야?”

“난 밖에서 기다리지.”

“고마워요, 벨데메르.”

에드윈과 인사를 하러 가고 싶다는 르니예를 벨데메르가 기꺼이 따라왔다.

속으로는 에드윈이 해코지할지 모른다는 염려를 하면서, 겉으로는 가는 길이 위험하다는 핑계를 댔다.

그는 에드윈이 지내는 낡은 방의 문을 열어 주었고, 르니예는 덕분에 편한 마음으로 에드윈을 만나러 들어갔다.

“……누군가 했더니, 부인이셨습니까.”

누워 있던 에드윈은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났다.

“방문이 잠겨 있지 않아서 그냥 들어왔어요.”

노크를 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문을 열어 보았더니, 잠겨 있지 않았다.

“굳이 잠가서 뭐 하겠습니까. 도둑이 든다고 해도 훔쳐 갈 것이 없는데.”

이미 얼굴까지 도둑맞은 그였다. 여기서 뭘 더 도둑맞을 수 있겠는가.

“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오신 겁니까?”

“그렇진 않았는데, 이렇게 살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바딜이 훨씬 더 에드윈 같았다. 수염도 깎지 않고, 옷은 며칠 동안 갈아입지 않은 듯 보이는 에드윈은 낯설었다.

“통쾌하시겠습니다.”

“별로요. 에드윈이 이렇게 사는 것을 보고 싶었다면 애초에 돈을 왜 줬겠어요.”

“그날, 나인 걸 어떻게 알아본 겁니까?”

에드윈은 처음에 바딜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얼굴을 훔쳤는지, 그게 궁금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에밀리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르니예가 어떻게 알아보았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바딜이랑 무슨 신호라도 정한 겁니까? 내가 봐도 바딜이 훨씬 나 같던데.”

“그런 거 없었어요. 신호 같은 거 없어도 내가 당신을 못 알아보겠어요? 당신은 시선을 돌릴 때 항상 눈을 깜박이잖아요.”

바딜은 에드윈을 아주 잘 따라 했다. 그러나 그도 몇 가지 놓친 게 있었다.

“말을 하기 전에 단어를 고르는 동안 주먹을 쥐었다 펴고, 걸을 땐 꼭 오른발을 먼저 디디려고 하고.”

아주 사소한 행동이 에드윈과 바딜을 구별하게 했다. 르니예의 말에 에드윈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는 놀랐다.

저도 모르는 사소한 버릇을 르니예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제야 르니예가 보여 줬던 애정을 다시금 떠올렸다.

가끔은 지겨웠고 또 가끔은 족쇄처럼 느껴지던 애정이, 이제는 조금 그리워지려고 했으니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면, 에드윈 본인이 웃기는 놈이거나.

“내가 3년간 짝사랑한 에드윈은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그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 소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안다.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는 걸.

“내일이 마지막으로 법정에 나가는 날이에요.”

“우리가 드디어 이혼하는군요. 법정엔 내가 아니라 바딜이 나가겠지만.”

“난 에드윈이 나와 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이랑 끝을 내고 싶어. 어지간하면, 좋은 끝으로요.”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었다는 듯, 에드윈은 내내 피하고 있던 고개를 돌려 르니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부인께 못된 짓을 많이 했는데, 내가 밉지도 않습니까?”

“밉지만 언제까지 미워할 수는 없으니까.”

르니예는 어깨를 으쓱했다. 에드윈을 보내 주면서, 그가 남긴 감정도 전부 보내 버릴 것이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뭔데요?”

“밤마다 상단은 왜 여기저기 다녔던 겁니까? 부단주의 비리를 캐려고?”

혼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르니예는 분명 창고에서 무엇을 꺼내 갔는데, 그건 부단주나 반란과 아무 관련이 없어 보였다.

“아, 그거 아버지 비상금이에요. 그걸로 체불한 임금이랑, 불법으로 받은 이자를 돌려주고 있어요.”

