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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45화 (45/120)

45화. 심장이 없어

“샤피로,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세사르의 청혼에 샤피로와 르니예, 벨데메르까지 전부 얼이 빠진 사람처럼 서 있었다.

누구 하나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샤피로였다.

“세사르 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가문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거고요.”

“가문에서 제명당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세사르의 결심은 그만큼이나 확고했다. 샤피로는 상당히 곤란했다. 그의 오랜 사역마 인생에서 이렇게 곤란했던 적은, 진심으로 처음이었다.

“저 세사르 경, 세사르 경의 나이를 생각해 보았을 때 결혼은 너무 이르지 않나요?”

그의 나이 겨우 열일곱. 솜털 보송보송 난 얼굴로 청혼이라니. 르니예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 보려 나섰다.

“약혼 먼저 하고 제가 성년이 된 후에 식을 올리면 됩니다. 삼 년은 금방 가니까요.”

“아…….”

어떻게 해도 그의 마음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주인님, 르니예 님, 여기는 제가 해결하고 가겠습니다.”

르니예와 샤피로의 생각이 통했다.

“그러지.”

벨데메르 역시 샤피로의 생각을 읽었다. 벨데메르는 세사르를 흘긋 보고는 순순히 나와 주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생각,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샤피로였을 줄이야!”

안에서 차분한 척 가만히 있던 르니예는 나오자마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샤피로였다니, 샤피로였다니!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 보니 샤피로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샤피로도 어디서 보기 힘든 미남이었으니까.

“벨데메르도 놀랐죠?”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표정을 살폈다. 이렇다 할 표정은 없었지만, 그는 심각해 보였다.

“벨데메르?”

“응? 뭐라고 했나? 다른 생각을 하느라 못 들었군.”

벨데메르가 충격이 심한가 보다. 하긴, 늘 모든 관심을 혼자 받아왔는데 그게 샤피로를 향하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세사르 경이 참 보는 눈이 없네요.”

르니예는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벨데메르를 놔두고 샤피로에게 빠지다니. 나한테는 다행이지만요.”

르니예가 벨데메르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 미소를 보는 벨데메르의 입꼬리도 같이 곡선을 그렸다.

르니예의 웃는 얼굴을 보면 자동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든, 폭풍우가 휘몰아치든, 르니예의 미소를 보면 어느새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다.

“원래 첫눈에 반하면 다른 건 안 보이는 법이죠.”

르니예도 그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아니,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에드윈이 콜론과 저를 경멸하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려고 그 애를 썼던 걸 생각하면.

르니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샤피로가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어떡해요, 벨데메르?”

“음.”

단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은 문제를 꼽으라면, 바로 지금 이 상황을 말하겠다.

자기가 만든 사역마에게 청혼을 하는 인간이 나올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

“샤피로가 원하면 보내 줄 거예요?”

“그래야겠지. 오랜 시간 내게 충성했으니, 그에 대한 대가로 말이야.”

다만, 샤피로는 그의 역작 중에서도 역작이었으므로 가끔 생각이 날 것이다.

“그런데 그자가 왜 샤피로와 그대를 연인이라고 생각했을까.”

세사르의 말을 듣는 내내 벨데메르는 그것이 신경 쓰였다. 이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그 문제가 가시처럼 박혀 계속 거슬렸다.

“그러니까요.”

르니예는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리며 웃었다.

“샤피로랑 같이 쇼핑도 하고 그래서 그런가 봐요.”

생각나는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샤피로랑 쇼핑을 하고 나란히 집에 들어갔으니, 부부로 보일 수밖에.

게다가 샤피로는 하인들이 입는 옷이 아니라 귀족이 입을 법한 좋은 옷을 입으니 더더욱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옷을 좀 더 하인 같은 걸 입혀야 하나.”

아무튼 결투까지 가지 않고 일이 해결되었으니 르니예는 이제 마음을 편히 가졌다. 하지만 벨데메르는 아니었다.

그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샤피로와 르니예가 연인처럼 보였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아니, 마음에 걸리다 못해 불쾌하기까지 했다.

“……이렇게나 신경 쓰일 일인가.”

누가 보면 르니예가 아니라 자신이, 르니예의 남편이 되고 싶다고 한 줄 알 것이다.

“하.”

벨데메르는 그저, 이 상황이 어이없고 기가 차고, 난감했다.

“세사르 님,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샤피로는 세사르의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다정해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다정함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손을 잡아 보면 세사르도 알게 될 것이다. 샤피로가 사람이 아님을.

그의 손은 매끄럽지만 부드럽지 않고, 온기 대신 냉기가 흘렀다. 사람이 아니기에 그랬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뭡니까?”

