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유령의 존재를 믿나요?
“유령을 믿어요?”
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르니예는
“에이, 그런 게 있겠어요?”
하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그건 르니예가 유령을 내심 무서워했기 때문에 나온 대답이었다.
유령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야 무섭지 않으니까.
“유, 유령이, 저, 저기에?”
르니예의 시선이 펙을 따라갔다. 물론 르니예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펙은 유령을 볼 수 있었고, 그런 그가 저 구석에서 유령을 발견했다는 거였다.
“왜, 왜 유령이 왜…….”
유령이 왜 이 방에 있느냐고 물었다. 유령은 사생활도 모르나? 한때 인간이었으면서, 적어도 사생활은 지켜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 말고도 비어 있는 방이 얼마나 많은데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벨데메르의 잠옷을 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두려워할 거 없어, 르니예.”
유령을 이렇게나 무서워하는 줄 몰랐는데?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꼭 끌어안았다.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유령과 한 공간에 있다는 자체가 무서운 거였다. 그나마 다행히 방이 환하고 벨데메르가 있어 기절까지 가지 않은 것이었다.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품에 거의 숨어서 눈만 빼꼼 내밀고 말했다.
“죄, 죄송한데 좀 나가 주시겠어요?”
유령에게 한 말이었다. 르니예는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유령도 사람이었으니까, 예의 바르게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큭.”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쓸데없이 정중한 말투에 벨데메르는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웃어요, 벨데메르?”
“그렇게 말해도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거다.”
그는 애써 웃음을 삼켰다. 유령을 무서워하는 것까지 귀여워서야.
“저건 이성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거든. 죽어서도 버리지 못한 지독한 미련이 영혼의 형태로 남은 것뿐이다.”
“그럼 전혀 대화가 안 통하겠네요?”
벨데메르가 고개를 끄덕였고, 르니예와 펙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그게 더 무서워.”
“그러니까 더 무서워.”
벨데메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미련 덩어리일 뿐인데, 더 무섭다고?
“왜지?”
“원래 말이 안 통하는 상대가 더 무서운 거예요. 협박도 회유도 설득도 안 통한다는 거 아냐.”
르니예가 울상을 지었다. 차라리 이성이 있으면 대화로 뭘 풀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건 뭐 그냥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건 줄 몰랐는데.”
펙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그런 펙을 보고 벨데메르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만 나가지. 우리도 자야 하니까.”
“……저 여기서 같이 자면,”
“되겠어?”
순간 벨데메르에게서 살기가 풍겼다. 펙은 울먹이며 문을 닫고 나왔다. 복도 끄트머리에서 스스스- 천끼리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펙은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샤피로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펙 님.”
샤피로는 턱 끝까지 넘어온 말을 삼켰다. 사역마에게도 사생활이 있다고.
“이 시간에 제 방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 나랑 같이 잘래?”
라인허트 가문 사람만 아니었다면, 어디 숲 속에 묶어두고 왔을 텐데.
샤피로는 이를 악물고 싱긋 웃었다. 연기가 날로 늘고 있었다.
“성인은 혼자 자는 겁니다.”
“내가 바닥에서 잘게.”
펙은 샤피로의 말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알아서 바닥에 누웠다.
샤피로는 한숨을 옅게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금 라인허트 가문의 대를 자기 손으로 끊을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펙 님.”
“응, 샤피로.”
펙은 그러면서 샤피로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눈을 꼭 감았지만 옆얼굴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샤피로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침대가 넓어 보이는데 나 그 끄트머리에서 자면,”
들으나 마나 개소리다. 샤피로는 단호하게 대응했다.
“안 됩니다.”
새벽녘, 펙은 간신히 잠들었다. 그는 딱딱한 바닥이 불편한 듯 뒤척였다.
“……으음.”
그는 무언가 갑갑한 기분에 깊게 잠들 수 없었다.
나른한 숨을 뱉어내던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까맣게 점멸되었던 시야가 돌아오는 그 찰나, 그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시꺼먼 형태. 그것은 허리를 길게 숙이고서 펙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으, 으아, 아.”
펙은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그의 동공은 더 커질 수 없이 커졌고, 펙을 쳐다보던 것은 점점 더 그에게 다가왔다.
그것이 거의 코끝에 닿을 무렵, 펙은 발버둥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아악!”
그의 비명은 옆에서 자던 샤피로를 깨우고, 텅 빈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헉!”
벨데메르의 다독임에 간신히 잠들었던 르니예는 웅웅 울리는 비명에 눈을 번쩍 떴다.
이 비명은 펙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또 유령이 나왔다는 소린데…….
르니예의 시선이 방 한구석으로 향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곳에 무언가 있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괜찮아, 르니예.”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이야. 르니예가 자다가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무서워할 줄 알았으면, 다른 방법을 썼을 것이다.
“유령이 나온다는 집에 데리고 왔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모르겠군.”
“그건, 유령이 진짜 있는 줄 몰랐으니까 그랬죠.”
