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39화 (39/120)

39화. 가질 수 없다면

“리자르.”

“제 이름은 체이스예요, 주인님.”

“아니, 네 이름은 리자르야.”

페롤라는 조각상 체이스를 받침대에 올려 두고, 천천히 그 주위를 돌며 감상하듯 훑어보았다.

“가만, 가만히 있어야지.”

페롤라는 체이스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줄자를 들고 그의 가슴, 허리, 골반 사이즈를 쟀다.

“됐어, 내려와.”

큰 도화지 한구석에 치수를 적으며 페롤라가 명령했다. 체이스는 그제야 뻣뻣했던 몸을 풀었다.

“주인님, 저 잠시 산책을 다녀와도 될까요?”

“산책? 또 그 애 만나게?”

페롤라의 입매가 옆으로 쭉 찢어졌다. 인적 없는 숲 속이라 몇 번 나가게 해 줬더니 체이스는 친구라는 것을 만들어 왔다.

그 친구가 산짐승이나 나무, 이런 거면 좋았으련만, 하필이면 아주 예쁘게 생긴 여자애였다.

“안 돼.”

“주인님.”

“안 된다면, 안 돼. 넌 내 소유물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페롤라가 체이스의 가슴팍 위에 손바닥을 올리며 말했다.

“이 안까지 전부 내 것이란 뜻이야.”

소원을 제대로 빌어야 했는데. 조각칼을 날카롭게 다듬으며 페롤라는 후회했다.

살아 숨 쉬게 해 달라고 할 게 아니라, 맹목적으로 충성하게 만들어 달라고 할걸.

기껏 멋지게 조각해서 숨결까지 불어넣어 줬더니, 반항을 해?

“리자르, 다시 서 봐.”

페롤라는 조각칼을 빛에 비춰 보며 말했다.

“허리 부분 조금만 다듬자.”

아무래도 허리가 두꺼워서 가슴부터 골반까지 비율이 맞지 않는 듯했다.

“리자르, 왜 대답이 없……, 리자르?”

두리번거리던 페롤라의 시선에 활짝 열린 창문이 보였다.

“도망친 거야?”

피가 거꾸로 솟았다.

감히 도망을 쳐?

그는 저의 것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히 저의 것. 그의 몸 어디 한 군데 저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감히.”

페롤라는 벽에 걸린 석궁을 들었다. 그는 도망칠 수 없다. 그럴 수 없다.

“……!”

“체, 체이스!”

마력을 담은 석궁은 정확히 목표물을 조준했다. 큰 짐승을 잡는 데 쓰이는 화살은 조각상 체이스의 등을 관통해 정확히 심장을 맞혔다.

“체이스, 걱정하지 마. 조각상은 심장이 없으니 넌 충분히…….”

샤피로가 재빨리 달려가 체이스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정중앙에서부터 갈라지는 중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벨데메르가 문밖으로 나와 샤피로와 체이스에게 다가왔다. 저를 닮은 조각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세상에, 신이시여.”

르니예는 평소에 쓰지도 않던 말을 읊조렸다. 석궁을 맞고 산산이 조각난 체이스를 보자 눈앞이 하얘졌다.

“체이스!”

“체이스라뇨.”

르니예가 체이스를 부르며 달려가는데 그보다 한발 먼저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페롤라?”

페롤라는 바닥에 석궁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커다란 자루를 펼쳤다. 그러고는 다시 평범한 조각상으로 돌아간 체이스의 조각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페롤라 님?”

샤피로가 체이스의 조각상을 가져가지 못하게 막으며 물었다.

“뭐긴 뭐야, 내 조각상이 부서졌으니 가져가서 고치려는 거죠.”

“안 됩니다.”

“안 되는 이유는?”

샤피로가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런 이유는, 없었다.

“소원을 빌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잖아요, 안 그래요?”

페롤라가 르니예를 보며 물었고, 르니예 역시 할 말이 없었다.

“리자르는 내 조각상이니 부수는 것도 내 마음, 다시 가져가 붙이는 것도 내 마음이죠.”

“…….”

페롤라가 샤피로의 손을 치우고 커다란 조각 위주로 자루에 넣었다. 그러곤 그 자루를 낑낑거리며 어깨에 메고, 벨데메르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떠났다.

“……세상에, 체이스 어떡해.”

르니예는 그 뒷모습을 경악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다가 소름 끼친다는 듯 제 팔뚝을 문질렀다.

“불쌍한 체이스.”

사역마는 아니었지만 체이스는 그 엇비슷한 존재였다. 샤피로는 체이스에게 동질감이라도 느꼈는지 체이스의 가루를 모으며 애도를 표했다.

“벨데메르, 괜찮아요?”

그리고 르니예는 발견했다. 희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벨데메르를. 그 역시 조각상에 봉인된 처지.

살려 달라 달려온 조각상이 부서지는 모습이 남 일 같지는 않았다.

“역시 그날 팔을 잘랐어야 했다.”

“아무래도 네가 상단에서 지내기는 어려울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바딜?”

“도련님께서 너를 직접 불러 말씀하시겠지만, 네가 충격받을까 봐 미리 말해 주려는 거야.”

그는 프리야가 더는 상처받길 원치 않았다. 르니예의 괴롭힘에서 프리야는 이제야 벗어났다.

그런 모진 괴롭힘을 다 참고 견뎠는데 이제 와 실연의 아픔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건, 프리야에게 너무 가혹하잖아.

