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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46화 (46/120)

46화. 따를 수 없는 명령

늦은 밤, 지쳐 잠든 르니예 옆, 벨데메르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중이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조각상에 봉인되었던 그 당시보다 지금이 더 혼란스러웠다.

“…….”

르니예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것도 참을 수 없이. 벨데메르는 잠들어 있는 르니예의 볼을 손끝으로 쓸었다.

부드럽고 말랑하게 눌리는 볼은 아까처럼 물들어 있지 않아도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다시 보아도 깨물어 주고 싶어서, 심히 당황스러웠다.

볼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천천히 입술로 내려갔다. 꽃잎같이 물든 입술을 살며시 짓누르자 르니예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으응…….”

르니예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그의 손끝을 물었다. 잠결에 그런 건지, 아니면 먹는 꿈이라도 꾸는 건지 모르겠지만, 손가락을 감싸는 말캉한 감촉에 벨데메르는 숨 쉬는 것을 잊어버렸다.

“…….”

그는 지금 당장 그 입술을 집어삼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 충동에 놀란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입술에서 손가락을 뗐다.

이건, 르니예를 유혹해서 저를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하겠다는 작전 때문도 아니었다. 순수한 욕망이었다.

그것도 르니예가 아닌 자신의 욕망. 벨데메르는 소리 없이 일어서 침실을 나왔다. 르니예를 옆에 두고 차분히 생각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하.”

그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잠에 들려면 와인이 필요할 듯했다.

“주인님?”

그가 포도주를 찾는 사이, 주방 쪽에서 인기척을 느낀 샤피로가 나왔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와인을 찾고 있다.”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샤피로는 익숙하게 잔과 와인병을 꺼내왔다. 그런 샤피로를 보며 벨데메르의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주인님?”

“샤피로.”

벨데메르의 목소리가 어둑한 주방에 낮게 깔렸다.

“내가 너를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주인님.”

“그리고 딱 그만큼 르니예를 아낀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긴 했지만, 샤피로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꽤 많이 아꼈다. 그렇지 않고서야 벨데메르가 빵까지 직접 구워서 먹였겠는가.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라는 말도 안 되는 비유까지 해 가면서 말이다.

“나는 너와 르니예는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엇비슷한 정도로 둘을 아낀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러기를 바랐다.

르니예가 샤피로와 달리 아주 특별한 존재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건 벨데메르의 긴 시간을 통틀어 전에 없이 새로운 것이었고, 새로운 것은 혼란을 일으키기 마련이었다.

또 다른 혼란으로 들어가기에, 그의 상황은 이미 복잡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 그렇지 않은 게 문제가 되는 거지.”

세사르의 등장이 문제를 수면 위로 올렸다. 세사르의 연모 대상이 르니예라고 생각했을 땐, 불같이 타오르는 화를 어쩌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대상이 샤피로라는 것을 알았을 때, 황당하기는 했지만 분노가 차오르지는 않았다.

“르니예 님이 주인님께 특별한 존재가 된 겁니까?”

“그걸 나도 모르겠다.”

마리아의 결혼식에서, 벨데메르를 제외한 모두가 춤을 추었다. 르니예도, 샤피로도 환히 웃으며 파티를 즐겼다.

“르니예를 볼 때, 입을 맞추고 싶었다.”

“예?”

“그런데 너를 볼 때는,”

“저를 볼 때는 그렇지 않으셨군요.”

그랬다. 샤피로를 보며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 차이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를 생각해 보니, 르니예와는 키스를 한 적 있고 너와는 없더군.”

아주 큰 차이였다. 르니예와 결혼식에서 키스하기 전에는, 르니예와 키스하고 싶다는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으니.

“그래서…….”

어둠 속에서 벨데메르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샤피로는 불안했다.

“너와 입을 맞추어 보면, 더 정확히 알 것 같군.”

어떤 실험이든 조건은 동일해야 한다. 조건이 동일해야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저, 저랑 말씀이십니까?”

샤피로는 심히 당황스러웠다. 이건 세사르가 저에게 청혼할 때보다 더했다.

왜 요 며칠 동안 이런 일이 연달아 생긴단 말인가.

“그래.”

샤피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저는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샤피로는 벨데메르를 섬겼고, 그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한다. 그게 어떤 명령이든.

그것이 비록 입을 맞추라는 명령이라도 말이다.

“짧게 끝내지.”

“예, 주인님.”

벨데메르가 샤피로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천천히 샤피로에게 다가갔다.

“…….”

“…….”

두 입술이 맞붙기 직전이었다. 벨데메르의 코끝이 샤피로의 코끝을 스쳤고, 벨데메르는 온몸을 타고 흐르는 불쾌한 전류에 훅 몸을 물렸다.

