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제 남편이 죽어서도 저만 사랑하게 해 주세요
“제 남편이 죽어서도 저만 사랑하게 해 달라는 소원요.”
르니예는 제 귀를 의심했다.
“알아요, 이상한 소원이죠?”
제인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그게 제 소원이에요.”
“진짜로요? 누가 시킨 건 아니고요?”
“네?”
간혹 신이라든가 신이나, 신 말이다. 이게 신의 장난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그 빌어먹을 소원을 비는 사람이 또 나타날 수가 있는 거지?
“네, 누가 시킨 건 아니고 진짜 제 소원인데…….”
르니예는 아예 제인 쪽으로 몸을 틀고서 득달같이 물었다.
“혹시 정략결혼?”
“아니요, 정략결혼은 아니고요, 제가 좀 오래 혼자 좋아했어요.”
마크를 처음 본 날 제인은 사랑에 빠졌다. 귓가로 종소리가 땡땡 울리고 하늘이 장밋빛으로 물들지는 않았지만, 봄바람이 불어오듯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럼 연애 결혼이에요?”
“그렇다고 할 수 있긴 한데, 막 연애를 했다고 보기에도 좀 그래요.”
제인은 접시며, 그릇을 만들어 파는 도자기 공방 겸 상점에서 일을 했다. 마크는 도자기를 빚는 흙을 가져다주는 배달원이었다.
업무에 관련이 없는 말을 거는 데만 일 년이 걸렸다. 지나가다 만나면 인사하는 사이가 되는 데 또 일 년, 같이 저녁을 먹는 데 또 일 년이 걸렸다.
“주변에서 제 마음을 알고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정확히는 속 터져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팍팍 밀어준 덕분에 마크는 제인이 저를 좋아하는 줄 알게 되었다.
마침 결혼 적령기이기도 했고, 만나는 사람도 딱히 없었던 마크는 제인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같이 있으면 편안하다고 했어요. 전 그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마크의 심장을 떨리게 하는 사람이 나타났군요?”
제인이 애석하게 웃었다. 차마 울지 못해 웃는 마음을 르니예는 뼈저리게 알았다.
“그래서 그 여자랑 바람을 피웠어요?”
“아니요. 아직은 혼자 좋아하고 있대요. 결혼한 몸이니까 고백할 수 없다고요.”
마크는 정중하게 이별을 고했다. 제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면서 몇 번이고 사과했다.
그래, 에드윈보다는 낫네.
“원한다면 전 재산을 주고 가겠다더군요. 저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요. 그런데 왜 제 귀에는 그 말이, 전 재산을 포기하고서라도 그 여자와 살고 싶다는 뜻으로 들릴까요?”
눈물까지 머금으며 한 말이 제인의 마음을 후벼 팠다.
“혹시 결혼한 지 삼 년?”
“네, 어떻게 아셨어요?”
이럴 수가 있나.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나.
“보내 주려고 했어요.”
“그 결심 그대로 갑시다, 예?”
아니 왜 그런 결심을 하고 또 흔들려서 저딴 소원을 빌려고 한단 말인가.
“그게 잘 안 돼요. 마크 없이는 못 살 것 같단 말이에요.”
제인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또박또박 말했다.
“반드시 마크의 마음을 돌릴 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 * *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는 상황이야, 이게?”
르니예는 탁자를 쾅 내리쳤다.
“저기요.”
르니예는 허리에 팔을 올리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제가 신전에 가서 기도도 하고! 돈도 많이 내고! 착한 일도 하는데!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기부금이 부족하셨던 거예요? 그래요?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소원을 만나게 하실까.
답답해서 방에 있지 못하고 정원에 나와 그 자리를 빙글빙글 도는데, 뒤에서 낙엽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에니?”
“접니다, 부인.”
에드윈이었다. 지금 제일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르니예의 눈매가 금세 사나워졌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르니예의 얼굴, 정확히는 퉁퉁 부은 입술을 발견한 에드윈은 잠시 말을 잃었다.
“매운 음식이라도 드신 모양입니다.”
그 입술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 네. 요즘 누구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매운 음식이 당기네요.”