유령을 그냥 무서운 이야기로 치부할 때와, 실재하는 것으로 마주하는 건 정말 천지 차이였다.
게다가 벨데메르를 처음 이 집으로 데리고 왔던 날은, 공포고 뭐고 느낄 겨를이 없었다.
“이래서는 나 없이 아무것도 못 하겠군.”
벨데메르는 자기 품으로 꼼지락꼼지락 파고드는 르니예를 꼭 끌어안았다. 그 품 안에서 르니예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벨데메르는 공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 등을 열심히 쓸었다. 그러나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진짜로 그가 없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 * *
“작은 마님, 여행이 별로 즐겁지 않으셨나 봐요.”
에니는 수척해져서 돌아온 르니예를 보고 걱정스레 말했다.
“아냐, 별일 없었어. 좀 피곤해서 그래. 상단은 별일 없었지?”
“네.”
“에드윈 빨래는 관찰해 봤어?”
클로에가 소원을 빌며 넌지시 했던 말이 마음에 남았다. 에드윈이 혼자서 옷을 사러 왔다고.
해서 르니예는 자기가 없는 동안, 에드윈이 그 옷을 빨래로 내놓는지 에니에게 지켜보라고 했다.
“네, 그런 옷은 안 나왔어요.”
“그랬구나.”
아직 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거나, 아니면 자기가 입으려고 산 옷이 아닌가?
“그런데요, 작은 마님. 작은 주인님이랑 바딜이랑 좀 싸운 것 같더라고요.”
“바딜이랑?”
“작은 주인님 방에서 언성이 높아진 걸 누가 들었던 모양이더라고요.”
바딜과 에드윈이 싸울 일이 있나. 싸울 관계도 안 되거니와, 바딜은 에드윈을 신처럼 모셨다.
그런 바딜이 에드윈과 언성을 높일 일이 뭐가 있었을까.
“아, 골치 아파, 진짜.”
르니예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에드윈과의 이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이혼 소리만 나와도 그냥 좋다고 상단을 뛰쳐나갈 줄 알았는데.
“에니, 오늘 밤에 아버지 비상금을 털 거야.”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일이었다. 콜론이 숨겨둔 비상금으로 부당하게 이자를 착취당한 사람들에게 갚아 줄 예정이었다.
실은 콜론이 르니예를 위해 미리 빼 둔 유산을 먼저 쓰려고 했지만, 그건 라인허트 저택을 사는 데 써 버렸다.
“저도 갈게요.”
“아니야, 너도 없으면 의심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몰라. 그리고 어차피 바로 벨데메르 집으로 갈 거야.”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게 좀 무섭긴 했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었다. 이미 변제 우선순위까지 전부 만들어 놓았다.
빚을 진 지 오래된 사람부터 한 명씩 갚아 줄 것이다.
“자루는 준비했지?”
“물론이죠, 무게 가볍고 튼튼하면서 많이 들어가는 걸로 딱 골라 놨습니다.”
“오늘 일찍 잘 테니, 별일 없으면 깨우지 말도록.”
“예, 도련님.”
바딜과 에드윈은 언뜻 예전처럼 돌아온 듯 보였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었다.
며칠 전, 에드윈은 바딜에게 르니예의 마차를 따라가라 지시했다. 바딜은 그 명령을 군말 없이 따랐다.
그러나 그는 얼마 따라가지도 못하고 금방 마차를 놓치고 말았다. 해서 에드윈은 프리야에게 르니예가 어디를 가는지 알아보라 지시했다.
‘네가 위험해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하는 거다, 프리야.’
‘걱정하지 마세요, 작은 주인님. 듣기만 한다니까요.’
그러나 프리야는 기어코 에니에게 캐물었고, 이불 빨래를 혼자 뒤집어썼다. 그걸 본 바딜은 에드윈에게 따지러 왔다.
바딜답지 않은 일이었다.
‘저한테도 알려 주지 않으시는 그 일이 대체 뭡니까? 뭔데 프리야를 곤란에 빠지게 하시는 겁니까?’
에드윈은 바딜의 눈에서 프리야를 향한 정념을 눈치채고 말았다. 감히 제가 품은 여인을 탐하는 것에 살짝 불쾌함이 차올랐다.
하나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며 넘어가려고 했다.
‘요즘 도련님은 도련님 같지 않으십니다. 그 일이 뭔지 저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나 바딜은 주제넘게 굴었다. 하여 에드윈은 잠깐 언성을 높였다. 기밀에 관련된 문제여서 예민했던 것도 있었다.
셰론 후작은 절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 신신당부했다. 그게 비록 수족같이 여기는 몸종이라도.
에드윈은 사안의 중차대함을 알았기에 바딜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은 것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바딜은 알아줄 줄 알았건만.
“설마.”
그런 에드윈의 머릿속으로 잡념 하나가 흘러들었다. 바딜이 그 일을 자꾸 캐묻는 이유가 따로 있다면, 혹시나 그가 배신을…….
에드윈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그 잡념은 금방 떨어져 나갔다. 르니예가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뒤를 밟으며 에드윈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야밤에 또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