샤피로 역시 있지도 않은 솜털이 오소소 서는 기분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샤피로는 식탁을 부여잡고 서서 거친 숨을 뱉어냈다.

“주인님, 저는, 저는, 도저히…….”

차라리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발등에 입을 맞추라고 하면,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이건 아니군.”

이건 아니었다. 확실히 깨달았다. 샤피로와는 입을 맞추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입을 맞출 수조차 없었다. 그런 건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건 아니다, 확실해.”

벨데메르는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르니예는 샤피로가 아니다. 르니예는 샤피로와 같지 않아.

더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 *

“으, 다리야.”

어제 오랜만에 춤을 췄더니 일어나자마자 종아리가 뻐근했다. 르니예는 종아리를 주무르다 제 옆에 벨데메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써 일어났나?”

보통 먼저 일어나면 늘 르니예를 깨워 주던 벨데메르였기에, 르니예는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샤피로.”

가운만 걸치고 아래로 내려간 르니예는 주방에서 넋을 놓고 서 있는 샤피로를 불렀다.

“샤피로?”

샤피로는 식탁을 닦던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샤피로.”

“악!”

르니예가 다가가 샤피로를 톡 건드리자, 샤피로는 놀란 고양이처럼 튀어 올랐다.

“깜짝 놀랐습니다, 르니예 님.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샤피로는 심장이 있는 부근을 매만지며 말했다.

“물론 저는 심장이 없지만 말입니다.”

“난 심장이 있고, 내 심장은 정말 떨어질 뻔했어.”

르니예도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라면,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거죠?”

내가 잠이 덜 깬 건지, 쟤가 잠이 덜 깬 건지, 르니예는 샤피로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벨데메르는 어디에 있어?”

샤피로의 꼴을 보아하니 제대로 된 대화는 그른 것 같아, 르니예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서재에 계십니다.”

“이 아침부터 서재에?”

“예, 봉인에 관해 연구하시는 중입니다.”

어젯밤 그 참사가 일어나고 벨데메르는 바로 서재에 틀어박혔다. 벨데메르는 샤피로가 각지에서 모아온 고서를 한 권 한 권 탐독하는 중이었다.

신이 내린 형벌에 관한 정보가 조금이라도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어젯밤 샤피로와 끔찍했던 기억을 잊기 위해서 책을 넘겼다.

“아마 올라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 르니예 님?”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한 박자 늦게 대답하는 샤피로를 기다리지 못하고 르니예는 벌써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벨데메르.”

르니예는 서재 앞에서 똑똑- 노크를 했다.

“……들어와라.”

서재 문을 연 르니예는 문도 제대로 열리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장서에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걸, 다 읽은 거예요?”

“그래. 얼마 되지 않으니 놀랄 것 없다.”

르니예는 책을 밟지 않게 조심하며 벨데메르를 향해 갔다.

“샤피로가 좀 이상해요.”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게, 어디 아픈가 싶지만 그는 사역마였다. 그러니까 그 안에 흐르는 마력이 부족하다든가 그런 이유가 아닐까 했다.

“아주 정신을 못 차리고…….”

여기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이 또 있었다. 르니예는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지만,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는 벨데메르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둘 다 오늘 이상하네. 둘이 뭘까.

“어제 둘이 뭐 했어요?”

“뭐?”

벨데메르가 화들짝 놀랐다.

“뭐 했구나?”

“그저 연구를 했을 뿐이다. 약간 사고가 있긴 했지만.”

“어디 다친 건 아니죠?”

“몸이라면 그렇다.”

정신을 다쳤을 뿐, 육체는 멀쩡했다.

“그러니까 안 다쳤다는 뜻이죠?”

“그래,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벨데메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르니예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대강 연구하다 사고가 있었지만 다치지 않았다, 정도로 정리했다.

“연구도 좋지만, 아침은 먹고 해요.”

“…….”

또, 또 정신이 나갔다.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이름을 불렀다. 벨,데,메,르. 통통하고 붉은 입술이 오므라들었다가 미소 짓듯 옆으로 벌어졌다.

샤피로의 입술하고는, 확실히 달랐다. 그냥 보기만 해도 다른 것을 왜 확인하려고 했을까.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입술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맛있는 냄새 나네요. 얼른 내려가요.”

르니예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제가 자신의 입술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는 것을.

그리고 벨데메르 역시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저에게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이게 다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저주 때문인데.

“가만.”

르니예를 따라 주방에 내려가던 벨데메르는 순간 뒤통수를 후리는 아이디어에 딱 멈췄다.

“이게 진짜 저주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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