르니예의 말에 뼈가 있었다.
“아, 그 남자 때문입니까?”
에드윈이 이렇게 잘 비꼬는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에드윈 때문이죠. 결혼하고 삼 년 내내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더니, 이제는 이혼도 못 해 준다?”
에드윈은 내가 행복해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건가? 꼭 저에게 복수라도 하려고 상단에 들어온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살아 있는 시체로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관에 넣어서 땅에 묻은 기억만 아니면 한 대 때리기라도 하는 건데.
“부인을 위해서라고 말했을 텐데요.”
“그런 거라면 미리 말해 주면 좋겠는데요.”
“내가 지금 말해 줄 수 있는 건, 영주께서 추수절 파티에 우리를 초대하셨다는 겁니다.”
말문이 막힌 르니예가 입을 벌린 채 몇 초간 얼어 있다가 되물었다.
“우리를요?”
“예.”
펠레포네 영주는 추수절마다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르니예와 에드윈은 결혼한 첫해에 딱 한 번 초대받고 그 뒤로는 초대받지 못했다.
파티 비용은 매년 꼬박꼬박 대주고 있지만 말이다.
“아버지를 탈세로 잡아넣고 우리를 파티에 초대한다?”
“이상합니까?”
에드윈의 질문이 더 이상했다.
“이상해하면 안 돼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쉬세요, 부인. 어제 밤새 무리하신 것 같은데.”
끝까지 비꼬고 가는 에드윈의 말에 르니예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다가 짜릿한 통증에 눈썹을 찌푸렸다.
“프리야는 대체 뭐 하는 거야? 도둑질도 눈감아 줬는데 하는 일이 없어, 얘는.”
프리야도 놀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중이었다.
“프리야.”
“작은 주인님.”
프리야는 일부러 더 반가운 듯 싱긋 웃었다. 요즘 에드윈이 프리야를 찾는 일이 드물었다.
바딜에게 듣기로, 에드윈은 여전히 프리야를 상단에서 내보내려는 뜻을 철회하지 않았다.
“요즘 많이 바쁘세요? 얼굴 뵙기가 힘들어요.”
프리야는 울상을 지었다. 진심으로 짓는 울상이었다. 제가 안겨들면 좋다고 하던 때는 언제고 이제는 방해가 되니 상단에서 내보내겠다?
안 될 말이지.
“그래, 앞으로도 바쁠 것 같구나.”
이 말이 프리야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치였다. 에드윈은 프리야를 지키려는 것뿐이었다.
프리야가 상단에 묶여 있을 때는 프리야를 밖으로 내보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땐 오히려 곁에 두는 것이 프리야를 지키는 길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제 프리야는 자유의 몸이었다. 그녀는 상단을 나가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방해하지 않을게요. 저는 저 멀리서 쳐다보기만 할게요.”
가벼운 농담이 섞인 말에도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에드윈은 프리야가 싫다고 해도 이번에는 반드시 내보낼 셈이었다.
프리야가 상처받고 두 번 다시 저를 보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말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프리야.”
“근데 그거 들으셨어요?”
프리야는 에드윈이 말을 꺼낼 기회도 주지 않았다.
“작은 마님이요, 요즘 밤에 몰래 어디를 다니신다는데.”
“그 남자를 만나러 가는 거겠지.”
“아니에요, 거기가 아니래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프리야는 에드윈을 낚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어냈다. 거짓말이지만, 에드윈이 혹할 만한 말.
“그럼 어디지?”
“감자 깎으면서 들어서 정확히는 못 들었어요. 제가 한번 알아볼까요?”
금방 넘어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에드윈은 고개를 저었다.
“괜히 위험한 일에 나설 것 없다.”
“설거지할 때 옆에서 도우면서 듣기만 할게요. 이거 바딜은 못 알아 올걸요.”
바딜은 상단 안에서 친한 사용인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에드윈 시중만 들었으므로, 상단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귀만 열고 있으면 돼요.”
“……듣기만 하는 거야, 프리야.”
“물론이죠. 작은 주인님한테 도움이 된다니 기뻐요.”