“사역마입니다. 제 주인님께서 마법사라는 사실은 아시겠지요?”

충격에 빠진 얼굴로 세사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샤피로.”

세사르는 제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샤피로의 손을 세게 움켜잡았다.

“그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

“저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사 서품도, 가문도 다 버릴 각오가 되어있어요.”

샤피로는 진심으로 세사르가 걱정되었다. 그는 정신이 아픈 게 분명했다.

“그러니 당신이 사람이건 아니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사르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쉽게 꺼질 것 같지 않은 열정에 샤피로는 속으로 당황했다.

“하지만 세사르 님, 저는 심장이 없습니다.”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세사르 님을 좋아하지 않아도 말입니까?”

세사르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래, 이건 상관이 있는 모양이다.

“저는 오로지 주인님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 외에 다른 감정은 품지 못해요.”

경미한 감정은 있었다. 그게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학습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성가심, 경멸, 짜증 같은 감정은 간혹 느꼈다.

하지만 사랑 같은 감정은 달랐다. 애초에 샤피로는 벨데메르만 사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그래도 괜찮습니다. 나 혼자 샤피로를 좋아해도 괜찮아요. 내 옆에만 있어 주세요.”

그 마음이 절절했다. 사역마여도 좋고, 감정을 느끼지 못해도 좋다는 저 어린애가 어쩌면 좋은가.

……어린애? 그래, 그렇지. 키랑 덩치는 성인 남성이지만 그는 아직 미성년자였다.

“하지만 세사르 님, 저는 세사르 님의 나이가 괜찮지 않습니다.”

이거야말로 그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기사 서품도 올해 받으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고, 막 기사가 되신 분에게 제 미래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세사르의 표정이 이내 침울해졌다.

“만약 세사르 님께서 성년이 되시고, 왕국에서 제일가는 기사로 이름을 날리시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성년이 되려면 3년이 필요했다. 3년이면 마음이 수백 번은 더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샤피로 그대의 뜻이 정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

세사르는 샤피로의 뜻을 받아들였다. 3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 기다림이 길고 쓰겠지만.

그 안에 왕국에서 제일가는 기사가 될 것이다. 그런 다음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샤피로를 데려와야지.

그는 다짐했다.

“그럼 세사르 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샤피로는 세사르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고는 나왔다. 벨데메르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연서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뱃속이 보글보글 끓는 것 같았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지만 불쾌하지도, 귀찮지도 않았다.

3년 뒤 변심한 세사르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아주 가끔 그가 생각날 것 같았다.

“……안 버리길 잘했군.”

샤피로는 서랍 안에서 새빨간 하트 모양의 보석이 달린 머리핀을 꺼냈다. 버리려고 했지만, 어쩐지 버리고 싶지 않아 서랍에 넣어 두었던 것이었다.

그는 거울을 보고 머리핀을 꽂았다. 그리고 매일 같은 시간, 대문을 열고 그 근처를 청소했다.

다시 수도로 돌아가는 세사르가 그 앞을 지나가면 볼 수 있게, 아주 천천히 비질을 했다.

“……샤피로.”

말을 타고 지나가는 세사르가 그를 부른 것도 같았다. 아닐 수도 있었다. 샤피로는 세사르가 가는 길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안녕히 가십시오, 세사르 님.”

* * *

“너무 예뻐요, 마리아!”

“감사합니다, 르니예 님.”

세사르가 떠나고 이틀 뒤, 마리아와 로이드의 결혼식이 열렸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조촐하게 열린 결혼식에는 벨데메르도 참여했다.

“벨데메르 님, 잘 지내셨습니까.”

체이스는 로이드의 하객으로 초대받았다. 매일 돌을 주고받고 하다 보니 친해진 모양이었다.

“오, 체이스 님, 못 본 사이 얼굴이 더 안 좋아지셨습니다.”

“……안부 인사한 거 맞지?”

“물론이지요, 체이스 님.”

샤피로가 눈을 반달처럼 휘며 말했고, 체이스는 영 찝찝했다.

“페롤라 님 소식은 좀 아십니까?”

“안 그래도 다른 영지에 사는 친구한테서 편지가 왔어. 조각상을 쫓다가 절벽에서 떨어졌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당분간 못 움직일 거야.”

조각상 체이스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군. 샤피로와 체이스의 대화를 흥미롭게 듣던 벨데메르의 시선이 저 앞에서 마리아의 조카와 춤을 추는 르니예에게로 향했다.

밝게 웃는 르니예의 옆으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탐스러웠다. 벨데메르는 당장이라도 그 뺨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샤피로에게도 입을 맞추고 싶었던 적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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