“작은 주인님께서 내가 이제 꼴 보기 싫어지셨대?”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뭔데? 아니, 내가 직접 가서 여쭤볼게.”

아직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상단에 붙어 있으려면 에드윈이 꼭 필요했다. 에드윈이 나가라고 하면 프리야는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만일 상단에서 쫓겨난 걸 마코야데스가 알게 된다면…….

그는 실패한 길드원에게 가차 없이 채찍을 내리곤 했다. 은유적인 채찍이 아니라 진짜 채찍을 말이다.

“프리야, 진정하고 내 말 들어.”

이게 도련님을 위하는 길이다. 바딜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에드윈은 프리야의 안전을 위해 프리야를 떠나보내는 것이었다.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그러나 그 이유를 곧이곧대로 말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에드윈은 바딜에게도 자신이 하는 일을 다 알려 주지 않았다.

만일 프리야가 에드윈의 말을 헤어지자는 뜻으로 알아듣는다면? 그러다 다른 남자라도 만나게 되면?

에드윈은 겉으로는 축하하면서 속으로 앓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프리야도 갑작스레 떠나란 말을 듣게 되면 분명 충격을 받을 것이었다.

“실은 도련님께서 지금 중요한 일을 맡고 계셔.”

“무슨 일인데?”

“정확한 건 나도 몰라. 하지만 이번 일이 잘되면 수도로 올라가시게 될 거야.”

중요한 일, 뭘까? 잘 되면 수도로 올라간다는 뜻은, 저 위에 계신 분께서 내린 명령이란 뜻인데.

“그런데 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있으면 수도로 못 올라가시는 거야?”

“아니. 이 일이 위험한 일이라서 그래. 만약에 도련님께서 실패하면, 너도 연루되어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그러시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지? 프리야는 복잡한 머릿속을 숨기며 눈썹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바딜, 위험하다고 작은 주인님을 떠날 순 없어.”

왜냐면 떠나는 순간, 내가 위험해지니까.

프리야는 바딜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야. 이런 걸 모르고 이별 통보를 받았으면 나 정말 쓰러졌을지도 몰라.”

바딜이 얼굴을 붉혔다. 하여간 바보 같은 놈이다. 눈치라고는 새끼손톱만큼도 없는. 하지만 이 바보 같은 놈이 내 정보원이니 잘해 줄 수밖에.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알려 줄 거지, 바딜?”

르니예, 벨데메르, 샤피로는 충격에 빠진 채 집 안으로 들어왔다.

“살아 숨 쉬게 해 달라고 해 놓고 부수는 건 무슨 심리야?”

르니예는 페롤라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체이스가 무슨 잘못을 한 것 같지는 않아.”

만약 그랬다면 부수고 난 다음에 페롤라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변호를 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니까.

“체이스는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왔습니다.”

샤피로는 체이스의 작은 조각과 가루를 담은 제 손수건을 고이 쌌다.

“페롤라 님이 저에게 무슨 짓을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아니면 페롤라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이유가 어떻든, 끔찍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페롤라 님을 가만두지 않고 싶지만…….”

샤피로는 말끝을 흐렸다. 가만두지 않을 명분이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조각상은 페롤라의 소유였다.

그걸 부수든 녹이든 그건 페롤라의 자유였다.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있지만…….”

르니예도 말끝을 흐렸다. 페롤라에게 아주 작은 빚을 지게 해서 파산에 이르게 만드는 방법 같은 것도 알지만, 그럴 수 없다.

착한 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엊그제인데, 벌써 그런 짓을 해? 게다가 페롤라는 그냥 자기가 만든 조각상을 부쉈을 뿐이다.

“오늘은 쉬이 잠들지 못할 것 같군요.”

그랬다.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샤피로도, 르니예와 벨데메르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무서워서 못 자는 건가? 그렇다면 오늘은 특별히 내 팔을 베고 자게 해 주지.”

“무서워서 못 자는 거 아닌데…….”

무섭다기보다 충격적이었다. 체이스가 불쌍했다. 무엇보다 페롤라가 괘씸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앞에서 강한 척할 필요 없어, 르니예.”

강한 척이 아니라, 정말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벨데메르의 품은 넓고 좋았으므로, 르니예는 일단 가만히 있었다.

머리는 거부해야 한다고 소리치는데, 몸과 마음이 합심해 그 명령을 거부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조각상인 채로 그대의 남편이 되었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지?”

‘제 남편이 되어 주세요.’라는 소원을 빈 직후에 르니예도 그 생각을 했다. 말하는 조각상이 남편이라니.

“일단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옮기려고 했어요. 벨데메르가 못 움직일 줄 알았거든요.”

조각상인 채로 말만 할 줄 알고 짠 계획이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방에 벨데메르를 데려다 놓는 거죠. 그 방에는 오로지 나만 들어갈 수 있고요.”

만일 벨데메르가 말하는 조각상인 채 있었다면 일은 좀 쉬워졌을 수 있다.

“벨데메르 몸에 묻은 먼지도 털고, 수건으로 광도 내고, 말동무도 해 주고.”

그러니까 나를 방에 가두고, 저만 혼자 와 감상할 작정이었다는 거지.

갑자기 벨데메르의 말수가 줄었다.

“벨데메르?”

그걸 이상하게 여긴 르니예가 동그란 눈으로 벨데메르를 쳐다보며 물었다.

“갑자기 왜 멀어지는 거예요? 더 가면 떨어질 거 같은데? 벨데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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