프리야는 그 품을 파고들었다. 에드윈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 등을 살짝 끌어안았고, 프리야는 그 안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벨데메르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거의 비슷합니다, 주인님.”
“거의 비슷하다는 말은 똑같지는 않다는 뜻이군.”
“검 끝이 조금 낮습니다.”
샤피로의 조언에 따라 벨데메르는 검 끝을 약간 높여 잡았다.
“오랜만에 검을 잡으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
“주인님께서 기사였을 시절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직 샤피로가 함께하지 않을 때였다. 벨데메르는 다른 가문의 아이들처럼 마법서보다 검을 먼저 잡았다.
“그때는 기사가 될 줄로만 알았지.”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새로운 검술을 익히니 그때의 즐거움이 되살아나는 것 같군.”
벨데메르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기다란 검신이 그의 손안에서 뱀처럼 휘다가 허공을 갈랐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그의 검은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멈췄다.
“르니예가 왔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르니예가 뒷마당으로 얼굴을 쏙 들이밀었다.
“벨데메르,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새로운 검술을 익히는 중이다.”
벨데메르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넘기며 르니예를 향해 다가왔다. 샤피로가 그에게 찬물이 든 컵을 건넸다.
물을 들이켜는 벨데메르의 입술에서 타고 흐른 물방울이 그의 강인한 턱을 타고 흐르다가 뚝 떨어졌다.
금방이라도 컵을 부술 듯 손등에 툭툭 불거진 핏줄과, 잔뜩 성이 난 팔뚝을 따라 르니예의 시선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좋은 생각이 났어.”
르니예가 조용히 읊조렸다. 샤피로는 그 옆으로 다가가 귓가에 조용히 물었다.
“좋은 생각이 아니라, 야한 생각 아닙니까, 르니예 님?”
“아니거든! 너 나를 어? 뭐, 뭘로 보고?”
“아니면 아닌 거지, 말은 왜 더듬으십니까.”
너무 발끈했다. 이래서야 야한 생각을 했다고 인정하는 꼴이었다.
“르니예, 괜찮다.”
“아니, 아니에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르니예는 억울했다. 하지만 아니라고 하면 할수록 신뢰가 떨어졌으므로, 르니예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왜 검을 잡은 거예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더군.”
힘이 흘러넘쳤다. 넘치는 에너지를 연구에 쓰려고 했지만, 괜히 펜만 부러뜨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여 벨데메르는 넘치는 힘을 뺄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집 안에 가구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샤피로는 하루 종일 그가 고장 낸 물건을 고치러 다녀야 했겠지. 해서 샤피로는 벨데메르가 검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대 입술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고.”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입술을 쳐다보며 말했다. 르니예는 괜히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벨데메르는 그런 르니예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런 말을 여기서 하면 어떡해요.”
“여기서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샤피로가 듣잖아요, 벨데메르.”
샤피로는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떴다. 언제 저를 신경 썼다고 이러시는지. 사역마는 세사르가 그리웠다.
씻고 나온 벨데메르에게로 르니예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먼지는 씻겨 나가도 잘생김은 씻겨 나가질 않았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어지간하면 묻지 않으려고 했다. 르니예가 마음껏 보게 놔두려고 했다. 그 시선이 활활 타올라 그의 옆얼굴을 태우려고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니요, 오늘따라 멋있어 보여서요.”
무슨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벨데메르는 굳이 입 밖으로 감상을 꺼내지 않았다.
“무슨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십니까, 르니예 님.”
가만히 있어도 샤피로가 대신해 줄 테니까.
“주인님께서는 언제나 늘 잘생김의 수준을 개척하시는 분이신걸요.”
샤피로는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주인님께서는 찬양받아 마땅하십니다.”
두 손을 가운데로 꼭 모으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하는 샤피로에게 르니예의 시선이 옮겨갔다.
“르니예 님?”
그리고 그 시선은 샤피로에게 오래 머물렀다. 벨데메르를 보던 시선 그대로, 하지만 거기에 입맛을 더한 시선이었다.
샤피로는 늑대 앞 토끼처럼 떨었다.
“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오늘따라 더 멋있어 보여서.”
