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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64화 (64/120)

64화. 테메르의 일기

봉인된 후에도 샤피로에게 남아 있는 마력이 있을 거라 여겼다. 하여 그 마력으로 샤피로가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데 제가 봉인되던 순간 샤피로 역시 마력을 잃고 인형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누가 되살린 거지? 그 신관인가?”

벨데메르는 다시 일기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신관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이었다.

정치 공작에 휘말린 테메르가 가문을 지켜내느라 벨데메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문을 들었다. 그 인형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가 소원을 들어주고 다닌다는 소문이었다.

일단 그 남자를 추적할 용병을 고용했다.]

그러고는 새로운 일기장에 와서야 추적의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남자가 지낸다는 곳으로 향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내가 고쳐 주었던 인형이 분명했다. 나는 그에게 가서 벨데메르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유령인 것처럼 사라졌다.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헛것을 본 것인가?

만일 그 남자가 소원을 진짜 들어준다면 벨데메르를 한 번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을 텐데.]

그 후로 일기는 짧아졌다. 테메르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벨데메르를 찾기보다 예전 일을 추억하곤 했다.

[그 애는 항상 위험을 추구했다. 제 목숨을 가지고 내기를 거는 것 같았다.

그 호기로움이 벨데메르를 시간 속에 가둔 것일까.]

“시간 속에 가뒀다?”

벨데메르는 일기를 다시 앞으로 돌려보았다. 시간 속에 가뒀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한 사건은 없었다.

일기에 쓰지 않은 다른 일이 있었던 건가. 끝끝내 테메르는 벨데메르를 보지 못했다.

내일은 눈을 뜨지 못할 것 같다는 문장이 끝이었다. 그 후로 얼마나 살았는지 모르겠으나, 그는 두 번 다시 일기를 쓰지 못했다.

“테메르.”

유일하게 미안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테메르였다. 벨데메르는 진하게 밀려오는 그리움에 창밖을 오래 내다보았다.

갑자기 사라진 동생을 마음의 짐으로 안고 살면서도 그는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산 듯했다.

가문을 지켜냈고,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임종을 맞았으리라.

“으응.”

벨데메르는 불편한 듯 뒤척이는 르니예의 담요를 제대로 덮어 주었다.

어쩌다 보니 결혼은 했다만, 르니예와 함께하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어떻게 될까, 우리는.

* * *

펠레포네 영지에 와서 펙은 이틀을 더 앓았다. 유령이고 뭐고 본인이 유령이 될 판이었다.

올 때는 편안히 왔지만 르니예도 딱히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다 먹은 건가?”

“네.”

“겨우 그거 먹고 무슨 힘을 쓰지?”

벨데메르는 혀를 차며 직접 포크에 스테이크를 꽂아 르니예에게 내밀었다.

“자.”

“괜찮은데.”

“어서.”

르니예는 쑥스러워하며 입을 벌렸다. 벨데메르는 그 입에 음식을 넣느라 막상 저는 별로 먹지도 않았다.

“할머님이랑 할아버님이 사이가 좋으시네요.”

쓸쓸하게 스튜를 떠먹으며 펙이 중얼거렸다.

“샤피로, 나도 먹여 줄래?”

어느새 샤피로와 친해진 펙이 애잔한 눈빛으로 샤피로를 올려다보았고 샤피로는,

“거절합니다, 펙 님. 두 손이 다 부러지면 그때 먹여 드리죠.”

냉정한 사역마였다.

“할아버님, 그래서 제 눈은 언제 뜨이게 해 주실 겁니까?”

“당장 오늘도 가능하다.”

“네? 그런 거였어요? 그럼 당장 해 주십시오.”

펙이 흥분하여 일어섰다.

“손자야, 그 몸을 해서 괜찮겠니?”

“물론이죠. 이제 아주 다 나았습니다. 뼈도 곧 있으면 붙을 거고요.”

당장이라도 유령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펙은 안달이 났다.

르니예의 입 안으로 샐러드를 넣어 주며 벨데메르가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오늘 네 영안을 뜨게 해 주지.”

“대체 벨데메르는 무슨 생각인 거야?”

아직도 부른 배를 두드리면서 물었다. 벨데메르가 펙의 눈을 뜨게 해 준다는 건 소원을 들어준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펙의 소원을 들어줘 버리면 더더욱 정신을 못 차리지 않을까? 그토록 염원하던 일을 이뤘는데?

“글쎄요, 저한테도 말씀을 안 하셔서. 하지만 다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벨데메르는 샤피로에게 딱 한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반드시 유령을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게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절대 다른 소원은 못 빌게 하라고요.”

“그거야 쉽지. 겁을 잔뜩 주자고.”

그러나 겁을 줄 필요도 없었다. 펙은 유령을 볼 생각에 그저 들떠 있었다.

“할아버님이 여기 봉인되어 계시다니.”

그래도 벨데메르 조각상 앞에서는 잠깐이나마 심각했다.

“펙 님, 얼른 소원을 비십시오.”

“아, 그래. 그래야지.”

펙은 소원을 빌었다.

“유령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네 소원은 이뤄졌다.”