지금도 틈틈이 에니랑 둘이서 콜론이 착취한 걸 갚는 중이었다. 물론 콜론의 돈으로.

“부인께서는, 많이 변하셨군요.”

르니예는 변했다. 어쩌면 이번엔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르니예가 변한 만큼 저 또한 변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들은 같은 방향으로 갈 수가 없었다.

“참, 에밀리는 라포어 저택으로 돌아갔어요. 바딜이 데려다줬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에드윈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궁금해할 줄 알았는데, 별로 궁금하지 않았나? 르니예도 이제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나 갈게요. 내일 법원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에드윈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르니예는 그런 그를 두고 조용히 나왔다.

그런 르니예를 벨데메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르니예는 당연하다는 듯 저를 향해 뻗는 손을 잡았다.

“그럼 갈까.”

“가요, 이제.”

제 손을 단단히 붙잡는 손아귀에 요동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낡은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르니예는 괜찮아졌다. 그냥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계단을 다 내려오자, 이번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내일이 지나도 벨데메르와 괜찮을 수 있을까?

저와 벨데메르 사이에 소원이 사라져도, 여전히 손잡고 걸을 수 있는 사이일까?

* * *

“영주가 어떻게 알고 사람을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단주.”

“보나 마나지. 르니예가 찌른 게야.”

카밀은 상단을 나오자마자 저를 찾는 영주의 병사를 마주쳤다.

하지만 다행히 필립이 도우러 온 덕에 카밀은 안전하게 항구로 피신할 수 있었다.

“아무튼 고맙다, 필립.”

“저한테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저는 그냥 시킨 일을 한 것뿐인데요.”

“시킨 일?”

카밀이 불길함에 흠칫 뒤로 물러선 순간, 어둠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소, 당신을 빼내 오라고 내가 시켰지.”

“잠깐, 당신은…….”

카밀은 마코야데스의 흉터로 그를 알아보았다.

“그때 콜론 형님이 구해 왔던 자로군.”

카밀은 허허,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자가 왔다는 것은, 콜론이 저를 일부러 데려왔단 뜻이었다.

“언제부터 상단주한테 넘어갔지?”

카밀의 독기 어린 시선이 필립에게로 향했다.

“언제부터라뇨, 저는 처음부터 상단주께서 시키신 일만 했습니다.”

필립은 자긴 죄가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카밀에게서 멀어졌다. 그는 처음부터 콜론이 카밀 곁에 심어둔 사람이었다.

“형님이 지금.”

‘나를 신경 쓸 때가 아닌데,’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콜론은 저를 배신한 사람을 살려 두지 않는다.

카밀은 제 죽음을 예감했고, 그에게 르니예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자기 딸이 제 엄마를 죽인 살인자를 돕고 있다는 것을 늦게 알수록, 콜론은 괴로워할 것이다.

그가 많이 괴로워하면 할수록 카밀의 복수는 성공적일 테니.

“조용히 간다고 하면, 고통 없이 보내 주지.”

“흥, 내가 순순히 따라 줄 줄 알고?”

카밀은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그는 누가 막을 새도 없이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물에 빠지는 소리보다,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더 먼저 났다.

“이런, 잘 보고 뛰어내렸어야지.”

마코야데스는 혀를 찼다.

“어두울 때는 거기가 암초인지 바닷물인지 구분이 어려운데 말이야, 쯧.”

* * *

르니예는 이혼 증명 서류를 품에 안고 벨데메르의 집으로 향했다.

소원이 이뤄졌다면, 그는 집이 아니라 조각상으로 다시 봉인되었을 것이다.

만약 이뤄지지 않았다면, 그는 집에서 르니예를 기다리고 있겠지.

하지만 법원에서 에드윈과 르니예는 오늘부터 남남이라고 도장을 꽝 찍어 주었으니, 벨데메르가 집에 있을 리가 없었다.

있을 리가 없는데, 그래야 하는데,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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