르니예의 대답에 벨데메르와 샤피로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생각했다. 샤피로는 벨데메르에 속해 있는 것, 그리고 벨데메르는 르니예에게 속해 있다.
엄밀히 따지면, 샤피로는 르니예와 벨데메르를 둘 다 주인으로 모셨다. 그 말인즉, 샤피로는 르니예의 명령을 들어야 한단 뜻이었다.
“주인님.”
만약 르니예가 샤피로를 가지고 싶어 한다면? 샤피로는 두려움에 질려 벨데메르를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마라, 샤피로.”
벨데메르는 르니예 옆에 있는 사내놈을 하나 더 늘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이 비록 사람이 아닌 사역마라도.
“뭘 걱정하지 말아요?”
“르니예, 그대가 원하는 건 뭐든 주겠지만 샤피로는 안 돼.”
“르니예 님, 차라리 하루에 대청소를 두 번 하라고 하시면 하겠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르니예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떴다.
“샤피로를 원하는 거 아닌가?”
“그건 맞아요.”
샤피로의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도자기 인형도 하얗게 질릴 수 있다는 것을, 르니예는 오늘 알았다.
“그럼 저, 르니예 님의 수청을 들어야 하는 겁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 수청을 왜 들어? 르니예는 잠시 그 말을 곱씹다가 인상을 팍 썼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런 거 아니에요, 벨데메르.”
지금 내가 샤피로를 탐한 줄 안 거야? 대체 벨데메르와 샤피로는 나를 어떤 인간으로 보고 있지?
“나 그런 사람 아닙니다.”
르니예는 그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한 번만 더 그딴 생각 했다가는 진짜 확.”
“확, 확 뭡니까?”
“그 뒤는 상상에 맡기겠어.”
르니예가 샤피로를 향해 윙크를 했다. 그 윙크에 샤피로는 잠시 혼절할 뻔했다. 안타깝게도 벨데메르가 그를 튼튼하게 만드는 바람에 샤피로는 혼절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지만.
“그럼 아까 그 시선은 뭐지, 르니예? 게다가 샤피로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벨데메르는 심기가 조금 불편해지려고 했다. 나 말고 다른 남자를 원한다고 말하다니,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아, 샤피로에게 시킬 일이 있다는 뜻이었어요.”
“그 말을 왜 그런 식으로 하십니까? 제 심장 떨어지는 걸 보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진짜 심장 떨어지게 해줘?”
르니예의 협박에 샤피로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새로 소원이 들어왔는데, 다른 소원으로 바꾸게 하려고요.”
“무슨 소원인지 모르지만, 규칙에 어긋나지 않으면 그냥 들어주시죠.”
“그래, 본인이 기회가 한 번뿐인 것을 알면서도 바꿀 마음이 없다면 그냥 놔둬.”
르니예가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르니예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쾅 넘어갔다.
“절대 안 돼! 어떻게 단 한 번뿐인 기회를 그딴 멍청한 소원으로 날릴 수 있어?”
이건 르니예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럴 수 없어!”
게다가 그 결과란 얼마나 끔찍한가. 마크의 눈동자가 있던 자리에서 구더기가 들끓는 모습을 보면 제인은 기절하고 말 것이다.
“절대, 절대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어.”
르니예는 허공을 향해 주먹을 쥐고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해서 말했다.
“르니예, 그 소원은 들어주지 않을 테니 이만 진정해.”
“자자, 르니예 님, 일단 앉으십시오.”
샤피로가 의자를 세우고, 벨데메르가 르니예를 앉혔다. 르니예는 찬물을 한 컵 비우고서야 자신이 쓸데없이 흥분했음을 깨달았다.
너무 감정 이입을 심하게 한 탓이다. 하지만 감정 이입을 안 할 수도 없잖아?
이건 마치 ‘소원을 빌기 전 르니예를 만나면 어떻게 할래?’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와 비슷했다.
과거의 르니예를 만났다면 정신 차리라고 뒤통수를 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제인 뒤통수를 후릴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유혹.”
르니예는 재빨리 덧붙였다.
“나 말고, 소원 빌 사람.”