희열에 가득 차 펙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그리고 이내 조각상이 깨지며 벨데메르가 나오자 놀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할아버님이 전설인 이유가 있으시네요.”

펙은 벨데메르의 몸을 보고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째서 저 몸은 유전되지 않았을까.

“손자야.”

“네, 할머님.”

“뭐 하니, 이거 얼른 붙이지 않고.”

르니예가 떨어져 나온 조각을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그거, 도로 붙여야 돼요?”

“응. 그것도 최대한 빨리.”

“그래도 손이 하나 더 늘어서 금방 붙이겠습니다, 르니예 님.”

소원이 이뤄지고 가장 첫 번째로 펙이 한 일은, 남들 눈을 피해 조각을 도로 이어 붙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펙은 씻으러 들어갔다. 언제쯤 소원이 이루어질지 궁금했다.

샤피로 말로는 바로 이뤄지는 경우도 있지만, 종종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얼른 보였으면 좋겠다.”

그는 물에 젖은 머리칼을 툭툭 털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보이기만 한다면, 증명은 어렵지 않을 거야.”

계획이 있었다. 그동안 한 연구도 있었다. 펙은 수건을 목에 두르고 연구 노트를 들췄다.

그렇게 몇 페이지 넘겼을까, 펙은 버릇처럼 머리를 긁적이다가 수건을 떨어뜨렸다.

“아, 허리야.”

끙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서 일어서던 펙은 순간 멈칫했다.

“……어?”

펙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아무것도 없네.”

분명 뭘 본 것 같았는데.

펙은 입맛을 쩝 다시고,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멈췄다.

“으, 으아!”

펙은 소리를 지르며 뒷걸음질을 치다 나뒹굴었다. 시꺼멓고 옅게 빛나는 것. 그건 분명 누군가의 동공이었다.

“유, 유령인가?”

실체 없이 눈만 동동 떠다니는 것이 사람일 리 없겠지.

펙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내가 잘못 봤나?”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펙은 안심했다. 안심했다는 것이 우스워진 그 짧은 찰나, 펙은 제 발목을 움켜쥐는 끈적한 촉감에 뒤집히고야 말았다.

“아악, 악!”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근처에 빛이 흘러나오는 방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노크 따위는 없었다.

“할머님! 할아버님! 저, 저기에…….”

“그대는 너무 말랐어.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겠어.”

벨데메르는 르니예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나보고 너무 말랐다고 하는 사람은 벨데메르밖에 없다니까요.”

콜론이 잡혀갔을 때 살이 조금 빠지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는 착실하게 찌는 중이었다.

르니예의 먹을 것에 집착하는 벨데메르가 큰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내 눈보다 다른 사람들 눈이 더 정확하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좀 더 잘 챙겨 먹도록 해. 몸에 좋은 약이라도 지어 먹여야겠군. 저번에 보니 근처에 유명한 약재상이 있던데.”

그러면서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팔을 살짝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르니예는 못 이기는 척 그에게 끌려갔다. 막 씻고 나온 그에게서 좋은 향이 났다.

똑같은 비누로 씻는데 왜 벨데메르한테만 저런 좋은 향이 날까.

“나 쓴 거 진짜 못 먹는데.”

르니예가 투정을 부리며 벨데메르의 허벅지에 딱 엉덩이를 댄 찰나였다. 어디선가 비명이 들렸다.

“이거 라인허트 경 목소리 아니에요?”

“그래,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나 보군.”

벨데메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문으로 사색이 된 펙이 뛰어 들어왔다.

“유, 유령이 있어요.”

“그래, 그게 보고 싶다고 네가 소원까지 빈 것 아닌가.”

그건 그랬다. 펙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막상 보니까 조금 무서운데…….”

확장된 동공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방구석에서 멈췄다. 시꺼멓고 흐물거리는 형태의 무언가가 그곳에서 펙을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저기에도.”

그것들은 사람과 아주 달랐다. 펙이 상상했던 유령은 확실히 아니었다. 사람의 형체는 남아 있지 않고 그림자를 찢고 뭉친 것처럼 형체가 흐릿했다.

“저, 저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저만 쳐다보고 있어요.”

오랫동안 꿈꿨던 시간이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본능적으로 피어나는 두려움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저 지독하리만큼 선명한 시선이란. 이 방에 사람이 셋이나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펙만 바라보았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저와 그 둘뿐이라는 듯.

“본다는 것이란 그런 거지. 네가 상대방을 보면 상대방도 너를 본다.”

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모르고, 넙죽 소원을 비는 꼴이란. 하지만 정신을 차리게 하기에 이만큼 효율적인 방법도 없었다.

“내가 경고를 안 해 주었던가?”

“안 해 주셨습니다!”

“상관없지 않나? 유령을 두려워하면서 유령의 존재를 밝힐 수는 없으니.”

벨데메르의 입가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벌써 이리 두려워하니 살려 달라 비는 건 조만간이겠군.

그러나 벨데메르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저저저저, 저기에 유, 유, 유령이 있다는 말이에요?”

르니예도 유령을 무서워했다. 조금,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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