제인의 뒤통수를 때려서 정신 차리게 하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이 있었다. 제인이 정신을 차리게 할 방법.
일명 벨데메르 작전이었다. 르니예가 에드윈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된 데에는 벨데메르의 공이 컸다.
“가서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 줘.”
벨데메르가 좋은 남편이 되겠다며 다정하게 굴었을 때 르니예는 깨달았다. 에드윈이 저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그러니 제인도 깨닫게 해 줄 셈이었다.
“할 수 있지?”
“물론입니다만, 그걸 제가 해야 합니까?”
르니예는 아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얼굴이었으므로.
“마크보다 잘생겨야 이 작전이 성공하는 거야.”
“제가 마크라는 사람보다 잘생겼습니까?”
“마크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 영지에 샤피로보다 잘생긴 사람은 없어.”
그런 사람이 있다면 진작 소문이 났겠지.
“벨데메르 빼고.”
덧붙인 말에 벨데메르는 만족했다.
“훗, 그건 그렇습니다.”
벨데메르 다음으로 잘생겼다는 칭찬에 샤피로도 만족스러워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 르니예의 칭찬은 샤피로를 춤추게, 아니 연기하게 했다.
“샤피로라고 합니다.”
“제, 제인이에요.”
샤피로는 건넨 손을 마주 잡는 제인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입술 끝만 살짝 붙었다 떨어졌는데도 제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고, 곧 마크 올 시간이에요.”
붉어진 얼굴을 숨기느라 제인이 급히 말을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르니예의 간곡한 부탁에 질투심 유발 작전을 한다고 하기는 했는데,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올 줄 몰랐다.
“컵이 아주 예쁘네요.”
샤피로는 제인이 만든 컵을 하나 들어서 살펴보았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샤피로를 비추자, 샤피로 뒤로 후광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그의 윤기 나는 금발에 햇빛이 부서지고, 기다란 속눈썹에 그늘진 눈매는 그윽하기 그지없었다.
제인은 잠시 넋을 놓았다.
“제인 님?”
“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뚫어지게 쳐다봤죠.”
제인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래서야 질투심 유발 작전 시작도 하기 전에 심장 떨림으로 기권하게 생겼다.
“저 때문에 일부러 오셨는데 차도 한 잔 안 내드렸네요.”
“차보다 컵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항상 저 물레를 써 보고 싶었거든요. 가르쳐 주실래요?”
제인은 흔쾌히 허락했다. 차를 앞에 두고 할 이야기도 없었으니 어색한 시간을 흘려보내기에 아주 딱이었다.
곧 흙을 가지고 올 마크에게 보여 주기에도 좋겠지.
“그럼 일단 앞치마 먼저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인은 앞치마를 건네주었다. 샤피로는 앞치마를 건네받으려다가 말고, 허리를 숙였다.
머뭇거리던 제인은 그의 목으로 앞치마를 걸어 주었다.
“그, 뒤에, 끈도 매셔야 하는데…….”
“아, 그렇습니까? 제가 앞치마는 잘 안 해 봐서.”
잘 안 해 보긴. 앞치마는 그의 일상복과 같았다. 하지만 제인과 더 가까이 서기 위해 일부러 어색한 척 굴었다.
“그럼 제가 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샤피로는 대뜸 제인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두, 뒤를 도셔야 하는데…….”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인 님?”
다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하기는 아주 쉬운 연기에 속했다. 제인은 갑자기 다가온 샤피로 때문에 당황하여 자기가 샤피로 뒤로 가서 설 생각조차 못 했다.
제인은 손을 뻗어 샤피로 등 뒤로 리본을 묶어 주었고, 멀리서 보기에 그 둘은 다정한 연인 같았다.
“샤피로가 아주 잘하네요.”
멀리서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르니예는 샤피로의 엉덩이라도 두드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아주 유능한 사역마를 만들었군. 그런데 르니예.”
“네?”
“저 여자가 정확히 무슨 소원을 빌었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르니예는 머뭇거리다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 남편이 죽어서도 저만 사랑하게 해 주세요, 뭐, 이런 소원을 빌었는데…….”
“‘제 남편이 죽어서도 저만 사랑하게 해 주세요’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